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녀를 본 건 8월에 열린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식에서였다. 레드 카펫에 등장한 이윤지는 분홍 시폰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관객의 시선은 온통 하늘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배에 모아졌다.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어 부쩍 부른 배가 만드는 D라인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아름다운 이미지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우아함을 느끼게 했다. 인생에서 운명적으로 선택된 어떤 순간에만 가능하기에 더 빛나 보였다고 할까.
이윤지는 채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드라마 <논스톱4>를 시작으로 <더킹 투하츠> <왕가네 식구들> <닥터 프로스트>, 최근작 <구여친클럽>에 이르기까지 밀도 있는 출연작 리스트를 쌓아왔다. 장르도 역할도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어느 작품에서든 한 번도 대충 하는 듯한 인상은 없었던 그녀다. 출산을 한 달 남짓 앞두고 만난 그녀는 쾌활하고 이지적인, 우리가 항상 봐오던 바로 그 이윤지였다. 다만 어머니가 된다는 생애 가장 아름답고 또한 혼란스러울 변화를 앞두고 가지게 된 더 깊어진 생각과 고민, 삶을 대하는 시선들이, 그녀를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이윤지로 성장시킨 것 같았다.
태명이 뭐예요? ‘콩닭이’예요. 2월 즈음 임신 6주 차가 되었을 때 아이의 콩닥콩닥하는 심장 소리를 처음 듣던 날 바로 지었어요. 그리고 저는 콩 요리 마니아, 남편은 닭 요리 추종자거든요. 부부의 취향을 적극 반영했죠.(웃음)
갑자기 불현듯 먹고 싶은 음식은 없었나요? 그걸 사 오는 게 임신 중인 아내를 둔 모든 남편의 피할 수 없는 미션이잖아요. 전 그런 게 없었어요. 그보다는 활동할 때 몸 관리하느라 못 먹던 음식들이 되게 먹고 싶었어요. 지금 안 먹으면 언제 먹을 수 있겠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번은 남편에게 짜장라면을 끓여달라고 했어요. 닭강정을 같이 먹을 때도 튀김옷은 다 벗기고 살만 발라 먹던 제가 임신하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먹으니까 남편이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그제야 유대감을 느꼈나봐요.
임신한 주변 사람들 말로는 처음 태동을 느끼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네. 진짜 이건 말도 안돼,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5월 8일이었어요. 2~3일 전부터 배에서 이상한 느낌이 왔어요. 사실 사람이 자신의 배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대부분 위가 아프거나 가스가 찬다거나 하는 소화기관에 생긴 트러블이 전부잖아요. 인터넷에 찾아보면 첫 태동 전에 물방울이 터지고 물고기가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든다는데, 전 그냥 소화가 안 되어 배가 꾸르륵꾸르륵하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아무튼 그러다 갑자기 툭, 하는 거예요. 소화기관에 이상이 생겼을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사인이 그것도 내 몸 안쪽에서 느껴지는 그 감각은, 정말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임신했을 때의 몸의 변화가, 인체의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30년 넘게 여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자연스럽게 손을 얹는 자리에만 존재하는 게 당연했던 심장이 지금은 제 몸 안에 하나가 더 있는 거잖아요. 오롯이 현재 임신한 상태인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상태잖아요. 새삼스럽게 내 몸 안에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어요.
