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 전날보다 훨씬 더워진 어느 날 공유를 만났다. 여름이니까, 한창 잎이 무성한 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싶었고, 그렇게 볕이 한창인 오후에 공유가 어느 집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작업해 온 사진가와 친근하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을 위한 모든 준비를 후딱 마쳤다. ‘별일 없는 동네 형’이 화보의 주제라면 주제였다. 일도 걱정도 없는 동네 형으로 변신하기 위해 담배를 한 대 태웠고 무념무상 멍때리기도 하고 해맑게 웃기도 했다. 한 컷 한 컷 금세 완성됐고 틈틈이 어제 본 <곡성>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편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연기를 시작한 지 15년이 다 되어가는 공유에게 화보 촬영은 이제 익숙할 대로 익숙할 테고 스태프들은 이 남자의 취향을 잘 알 테니 뭐 하나 막히는 것 없이 평화롭게 끝났다.
하지만 작품 속의 공유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에서 멀어진지는 오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온몸을 던지는 액션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눈에 슬픔을 꾹꾹 눌러담은 멜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부산행>에서 좀비들에게서 어린 딸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9월에 개봉하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독립군을 연기한다. 그리고 조만간 도깨비가 된다.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속도와 밀도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인터뷰 내내 만족보다는 아쉬움과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썼다. 그가 남기고 싶은 ‘배우’라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고민과 반성, 평가와 노력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중이다.
<부산행>은 좀비가 출몰하는 영화다. 한국에서 좀비는 익숙한 소재가 아니다. 단편영화에 좀비가 등장한 적이 있는데 블록버스터 장편영화에 좀비가 나오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상호 감독의 자신감도 믿고 싶었다. 자신감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자신감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기분 좋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감독님은 후자다. 감독님의 전작들이 사회 고발적인 메시지가 짙은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부산행>도 기획 영화지만 좀 다른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석우’는 어떤 인물인가? 큰 사건을 겪으며 캐릭터의 변화도 진폭이 클 것 같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석우’는 전형적인 클리셰가 담긴 인물이었다. 좀비에게서 어린 딸을 지켜야 하는 아빠다. 사실 <부산행>을 선택할 때 석우라는 캐릭터보다는 이 기획에 더 끌렸다. 내가 연기하는 석우에 클리셰 이상의 뭔가를 담고 싶었다. 시나리오에 적힌 그대로가 아니라 지금껏 이런 장르의 영화에 등장한 적 없는 인물로 만드는 게 내 몫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배우로서 아쉬움이 남지 않는 작품은 없겠지만, <부산행>은 그런 면에서 아쉽고 부끄럽기도 하다. 아주 미세한 한 끗 차이로 좀 다른 색깔을 입힌 인물로 연기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배우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매우 즉각적이다. 연기를 한 지 15년이 다 되어가니 그런 평가에서 좀 자유로워진 것 같은가? 아니,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가 들수록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더 휘둘리는 것 같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이 곤두서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좀 더 시간이 지나니 그런 평가에 무덤덤해지더라.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소신껏 내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태도가 확고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더라. 예상치 못한 작은 부분에 휘둘리기도 하고 방심했다가 또 흔들리기도 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 같다.
지금껏 배우로 살아오며 슬럼프가 있었나? <남과 여>와 <부산행><밀정>까지 작품을 이어오며 슬럼프까지는 아니어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쉬지 않고 연기했는데 지금껏 작품을 해온 속도와 비교하면 엄청 빠른 거다. 작품 수를 늘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바라던 대로 이루어진 건데 좀 힘에 부친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고 그러면서 자신감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랬다. 무작정 설레고 기대되기보다는 조심스럽고 내가 찍은 영화를 자신 있게 보지 못한다. 칸에서 <부산행>이 처음 공개될 때도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엄청 쿵쿵거렸고 연기하면서 잘 풀리지 않고 자학했던 장면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런 마음이 <밀정>까지 이어졌고, 그래서 조금 부끄럽다. 어쩌면 이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그냥 그게 사실이니까.
