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된 길
<최고의 감독> 전여빈
SNS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온통 아름답다. 좌절보다는 기쁨, 실패보다는 성공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문소리가 연출하고 주인공을 맡은 <최고의 감독>에서 그녀의 딸을 연기한 전여빈은 독립영화의 의미는 진짜 세상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큰 영화 중에도 재미있고 좋은 영화가 많아요.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어떨 때는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돌려 말해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독립영화는 불쌍하면 불쌍한 대로, 멋이 없으면 없는 대로 세상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보여주는 힘을 지녔어요. 날것 그대로에 대해 말해주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어요. 마치 ‘네 인생만 힘든 게 아냐’라고 말해주는 것 같죠.” 독립영화 판에는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비록 누군가 봐주지 않을지라도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돈이나 학식이 많은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멋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현장에 가면 막 엔도르핀이 솟구쳐요.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 길이 옳다고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이죠.”
그녀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길 앞에 서 있었다. 의대에 가려다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고 방황하다 문득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방송연예를 전공했고, 그러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좀 더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의 스태프로 일하며 그 보이지 않는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 그러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한참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못한 채 보내야 했던 적도 있다. “힘들었어요. 배우가 되기 위해 시간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달려나가야 하는 시점에 누군가 발을 건 느낌이었어요. 많이 울기도 했고요. 그래도 끈을 놓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 ‘어떻게 해야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했어요. 난 분명 연기가 하고 싶은 사람인데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엎어지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대답을 얻었죠. 설령 내가 좋은 배우가 되지 못하더라도 일단 시작이라도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녀의 말마따나 배우의 길은 이제야 막 시작되었다. 지금은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영화에 출연하고 있고 얼마 전에는 작은 역할이지만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도 출연했다. “함께 독립영화를 만들던 친구들과 수년이 지난 뒤에도 꿈을 잃지 않은 채 현장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올해는 ‘전여빈’이라는 배우가 있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요.”
나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
<마카담 스토리> 너무 귀여운 영화예요.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어느 한물간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녀가 옆집에 사는 어린 소년과 함께 오디션 테이프를 만들기 위해 연기를 하는데 그때 그 아이가 말하거든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똑바로 연기하라’고. 그 얘기를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잘 해내야 하는 거였어요.
문을 두드리며
<인허플레이스> 안지혜
임신한 10대 소녀, 임신한 딸이 낳을 아이를 버리고 싶은 여자,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은 불임의 여자. 영화 <인 허 플레이스>는 이 세 여자의 이야기다. 아이를 두고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그녀들은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올해로 서른이 된 안지혜는 영화에서 임신한 소녀를 연기했다. “<인 허 플레이스>는 제 필모그래피를 채운 유일한 작품이에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연기했어요.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즐거웠던 이유 중 하나는 감독님의 작업 방식 때문이기도 해요. 제가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임에도 장면마다 제 생각을 물어봐 주셨죠.” 그렇게 스물여덟 나이에 열여덟 살 소녀를 연기한 안지혜는 아주 천천히 배우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원래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어요.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면 스무 살에 처음 연기를 하게 되었죠. 복수 전공으로 연기를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또래보다 졸업이 늦어졌어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오디션을 본 작품이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예요.” 얼마 전에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가졌다. 만만치 않은 내용을 풀어내는 영화이니만큼 <인 허 플레이스>는 본 사람 모두가 좋아할 만한 작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누군가는 최근 몇 년 새 본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해주었고, 또 누군가는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고 했다. “독립영화를 다양성 영화라고도 부르잖아요. 자본의 영향력이 개입되지 않은 만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감독이 마음껏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특별한 지점을 분출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하다는 것은 좋은 거잖아요. 큰 영화들 사이에서 이런 다양성 영화들이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데뷔작을 찍고 개봉하기까지 2년이 흐르는 동안 ‘별일 없이’ 지냈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인생에서 20대는 배우의 길을 가는 시간이었다기보다는 언저리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가슴앓이로 점철되어 있던 때이기도 하다. “지금 제가 배우라고 말하기에는 경력도 적고 많이 부족하죠. 아직까진 배우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기분이에요. 이 길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 길을 가기 위해 계속 애를 쓸 것 같긴 해요. 혹은 그 언저리를 계속 맴돌겠죠. 그런데 계속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확신은 있어요.”
나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
<걸어도 걸어도> 전 굉장한 포부를 가지고 희망차게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꼭 어떤 포부나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 영화를 보면 미래에 대한 대단한 기대가 없어도 계속 걷고 걸으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걷고 또 걷다 보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지 않을까요.
