제4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는 일본 영화감독 이와이 지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뱀파이어>를 상영하는 이와이 지 감독 특별전이 열렸고 <뱀파이어>가 상영된 후에는 관객과 함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가 참여한 관객과의 대화(GV)에는 오랜 시간 그를 사랑해온 많은 관객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명은 LP로 제작한 <러브레터> OST를 선물로 챙겨 오기도 했다. 올해는 <러브레터>가 만들어진 지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와이 월드에는 <러브레터>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그리고 <하나와 앨리스>가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한 <뱀파이어> 속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피를 뽑는 뱀파이어가 사는 세계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이와이 월드’라고 부르던 세상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로 할 수 있는 일이 무한하지는 않아요.
영화 한 편이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나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존 레넌의 ‘Imagine’처럼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겠죠.
그렇게 좋은 메시지를 남겼는데도 우리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무언가를 계속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자살’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뱀파이어>의 배경이 된 밴쿠버는 물론 일본에도 자살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죠. 사회의 이런저런 상황이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일본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양극화되어가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차기작은 인터넷 세상에 익숙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예요.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이성과 친해지고 결혼까지 하죠. 오히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매일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끼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어찌 보면 참 극단적인 거죠. 사회는 점점 편리해지고 있고 슈퍼마켓에 가면 없는 물건이 없죠.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물건에 담긴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 것을 모른 채 돈만 내면 얻을 수 있죠. 지금 제가 먹는 이 딸기만 하더라도, 아무도 이 딸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의 노력으로 재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고마운 사람들이 별만큼 많은데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지나치게 편리해진 나머지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이며 기적이고 행운인데도 그런 고마움을 잊은 채 살아가죠.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양극화되는지도 모릅니다.” 한 편의 영화가, 청춘이 자살을 선택하고 서로의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금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가 기대하는 것도 세상의 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로 할 수 있는 일이 무한하지는 않아요. 영화 한 편이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나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존 레넌의 ‘Imagine’처럼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겠죠. 그렇게 좋은 메시지를 남겼는데도 우리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무언가를 계속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뱀파이어>는 3·11 동일본 대지진 이전의 작품이지만,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지진이 지나간 후 이와이 지는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을 통해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원전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꽃은 피네’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를 만들어 희생자들과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 정치적인 성향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편은 아니에요. 다만 사람들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슈의 원인이나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하죠. 가끔 제게 어떤 단체에서 행동을 함께하자며 연락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전 그런 단체와 연대하지 않으려고 해요. 대신 사회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일종의 작은 파티를 열고 있죠. 하나의 시선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듣고 나누죠. 식사를 하고 가볍게 술도 마시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돼요. 심각하기만 하면 참여하는 사람들이 줄거든요. 말하자면 예전의 살롱 문화 같은 거죠. 물론 영화계 사람만 참여하는 건 아니에요. 평범한 회사원부터 영화인까지 다양하죠. 지금 일본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함께할 수 있어요.”

 


<뱀파이어>는 각본은 물론 연출과 음악, 촬영까지 모두 이와이 지 혼자 해냈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를 만들면서 필요한 각각의 작업이 저마다 다른 즐거움이 있어서 시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은 고인이 된 시노다 노보루 촬영감독 때문이다. “많은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시노다 노보루가 세상을 떠나고 그를 대체할 감독을 찾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뱀파이어>를 촬영하는 내내 그와 함께 촬영장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쉽게도 <뱀파이어>의 국내 정식 상영은 아직 계획된 것이 없다. 하지만 그의 차기작이자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이 5월이면 개봉한다. 일본에서는 지난 2월에 이미 개봉했고 그의 오랜만의 신작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영화 <하나와 앨리스>의 프리퀄 격인 이 애니메이션은 하나와 앨리스가 만나게 된 사건을 그린다. <하나와 앨리스>의 주인공인 아오이 유와 스즈키 안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하나와 앨리스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배우들 자체가 곧 하나이며 앨리스죠. 꼭 그들이어야 했습니다. <하나와 앨리스>가 개봉한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배우들이 여고생으로 등장하는 프리퀄 버전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대신 목소리로 연기할 수 있었죠.”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은 독특한 방식으로 완성된 애니메이션이다. 배우가 장면을 연기하면, 그 움직임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완성하는 데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아오이 유와 스즈키 안은 스케줄이 맞지 않아 실사 촬영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와 앨리스>의 프리퀄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10년 전부터 생각한 일이죠. 그리고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이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움직이기를 원했어요. 애니메이션 속 사람이 그저 하나의 그림으로만 느껴지는 게 싫었죠.”

그는 요즘 한창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이번 영화는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요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인터넷 세상 속 아이들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저는 아무래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가이다 보니 남들이 안심하고 있는 분야에서 불안한 점을 끄집어내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아이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주 마주치는 이웃과 인사도 하지 않는 어른들은 과연 옳은 걸까요?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은 만화를 많이 보면 바보가 된다고 했죠. 만화 대신 책을 보라고 했어요. 하지만 책만 들여다보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책 속 세상에 갇히는 대신 세상 밖으로 나가 눈과 손으로 느끼며 세상을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옳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또 오늘도 변하고 있다. 이와이 슌지의 삶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영원한 파트너로 남을 줄 알았던 시노다 노보루 촬영감독이 그를 떠났고, 예상치 못한 비극인 대지진이 지나갔다. “저도 날마다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끔 나이가 드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고 예전에 비해 설레는 순간도 줄어든 것 같고요. 그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왔고 분명 그런 것들이 제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가령 <러브레터>를 만들던 때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나 비로소 그 사랑을 포기하고 마음을 정리한 시점이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때였죠. 그렇기 때문에 <러브레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와이 지는 아마 지금도 차기작의 시나리오를 쓰는 데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혼자 산책할 때 시나리오를 위한 영감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니, 도쿄의 어느 골목을 혼자 거닐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의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있으며 그 삶의 모든 순간이 이와이 지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