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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 스웨터와 팬츠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코트와 구두 모두 구찌(Gucci).

이정재를 인터뷰하고 돌아오니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전 드라마 <느낌> 보면서 대학교 가면 선배들이 다 이정재처럼 생긴 줄 알았어요.” 나도 그랬다. 엄마 몰래 비디오로 <젊은 남자>를 보고 반해서는 아예 비디오테이프를 사기도 했었다. 오락실에서 사랑을 나누던 <정사> 속 짧은 머리 이정재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작품 속에서 늘 청춘이 표상일 것 같던 그는 이후 도전을 거듭했다. <선물>에서는 시한부 삶을 사는 아내를 위해 울며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었고, <오! 브라더스>에서는 난데없이 눈물 나게 웃겼다. 그리고 작정하고 멋졌던 <신세계>나 세상을 집어삼킬 호랑이처럼 보이던 <관상>까지.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시간 우리는 이 남자의 영화와 함께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오늘의 이정재가 되었다. <암살>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은 유일하게 시대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무서울 게 없던 스무 살을 지나 동료를 배신하고, 그 사실 때문에 불안해하며 간신히 세월을 버텨온 그는 비쩍 마르고 배만 나온 노인이 되어 자신의 상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웠는지에 대해 항변한다. 이제 이정재는 어떤 시간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도 자신의 시대로 만들어버리는 배우가 되었다.

<암살>이 천만 영화가 되었다. 의미 있는 영화가 흥행이 잘되어 좋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나? 사실 독립군의 활약을 다룬 영화가 별로 없다.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대가 됐다. 배우로서는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좀 더 준비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 노인 분장을 위해 10kg 넘게 살을 빼고, 아편 방에 있는 장면을 위해서는 일부러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촬영했다. 육체적으로도 꽤 힘든 작업이었겠다. 내가 연기한 염석진은 독립운동가였다가 변절하는 사람이다.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사실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잊지 말아야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 좀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살도 빼고 심리적인 부분을 묘사하기 위해 과거에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했다. 나는 염석진이라는 인물의 불안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괴롭혔다.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면 지금껏 해보지 못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신을 괴롭힌 건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염석진의 10대는 어땠을까, 부모가 없다면 왜 없을까, 어린 나이에 부모가 없는 심정은 어떤 걸까? 독립운동가가 되어 춥고 배고픈 시절을 겪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을 땐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까?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느끼는 불안감은 어땠을까?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며 불안감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된 염석진을 보며 관객들이 ‘과연 나라면 독립군으로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염석진처럼 되었을까’ 자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역전의 날>을 촬영하고 있다. 중국 영화다. 100% 한국에서 촬영하는 중국 영화다. 영화에서 나는 한국 형사고, 중국 여배우가 연기하는 심리학자와 함께 한 범인을 쫓는 액션영화다.

<빅매치>만큼 액션이 강한 영화인가? <빅매치> 촬영 때는 어깨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까지 겪었다. 그런 사고는 배우가 겪을 수 있는 수많은 경우 중 하나이니 뭐,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액션의 강도가 대단한 영화였다. <역전의 날>은 그 정도의 액션은 아니지만 속도감은 <빅매치> 못지않을 것이다.

대사의 절반 정도가 중국어라고 들었다. 새로운 도전이었겠다. 좀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배우에게 안정적인 환경이란 없는 것 같다. 결국은 항상 도전해야 한다. 왠지 안정적이란 말은 배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다. 연기자는 항상 불안하다. 내가 인물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건지,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내가 잘 이해한 건지 확신도 없다. 그리고 배우는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야 비로소 연기를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와도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을 때가 있다. 항상 좋은 작품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거절할 때는 내가 이걸 안 하면 얼마나 쉬어야 할까 싶어 걱정되기도 한다. 최고의 시나리오를 골랐다 해도 과연 얼마만큼 내가 잘해낼 수 있을지 또 불안하다. 배우의 삶은 결국 그렇게 불안의 연속인 것 같다.

20대를 지나는 배우들은 연기를 공부하듯이 하는 것 같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와 지금, 작품을 준비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은가? 나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20대와 30대에는 정말 많이 놀았다. 작품에 들어가면 준비를 많이 하기보다는 본능적인 부분에 많이 기댔다. 오히려 지금 치열하게 공부하고 준비한다. 자료를 참고하거나 캐릭터와 관련된 인터뷰를 읽거나 연습을 하면서 캐릭터에 매달린다. 아마도 연기를 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생겨 연기에 접근하는 내 태도 자체가 달라진 것 같다. 그리고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한다. 또 새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니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 공부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연기는 아직도 어렵나? 물론이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더 진짜처럼 하고 싶고, 보이는 것도 더 많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경험도 쌓이고 살면서 느끼는 것도 많으니, 연기를 할 때도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것만큼 욕심도 커지고 준비하고 싶은 것도 많다.

연기하면서 가장 두려운 건 뭔가? 내가 보여주는 것들이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가 보여주는 것들이 식상하지 않도록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유행하는 것, 그리고 대중의 생각을 알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평소에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배우는 결국 사람을 연구하는 직업이다. ‘왜 저 사람은 이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까?’ 왜 저런 말을 할까?’ 하는 걸 계속 생각한다. 연구 아닌 연구인 셈이다. 아쉬운 건, 그러다 보면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다. 배우의 삶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작품을 하며 수많은 삶을 살아왔다. 당신이 연기한 수많은 인물 중 그리운 사람이 있나? 많다. <태양은 없다> <정사> <시월애>…, 그중에서도 내 첫 영화인 <젊은 남자>는 특히 그립다. <젊은 남자>의 ‘이한’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인물 아닌가. 그러고 보면 20대의 나는 내 연기에 대한 확신에 차 있었던 것 같다. 본능적으로 빨리 반응했다. 고민해서 하는 연기라기보다는 ‘이렇게 해야 해’ 혹은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 내 본능에 따라 연기했다. 지금은 인물을 해석할 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뭔가 더 정리되고 매끄럽고 안정적인 맛은 있는데, 에너지가 더 많이 들어간 것 같지는 않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더 파괴적이라고 해야 할까? 젊을 때는 연기가 좀 더 번뜩였던 것 같다.

배우를 선택한 건 잘한 일인 것 같나? 그건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부자로 사는 것과 가난한 사람으로 사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으냐고 물으면 당연히 부자를 택했다. 하지만 요즘은 풍족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한때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일을 열심히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다는 게 꼭 불행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마음가짐에 달렸을 뿐.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도 평화롭게 산다면 그 또한 괜찮은 인생이겠지.

지금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 일이 재미있어졌다. 예전보다 훨씬 더. 오히려 젊을 때는 연기의 재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연기의 재미를 엄청나게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연기가 재미있어졌다.

연기는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가, 기쁨을 더 많이 주는가? 기쁨이 더 많다. 고통이라기보다는 어려움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다만 어려움 때문에 고통스럽지는 않다. 물론 연기를 하다 보면 고통을 느껴야만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캐릭터도 있다. 염석진이라는 인물이 고통까지 경험해야 했던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고통에 둔감한 편이라 덜 괴로운 걸 수도 있겠다.

당신 인생의 전성기는 이미 왔는가? 아니면 앞으로의 전성기를 기대하는가? 슬럼프에 빠져 있건, 한창 일을 많이 할 때건 나에겐 항상 지금 이 순간이 전성기다.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성기 아닐까? 지금껏 배우로 살아오며 인기가 아주 많았을 때도 있었고, 주춤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성기다.

수트와 셔츠 모두 톰포드(Tom F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