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답답하실 거예요. 죄송해서 어쩌죠?” 사진가와의 첫 대면에서 이런 인사를 건네는 배우는 처음이었다. 목소리는 옅게 떨렸고,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가도 잠시 컷을 쉬어가면 첫 컷처럼 몸이 경직됐다. 그러다 불현듯 몰입해 카메라를 깊이 응시했다. 안판석 감독 드라마에서 봤던 그 눈빛이다.
2012년 JTBC <아내의 자격>으로 드라마에 데뷔한 서정연. 그녀를 인식하게 된 건 <밀회>부터였다. 서필원 회장(김용건)과의 내연 관계를 정리해달라며 돈 봉투를 건네는 오혜원(김희애)을 향해 “‘인민이 다 평등하다’, ‘내가 내 주인이다’ 그렇게 배운 사람이요. 안 할 말로 내 맘에 들믄 내 돈 주고도 함다”라며 혜원에게 시원하게 맥주 세례를 퍼부었던 조선족 여성이었다. 이후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상위 1%의 권력을 가진 최연희(유호정)를 교묘하게 지배하고 통제하는 수행 비서 이선숙 역을 맡았다. 최근 <태양의 후예>에서 응급실 간호팀장 하자애를 연기하며 ‘범대중적’ 관심까지 받은 그녀. 능수능란하게 어느 작품이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내공의 바탕에는 16년간 버텨온 연극 무대가 있다. 연기가 취미이자 특기인 20년 차 ‘프로 배우’가 인터뷰를 앞두고 ‘하···. 저 오늘 인터뷰 잘할 수 있을까요?’ 하며 한숨을 폭 쉰다. 종영에 가까워질수록 함께 작업한 동료들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오늘 긴장하는 모습을 보니 드라마 현장에서의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서정연이라는 이름으로 나서서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아요. 자신감이 없고 쑥스러워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캐릭터를 입으면 ‘나는 이런 인물이니까’ 하면서 뻔뻔함이 생기거든요. 자신을 보여주는 가장 편한 방법이 제겐 연기 같아요.
1996년에 연극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으니 16년 만에 <아내의 자격>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죠. 늦게 드라마를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너무 떨려서 오디션을 못 보러 다녔어요. 그러다 친구가 안판석 감독님 작품에서 ‘강남 엄마’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그 친구가 싸이월드에 있는 제 사진 퍼다가 프로필을 대신 써줘서 오디션에 참가했어요. 신경안정제 먹고 오디션장에 갔을 만큼 심하게 긴장하는 편이거든요. 되돌아보면 저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하는 연극배우들이 있지만 모두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잖아요. 안판석 감독님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드라마 연기는 못 했을 거예요.
그간 오경택 연출가가 연출한 안톤 체호프의 <곰> 등 묵직한 작품들로 연극 무대에 올랐죠.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작품도 있을 것 같아요. 연기에 있어서 ‘아, 됐다’ 싶거나 ‘이거다’ 하고 단언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연기를 계속 하는 이유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서 그만두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배우들끼리 ‘뒤끝 연기’라는 말을 해요. 촬영 끝나고 다시 찍을 것도 아닌데 집에 가면서 계속 그날 연기한 대사를 곱씹는 거예요. 씻고 누워서까지 했던 걸 또 해보고요. 그런 아쉬움이 남아서 계속 연기를 해요. 그런데 2004년에 공연한 <한씨연대기>는 달랐던 것 같아요. 극단 연우무대의 대표 작품이기도 했고, 당시 연극열전이라는 타이틀 아래 소극장에서는 <한씨연대기>를, 대극장에서는 조재현 선배님이 <에쿠스>를 올렸는데 그 자리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뿌듯했어요. 안성기, 송강호 이런 분들이 막 회식 자리에 오고요. 같이 사진 찍고 나서 저 울었잖아요.(웃음) <한씨연대기> 할 때만큼은 ‘내가 조금은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연극은 TV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배우의 비중이 큰 ‘배우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출만큼이나 배우 독자적인 매력과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고요. 연극 연기의 매력은 뭔가요? 드라마 촬영 전날 잠을 잘 못 자요. 발표하러 가는 느낌이거든요. 감독님이 ‘자, 어떻게 준비했는지 보여줘요’ 하는 것 같아서···. 혼자 대본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데 상상력을 쏟아내는 게 어려워요. 연극은 한 달 동안 연습하면서 많은 시도를 하거든요. 상대 배우와 호흡하며 찾아가는 부분도 있고, 회차가 지나면서 관객을 통해 달라지기도 하면서 모든 경험이 내 안에 채워져요. 드라마는 한순간에 다 쏟아내는 느낌이고요. 그래서 드라마 하는 배우들 사이에 ‘재충전한다’는 말이 있나봐요. 연극배우들은 그런 말 잘 안 하거든요. 작품 안 할 때 누가 뭐 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놀아’, ‘요즘 그냥 그래’ 하고 대답해요.(웃음) 연습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작품 분석 하는 게 좋아서 연극을 못 놓는 것 같아요.
올해 1월까지 연극 <터미널> 무대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죠? 연극을 계속 하고 싶어요. 연극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에요. 공연 날짜가 다가오면 무서웠죠. 안 갈 수도 도망갈 수도 없으니까 팔다리라도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공포였어요. 지금은 그런 부분이 없어졌지만, 너무 괴로워서 1년 동안 회사에 다닌 적도 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출퇴근을 하니까 스트레스는 없는데 재미도 없더라고요. 월급은 잘 나오는데 못 살겠더라고요. 나는 스트레스가 없어도 못 견디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파산하더라도 그때까지만 연극을 하자는 마음으로 돌아왔죠. 그때의 경험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됐어요.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으니까요. 이후부터는 다른 생각 안 했죠.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태양의 후예>로 세대 불문 대중에게 모습을 알리게 됐어요. 조연으로서는 유난히 멜로적인 상황이 많은 것 같아요. 제 나이에는 드라마상에서 누군가의 엄마 역을 맡을 확률이 많죠. 어떤 분들은 빨리 엄마로 자리 잡는 것도 좋을 수 있다고 조언해서 배역에 크게 욕심 안 냈어요.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도 제게 러브신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거든요. 지금도 매일 멜로 하고 싶다고 말해요. <태양의 후예> 이응복 감독님은 저더러 멜로가 맞대요. 멜로 눈빛이 있다고.(웃음)
7월에 방영할 SBS 주말극 <끝에서 두 번째 사랑>에서 멜로 연기 기대해도 될까요? 시놉시스에는 그런 내용이 조금 있었어요. 학습지 선생님이고 싱글이에요. 징글징글한 사랑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독하게 사랑하면 실제로 몸이 아프잖아요. 연기를 할 때 크게 자극이 오는 역할을 만나고 싶어요.
오늘 만난 느낌으로는 배역에 푹 빠져드는 성향일 것 같은데요. 예전에 연극이나 단편영화에서 비련의 인물 역할을 종종 했어요. 자꾸 그런 역할이 들어오니까 싫은 적도 있었거든요. 내가 청승맞게 생겼나 고민도 되고요. 그런데 몸속 깊이 파고드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아, 했다’ 하는 느낌. 그 기분을 느껴본 지가 오랜된 것 같아요. 지긋지긋하게 힘들고 아팠으면 좋겠어요. 저예산 영화든 연극이든 그런 작품 만나면, 다른 작품 안 하면서 그 배역에만 몰입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