그런 느낌이 두렵진 않았나요? 마냥 신기했어요. 두려운 건 몸의 변화보다는 세상에 나올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하는 부분이에요. 저 역시 아직 미완성의 인간인데, 이렇게 흠 많은 저를 누가 ‘엄마’라고 부르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요. 제가 제 어머니에게 배우고 혼나고, 동시에 무엇이든 의지하면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갖게 된 감정을, 제 아이가 똑같이 제게 가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내가 엄마가 되는 것도, 콩닭이가 세상에 나오는 것도 처음이니 함께 파이팅 해보자” 하고 배 속의 아이에게 말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지금까지 느낀 콩닭이는 어떤 아이인가요? 일단 참 씩씩해요. 그리고 음, 아마 책보다는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태교하면서 피아노 연주 음악도 많이 들려주었어요. 아이가 음악을 들을 때 많이 움직이더라고요. 어떤 직업을 갖든지 음악이 함께하는 아이였으면 해요. 이름에 ‘음’ 자를 넣으면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평소의 똑 부러지는 이미지를 봤을 땐 태교할 때도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겼을 것 같아요. 전 오히려 조금 설렁설렁한 것 같아요.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인 것보다는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게 좋겠다 싶었고, 그래서 일도 최근까지 쉬지 않고 계속 했어요. 엄마가 즐겁게 일할 힘이 있으면 아이도 건강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임신 초반에는 촬영하면서 밤도 많이 새웠죠. 특히 임신부라면 누구나 좋은 것만 보고 먹으려 노력하는 태교 기간에 드라마 <구여친클럽>에서 매일 소리 지르고 화내는 역할을 맡았으니 어려움도 있었죠.
맞아요. 성격도 강한 데다 극 중에서 파혼 위기를 겪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역할을 맡았는데 어떻게 대처했어요? 그때가 5~6월,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고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때라서 “엄마가 지금 하는 건 일 때문에 연기하는 거야. 진짜가 아니야” 하고 나 자신과 콩닭이를 계속 안심시켰어요. 원래도 워낙 촬영할 때 극도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보니 가족들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아이를 가지고 나서 연기를 하는 게 훨씬 자유롭고 편안하더라고요. 예전에는 반드시 해내야 해, 꼭 이렇게 표현해야 해 하면서 제가 만든 틀에 갇혀서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좀 더 제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연기하는 연습이 된 것 같아서 잘됐다 싶어요.
그러고 보니 8월에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개막식 사회자로 참석했었죠? 레드 카펫에 선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결혼 전부터 인연이 깊은 영화제고, 특히 지난해 결혼하고 올해 초 아이를 가진 뒤로는 처음 참석하는 거라서 더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제 삶이 변화하는 과정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아요. 작품 활동도 그래요. 어떤 시기에는 잘하고, 어떤 때는 못하기도 했지만 어떤 평가를 받건 머리를 쥐어뜯으며 최선을 다해 연기하던 당시의 제가 그 역할에 그대로 묻어나잖아요. 그런 직업을 가진 배우로서, 제게 생긴 변화들을 감추지 않고 더 자신 있게 드러내고 싶었어요. 물론 한동안 일을 쉬면서 아이를 낳고 바짝 관리한 후 언제 임신했었느냐는 듯 날씬한 몸으로 짠 하고 나타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혹시 달라질지 모르는 여배우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걱정해본 적이 있나요? ‘엄마 이윤지’에 대한 걱정은 크지만, 배우로서는 기대되는 부분이 훨씬 많아요. 인생의 큰 산을 하나 넘으면서 배우로서 그릇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동안 더 잘하고 싶고, 더 욕심내고 싶고, 그래서 매번 아쉽고 그랬거든요. 저는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칭찬하는 성격은 못 되지만 채찍질 다음에는 항상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하고 기대를 품거든요. 그게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아요.
여배우인 엄마를 둔 아이라면 자라면서 본의 아니게 주목받을 수도 있어요. 그렇죠. 엄마의 직업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겪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그 때문에 아이가 괜한 우월감이나, 반대로 지나친 피해의식을 갖지 않도록 그냥 아빠가 일하는 것처럼 엄마가 하는 일도 하나의 직업일 뿐이라는 걸 잘 이해시키고 싶어요.
2003년에 시트콤 <논스톱4>로 데뷔했으니 벌써 13년 차 연기자예요. 직장인으로 치면 차장, 부장급인 연차인데, 여태 잘해온 것 같아요? 아쉬운 건 많아요. 하지만 저는 일하면서 계속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 부분에 정말 감사해요. 저를 굴러 가게 하는 이런 기회들이 계속 주어졌으면 해요. 저 자신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제게는 성공일 것 같아요. 고위급 임원 자리에까지 올라가는 직장인은 못 되더라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