자신에 대해 박하리만큼 객관적이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도 있다. 나는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일에 대해서는 강박증이 생기는 것 같다. 내 연기를 평가해야 한다는 게 괴롭고 싫지만 끊임없이 괴롭혀야 계속 배우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나이 들수록 연기가 어렵기도 하고.
배우로 사는 건 어떤가? 20대와 30대가 많이 다른가? 20대에는 빨리 30대가 되고 싶었다. 나이가 든다고 모든 고민이 해결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나이가 들면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지 못한 느낌이 카메라에 담길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설레기도 했다. 안정적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가다 보면 내 연기도 좀 더 견고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했나보다.(웃음) 연기란 끝이 없는 싸움 같다.
의외다. 난 공유의 필모그래피가 깊고 넓어진다고 느낀다. 장르가 다양해지고 감정의 진폭은 점점 넓어지는 캐릭터들을 연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행보 아닌가. 필모그래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작품을 선택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게 전부인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공유라는 배우가 필모그래피를 잘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순 있겠지만 막상 나 자신은 온전히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나중의 문제고, 그런 평가가 좋다 한들 지금의 내 생각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결과에 따라 내 만족도가 달라질 수는 없다. 못마땅한 게 많고 아쉬움이 남고, 작품에 대한 내 객관적인 기준에 못 미친다. 설령 영화가 엄청나게 흥행한다 해도 ‘내가 연기를 못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부산행>과 <밀정> 모두 나로서는 그런 고민이 유난히 많았던 시기의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배우에게 의미 없는 작품은 없겠지만, 특히 <부산행>은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은가? 좀비를 소재로 한 기획 영화라는 점에서 욕심이 있었고, 그 영화에서 선방하고 싶었고 ‘선빵’ 하고 싶기도 했다. 난 스스로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욕심내는 부분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꺼리고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거다. 영화가 개봉하고 결과가 좋다면 좋은 평가가 따르겠지. 좋은 시도였다, 용감한 시도였다, 뭐 이런. 나 역시 시간이 지나 돌이켜 봤을 때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할 것 같다.
영화에서는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적이 있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연기니까, 연기에 대한 가치관이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지. 배우로, 연예인으로 살며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그림에 가깝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이 있고 내가 그리는 모습이 있는데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항상 애써온 것 같다. 음, 맞춘다는 표현은 오만한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나 역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다. 언젠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공유라는 배우를 추억해줄 때 내가 완성한 그림을 봐준다면 좋겠다.
지금 그리는 그림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가끔 예전에 한 인터뷰를 들여다보면 어릴 때 훨씬 더 호기롭게 얘기했다. 과거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참 어렸구나 싶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어떤 대답은 아주 감성적이기도 하다.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씩 바뀌는데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내 생각의 큰 줄기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부와 인기만을 좇아 달리고 싶지는 않다. 물론 배우라는 일을 하며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많이 누리며 그런 것들에 너무너무 감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소비되기보다는 순수하게 배우로 서의 삶을 채우며 살고 싶다.
그래서일까? 작품이 아니면 공유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없다. 이를테면 예능 프로그램이나 행사 같은 데 말이다. 사실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어릴 때는 혈기 때문에 취향이나 생각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말이라는 게 왜곡되기 쉽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오해할 수도 있다. 무엇을 위해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일은 하고 싶지 않고 재미도 없다. 하지만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출연하게 될 수도있다. 내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타협이 필요하다. 내 고집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 선을 그을 일은 아닌 것 같다. 되도록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맞는 길을 가고 싶지만 그 길에서 타협해야 할 부분이 있을 테고 설득당하기도 하면서 걸어가야 할 것 같다. 이제는 내가 그린 그림의 모습이 아니어도 변화의 여지를 좀 더 열어두려고 한다.