단단한 마음
<스틸 플라워> 정하담
#마리끌레르 #marieclaire #korea #2월호
A photo posted by 정하담 (@hadam2) on
A video posted by 정하담 (@hadam2) on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를 덜컹거리며 길을 걸어가는 소녀가 있다. 소녀를 대하는 세상은 차갑다. 혼자 일어서기 위해 궂은일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게에서 쫓겨나기 십상이고 그러고 나면 쉴 곳, 잘 곳 없이 다시 추운 새벽녘 길을 걸어간다. 영화 <스틸 플라워>는 어느 꽃 같은 소녀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꺾이는 꽃이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탭댄스를 춘다. 그렇게 다시 꿋꿋하게 살아간다. 이 소녀를 연기한 정하담은 <스틸 플라워>로 서울독립영화제 2015에서 독립스타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 들어갔어요. 연기가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였죠. 연극반에서 5분 남짓 길이의 공연을 만들어 올렸는데 사람들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때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아, 내가 연기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배우를 직업으로 삼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연기는 할수록 욕심이 많이 생겨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전 원래 게으르고 잠도 많고 느릿한 편이었어요. 무언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어영부영 살아온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많은 게 달라졌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요.”
정하담에게 <스틸 플라워>는 특별한 작품이다. 이 영화로 독립영화제의 배우상을 수상했다거나 마르케시 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의 힘이 아닌 오롯이 시나리오의 힘과 감독의 진정성, 그리고 배우의 연기만으로 영화를 완성해야 하기에 ‘하담’에게 온 힘을 다해 집중하며 연기했다. 그녀에게 영화 속 하담은 정말 멋진 인물이다. “제가 힘들 때 기운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에요.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자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있죠. 신념이 강한 인물이기도 해요. 배운 건 없지만 세상을 향해 굳건하게 서 있는 아이예요. 저보다 큰 인물이어서 연기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박석영 감독의 <들꽃>과 <스틸 플라워>는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시작점이 되어준 작품이다. “독립영화의 힘은 집중에 있는 것 같아요. 감독님도 배우의 생각을 많이 물어보고 존중해주시기 때문에 연기하는 캐릭터에 더 집중하게 돼요. 박석영 감독님의 <들꽃>과 <스틸 플라워>를 만나기 전까지 전 그냥 ‘배우 지망생’이었다면 이제야 비로소 배우가 된 것 같아요.”
나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
<스틸 플라워> 영화 속 ‘하담’이는 강인하고 멋있는 아이예요. 3월에 개봉하면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자기한테 일어난 나쁜 일이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요. 사람들이 자신을 좀 더 숭고하고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평생의 연기
<그들이 죽었다> 이화
<그들이 죽었다>는 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겠다는 무모한 꿈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려고 도전하는 두 젊은 감독이 주인공이다. 결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에 대한 영화다. 그렇다고 아름답거나 패기가 넘치거나 열정적이기만 한 청춘은 아니다. 그들은 지질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좌절한다. 이화는 <그들이 죽었다>에서 이 두 감독과 자꾸만 우연히 마주치는 동명의 여자를 연기했다. “처음엔 그냥 우리끼리 재밌게 해보자고 만든 영화였어요. 작은 영화라서 개봉하고 얼마 가지 않아 극장에서 내릴 줄 알았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2월까지 상영할 수 있게 됐어요. 얼마 전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지금은 직장맘으로 살고 있지만 자신도 한때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는 40대 중반의 여자 관객이 당신들의 영화를 보고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보잘것없는 우리 영화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였다는 게 너무 감사했죠.” 아웃사이더로 지내던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오른 연극 무대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는 이화는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길이 배우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연극 <이기동 체육관> <하녀들> <백중사 이야기> 등의 무대에 올랐다. “<그들이 죽었다>를 찍기 직전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때 단막 드라마 한 편을 찍었는데 그동안 연극 무대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드라마 촬영에 적응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다 이재호 감독님이 <그들이 죽었다>를 함께 만들어보자고 해서 출연한 거예요. 그런데 정말 하길 잘한 것 같아요. 힘든 고비를 한번 넘으니까 연기가 더 재미있어졌어요.”
요즘은 한창 액션에 꽂혀 있다. 그래서 킥복싱을 배우고 있고 액션 연극도 한 편 만들어보려고 한다. 그녀는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한다. 하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 아무도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렇게 자신만의 작품을 준비하는 중이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힘이 되고 도움을 주고받다 보면 좋은 작품을 하고 연기하며 살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예전에는 누군가 너에게 연기가 얼마나 소중하냐고 물으면 한번 생각하고 대답했어요. 지금은 주저 없이 답할 수 있어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고요.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배우로서 크게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하지만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지 않는 배우가 되겠단 욕심은 있어요. 꾸준히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평생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나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랐어요. 요즘 많이 보는 영화예요. 두 여자가 너무 멋지지 않아요? 저에게는 <그들이 죽었다>가 힘이 되는 영화예요.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이 없거나 주춤거릴 때 이 영화를 보면 힘이 날 것 같아요. 작년 12월 31일, 20대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날이었어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죽었다>를 보러 갔는데 다시 힘을 얻었죠. 저에게는 용기와 자극을 주는 영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