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세 장의 손편지가 도착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보낸 질문에 대한 회신이다. 단정한 필체, 한 박자 쉬며 찍었을 방점, 몇 번의 말줄임표와 웃음 표시 사이에서 인적 드문 마을의 무탈하고, 태평한 공기가 전해졌다. 그는 종종 ‘직업 배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어딘가 ‘직업 군인’처럼 들리는 이 생소한 단어에서 그가 배우로서 연기라는 책무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김강우는 어느 날 재능이 툭 불거져 나온 신동도, 대의명분을 품은 투사형 배우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인’이 그러하듯 출퇴근 시간을 지키고, 오늘 반드시 해야 하는 업무 전화를 걸 듯 그는 연기를 한다. 김강우만의 ‘직업의식’은 ‘연차’가 올라갈수록 동년배 배우들과 차이를 만들었다. 요령만 늘어버린 능청스러운 기교나,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기계적인 표정, 대충 눙치거나 얼버무리는 애드리브 없이 정도를 따른다. 어떻게 배역에 몰입하고 준비하느냐는 질문에 “노하우는 없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등바등한다”는 그의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15년 차 배우가 여전히 ‘아등바등’ 중이라니.
김강우에게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다. 일부러 낙천적으로 보이려 애쓰거나 소탈한 척하지 않고 지나치게 예민하지도 무디지도 않다. 다섯 살 아역 배우에게까지 ‘비범’의 잣대를 들이대는 배우의 세계에서 김강우는 담담하게 걷는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무리한 배역을 감당하거나, 기대와 우려에 잠식돼 섣불리 공백을 갖지 않았다. 차분히 필모그래피를 채웠고, 안정된 가정을 꾸렸다. 올해 상반기는 배우 김강우의 연기가 가장 많이 회자된 해다. 그는 영화 <간신>을 통해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지독한 캐릭터인 연산군으로 분했다. 영화 <카트>의 비정규 노동자를 지지하는 정규직 사원, <찌라시: 위험한 소문>의 억울하게 죽은 여배우를 대신해 진실을 찾는 매니저, <사이코메트리>의 형사를 시작으로 드라마 <실종느와르 M>의 FBI 출신 특수실종전담팀 팀장 등 전작들의 인물과 비교하면 낯선 선택임이 분명했다. 그는 연산군의 광기에 집중하기보다 어미를 잃은 아이의 애처로움, 태생적 결핍이 만든 선천적인 불안,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자의 그림자에 초점을 맞췄다.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해석과 표현은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으며 ‘국민 형부’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
지난 2~3년간의 행보에 대한 질문에 ‘만족도 후회도 없다’고 짧게 답한 김강우. 서핑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그는 어쩌면 두 아들과 함께 곧 파도에 몸을 실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회신을 읽고 난 뒤 김강우의 단단한 균형은 명확한 삶의 우선순위 덕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말대로 배우가 직업이고, 좋은 인간으로 살아내는 것이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술이라면 그는 지금 그 정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난 3년간 매년 2~3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문득 자리에 선 기분일 것 같다. 근 몇 년간 열심히 작품을 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속도를 느끼는 감각에도 내성이 생기지 않나. 당시에는 미처 몰랐는데 돌아보니 육체보다 정신이 더 지쳐 있지 않았나 싶다.
2012년에 <두 남자의 거침없는 태국 여행>이라는 여행책을 냈을 정도로 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치앙마이의 첫인상은 어떤가? 지쳐 있다 보니 태국 생각이 더 간절하지 않았나 싶다. 예전부터 태국을 좋아했다. 처음 태국을 여행한 이후부터 매년 두세 번은 오게 되더라. 혼자 즐기기만 하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서툴게 책도 썼다. 태국은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바다와 가깝고, 음식과 숙소 등 휴식을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주로 바다를 접한 태국 도시들을 찾았었기에 치앙마이에 대한 환상도 컸다.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1년 내내 이어질 것 같은 곳이다. 무엇보다 공기가 좋다. 잠을 조금 잤는데도 피곤한 느낌이 없다.
‘여행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김강우로 돌아가는 중간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배우의 삶에서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 ‘직업 배우’는 한 작품을 끝내고 다시 가정의 일원으로 돌아가면 살짝 어색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웃음) 집도 많이 비우고 몇 달 동안 크고 작은 가족 행사들을 건너뛰다 보니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랄까. 일종의 직업병이다. 집으로 다시 안착하기 전 여행을 하면 내면이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나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복귀하기 위한 혼자만의 과정 같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일상으로 ‘투입’되기 전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여행이라고 해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책 읽고, 하늘 보고, 음악 듣는다. 무엇보다 그렇게 쉬고 돌아와야 혈기 왕성한 두 사내 녀석들과 놀아줄 수가 있다.
가족과 배우, 이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삶이 움직이는 것 같다. 작품을 끝내고 그간 못 만났던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운동도 한다. 뭐··· 동네 한량이다.(웃음)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일까. ‘연예인처럼’ 사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것 같다. 연예인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직업 배우’일 뿐이다. 가정에서는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이고 싶다. 내 직업 때문에 아이들이나 아내의 일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일할 때 이외에는 배우라는 사실도 종종 잊고 산다. 노력한 건 아닌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되더라. 지금의 생활 리듬이 편안하다.
영화 <간신>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표현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역할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공부하는 성실한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슛이 들어가기 전까지 인물을 어떻게 준비하나? 지금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준비 과정은 매번 다르다. 어떨 때는 스스로를 단단히 조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에서는 마음껏 풀어놓기도 한다. 노하우는 없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등바등한다. 지금은 다음 역할을 받아들이기 위해 멍하게 스스로를 비우고 있다.
곧 마흔이다. 멋진 중년이란 어떤 모습의 남자일 것 같나? 스스로 멋있어지려고 노력한다고 ‘멋’이 생기는 건 아닐 거다. 나잇값 하는 마흔의 남자이고 싶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인가? 두 아들과 떠나는 한 달간의 배낭여행. 목적지는 중요치 않다. 5년만 있으면 가능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