곧 드라마 <도깨비> 촬영에 들어간다.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작품이다. 2016년에 도깨비라니. 나 역시 감이 잡히지 않는다.(웃음) 아직 대본이 나오지 않아 상상이 되지 않고 작가님이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모르겠다.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고민이 많았고 피곤할 만큼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사실 나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남과 여> <부산행> <밀정>까지 전혀 다른 장르와 캐릭터를 줄줄이 이어가면서 주눅 들고 자괴감을 느끼며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안주하며 연기하고 치열하게 살지 못한 데 대해 반성했다. 좀 더 몸을 던지고 뻔뻔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음껏 내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마구 뛰어놀 게 할 계기가 필요했다.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촬영 현장이 훨씬 타이트하게 돌아가고 순간적인 몰입도가 높다. 그런 호흡도 지금의 나에게 필요하다. 비록 내가 두려워하는 SF 판타지 장르지만 나를 아끼고 신뢰하는 작가님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한번 잘 놀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생긴 벽들을 허물 수 있지 않을까?
배우라는 직업은 고통의 순간이 더 많은가, 행복의 순간이 더 많은가? 고통스러운 것 같다.
배우가 된 걸 후회한 적도 있나? 후회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기에는 배우로 살며 얻은 게 너무 많다. 어릴 때는 그런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내 가치관과 목표대로 사는 거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배우는 외로운 직업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점점 그 외로움에 무뎌지고 외로움을 견디는 내공이 단단해지기도 하는데, 그 외로움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작품과 작품 사이 쉬는 시간 없이 연기하고 있으니 에너지가 많이 소진됐겠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껏 작품과 작품 사이 어느 정도 적당히 쉬어가는 호흡이 있었다. ‘열일 하는’ 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내 그릇은 적당한 호흡을 가지고 작품과 작품 사이에 조금씩 쉬며 채워가는 만큼의 크기인 것 같다. 다만 이번에는 체력적으로 부담 되더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작품이 계속 들어왔고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소진된 나를 채우기 위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곤 한다. 특별히 뭔가를 해야만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건 아니다.
오늘 촬영하면서 잠깐 얘기했던 ‘멍때리기’처럼? 사는 게 너무 바쁜 세상이다. 아무 생각 없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기도 조심스럽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으니.
조심스러운 것이 너무 많다.(웃음) 나이 들수록 매사 조심스럽다. 점점 여론이 너무 무섭고 순식간에 왜곡되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점점 말을 아끼게 된다. 난 SNS를 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 올려서 사람들에게 봐달라고 하기가 쑥스럽다. 그리고 한번 시작하면 팔로어 수 같은 부분에 신경 쓰게 될 것 같다. SNS에 괜히 내 생각을 올렸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눈에 의해 왜곡되고, 각자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도 두렵다. SNS에 내 얘기를 적기보다는 나를 알고, 나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내가 하는 얘기를 왜곡해 듣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들과 술이라도 한잔 하며 이야기하고 싶다.
온전히 공유로 살아가는 시간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집에서 영화도 보고 고양이 밥도 주고, 그런 일상이 온전한 내 시간이다. 게으르고 무료해 보이더라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인 것 같다. 누군가는 뭔가를 끊임없이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운동하는 것도 좋아한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게 일상생활이다. 원래 운동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일을 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운동은 노력한 만큼 요행 없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 같다. 난 잔머리 굴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공법이 좋다. 운동은 노력한 만큼 이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인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소속사 식구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농구도 하고 있다. 나이 들수록 어디 가서 술 마시는 것보다 그런 게 좋다. 또래 아저씨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한국 선수들이 뛰는 메이저리그 경기와 요즘 한창 결승전 시즌인 NBA도 챙겨 보고 있다.(웃음)
올 한 해는 공유에게 열심히 일한 한 해가 되겠다. 작년하고 올해는 일만 한 것 같다. 내 연기에 대한 실망스러운 부분은 일단 차치하고 열심히 일한 나에게 박수 쳐주고 싶다. 욕심부린 것들을 해냈고, 운도 따라서 작품도 차곡차곡 해나갈 수 있었다. 하고 싶었던 작품을 연달아 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