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에서 만난 염정아에게선 달뜬 기운이 느껴졌다. 올해 화보 촬영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 때문일 리는 없고(그녀가 수없이 해온 사진 촬영일 테니 말이다), 촬영 당일의 분위기라기보단 최근에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라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슈팅에 들어가면 깊게 가라앉았다가 잠시 옷을 갈아입고 헤어스타일을 정돈할 때는 촬영 스태프에게 장난스레 농담을 건네는 그녀에게서 긴 시간 카메라 앞에 서온 사람의 몸에 밴 능숙함이 느껴졌다. 촬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긴말도, 여러 컷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요새 <장산범>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고 했다. 데뷔작 <숨바꼭질>로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스릴러를 만들어낸 허정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2004년 출연한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를 인연으로 오랜 기간 돈독한 친분을 쌓은 제작자는 <장산범>의 여주인공으로 염정아를 미리 점찍어두었고, 출연 제의를 받은 염정아는 흔쾌히 승낙했다. 장산범은 원래 경남 장산 지역에 나타난다는 매끄러운 흰 털을 가진 요괴의 이름이다. 모티프가 된 설화의 내용에 걸맞게 영화 또한 제법 공포스럽게 그려질 예정이다. 감독의 전작을 생각해보면 정확한 줄거리를 몰라도 이 작품이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자아낼지 짐작할 수 있다. 염정아는 이 작품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 역할을 맡았고, 배우 박혁권이 그녀의 남편으로 분한다. 어느 날 이들 부부에게 자신이 바로 잃어버린 그들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소년이 찾아오면서 영화에 어둠의 기운이 드리운다.
그러고 보니 공포물, 그리고 엄마. 묘하게도 그녀가 12년 전 출연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에서의 모습이 교차된다. 영상, 음악, 의상, 무대효과 등 많은 것이 이 영화를 웰메이드 호러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영혼을 스멀스멀 잠식하는 듯한 배우들의 섬뜩한 연기는 뒤통수를 아리게 하는 뻐근하고 묵직한 공포를 자아냈다. 염정아가 연기한 새엄마 ‘은주’ 역의 다층적인 면모는, 그 역할을 맡은 배우로 하여금 100% 헌신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소화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부담이 큰 도전을 요구했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다가도 행복한 두 아이의 엄마인 양 재잘거리고, 발작적으로 웃다가도 얼음처럼 냉정한 표정의 계모로 돌변하는 스크린 속 염정아가 무섭지 않았다면 영화에 집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시간이 흘러도 영화사의 어느 시점에서건 좋은 연기, 좋은 캐릭터로 회자될 배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장화, 홍련> 이후로 <장산범>을 찍기까지 그동안 그녀는 한 번도 공포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섬세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갖춘 이미지를 생각하면 조금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대신 이듬해 개봉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는 당돌한 눈빛으로 남자들을 휘어잡는 팜므 파탈로 변신했다. 자극적이고 대담해 보이던 <범죄의 재구성>의 펑키한 사자 머리가 뒤이어 개봉한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갑자기 노처녀 시골 선생님의 젤 듬뿍 바른 우스꽝스러운 파마머리로 바뀌었을 때, 염정아는 자신이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렇게 연달아 보여준 채도 높은 연기가 염정아의 개성이라고 생각될 즈음, 그녀는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을 찍었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잠시 피신한 남자를 숨겨주는 사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변두리의 여선생. 고통스러운 시대상에 파묻혀 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는 먹먹한 사랑을 연기하는 그녀는 옅은 잿빛으로 자신의 색을 완전히 빼버린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드라마 <로열패밀리>에서 재벌가의 냉혹한 싸움을 이겨내고, <내 사랑 나비부인>에서 허영기와 허당기를 둘 다 가진 톱 탤런트 새댁이 되는 등 도회적인 이미지를 잘 살린 역할을 연이어 맡았다. 다만 커리어만큼이나 소중히 가꾸어야 할 것이 많아졌고, 한 사람이 같은 시간에 쏟을 수 있는 노력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에 어떤 일상은 필연적으로 달라져야 했다. 일에만 온전히 쏟았던 관심을 가정에 나누면서, 오롯이 여배우로서 살아온 삶이 변해가는 데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을까? “남편과 아이들이 생기고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 게 오히려 다음 일을 선택할 때 한 발짝 물러서서 더 넓은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원체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뎌요. 당장 작품을 하지 않아도 다른 해야 할 일이 항상 넘치고, 그래서 관심을 어디에 나눈다는 게 무의미하죠.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온 신경을 가정에 쏟고, 촬영에 들어가면 또 거기에 목을 매고요.” “항상 그때 처한 상황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모토예요. 그래서 작품을 할 때 깊이 빠져들었다가도 그 시간이 지나면 금방 빠져나오는 스타일이죠. 일을 안 할 때요? 그야말로 남들과 똑같은 주부예요. 아이들 학원 쫓아다니고, 장 보는 것 좋아하고. 다만 요리를 좀 못할 뿐이고요.(웃음)”
지금의 신도시가 생기기 전부터 동탄에서 살아온 그녀는 일명 ‘동탄맘’으로 종종 동네 주민들의 목격담에 등장하곤 한다. 여전히 어쩐지 콧대 높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에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 것만큼이나 일상에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솔직한 사람이다. 지난해 개봉한 <카트>에서 맡은 역할은 그런 일상의 염정아가 조금 더 묻어난 인물이었다. 생계를 책임진 주부이자 마트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직원은 그녀로서도 그간 해본 적 없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엄마이자 아내로서 배우고 느껴온 삶의 새로운 단면을 가장 많이 투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배우의 삶과 그가 맡는 배역이 동시에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지켜보는 대중으로서는 즐거운 일이다. 미칠 듯이 스크린을 뛰어다니는 시기를 지나 풍부한 경험과 여유, 그리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여배우의 삶에 안착한 그녀의 성공이 부럽게 느껴졌다. 정작 자신은 그런 삶을 ‘성공’이라는 목적 지향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제가 오늘 뭘 할지, 이달엔 어떤 걸 할지 단기계획은 진짜 잘 세우고 착착 진행하거든요. 하지만 미래를 길게 보는 데는 솔직히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아요. 충실하게 지금을 살면 어느 순간 잘 사는 지점에 가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이죠.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욕심이 들어요. 예전보다 작품 수는 줄었지만 그래서 일 하나하나가 더 귀하고, 일할 때 더 즐겁거든요.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참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그런 일을 이렇게 오래 계속할 수 있으니 행운이죠.” 그녀는 삶이라는 큰 그림은 매일의 작은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