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에 연기를 시작했고,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이미 서른 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로 필모그래피를 채운 남지현은 올해 두 편의 영화, <터널>과 <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의 개봉을 앞두고 있고, 곧 드라마 <쇼핑왕 루이> 촬영도 시작한다. 가을쯤 방영하게 될 <쇼핑왕 루이> 속 모습은 아직 명확한 그림이 완성되진 않았지만, 시골에서 상경한 ‘왈가닥 아가씨’쯤 된다. 지금껏 드라마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기보다는 주인공의 아역을 연기하며 밑그림의 일부가 되는 일에 더 익숙했다면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의 한가운데서 연기하게 된 셈이다. 큰 변화이자 도전일지도 모를 작품을 앞두고 그녀가 말했다.
“전 아직 어리잖아요. 살다 보면 앞으로 많은 일이 생길 거예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고, 힘겨운 순간을 맞닥뜨리기도 하겠죠. 그런 상황이 오는 게 무섭거나 두렵진 않아요. 언제든 새롭게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영화 <터널>과 <고산자>부터 드라마 <쇼핑왕 루이>까지, 하반기에 개봉하는 영화만 두 편이에요. 2016년의 남은 절반을 바쁘게 보내겠어요. 사극 영화를 촬영한 건 아주 오랜만이에요. <고산자>에서는 차승원 선배님이 연기한 김정호의 딸을 맡았죠. 더운 여름 날 시작해서 추워질 때 끝났는데 항상 즐겁고 해피한 에너지가 넘쳤어요. <터널>에서는 하정우 선배님과 연기했어요. 터널에 갇힌 생존자인데 둘 다 다른 생존자가 있는 줄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돼요. <터널> 촬영장은 되게 신기했어요. 터널처럼 만든 세트에서 촬영하다 보니 불을 모두 꺼놓고 배우가 있는 공간에만 불을 켜놨었죠. 주변이 온통 어두워서 스태프들이 모두 손전등을 들거나 헤드라이트를 하고 다녔어요. 독특한 경험이었죠.
차승원, 하정우 선배와 연기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어요? 두 분 모두 유머 감각이 그야말로 최고인 것 같아요. 차승원 선배님은 <삼시세끼> 속 모습과 똑같아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지한데 농담이 섞여 있죠. 하정우 선배님은 터널에 갇혀 혼자 살아남은 인물을 연기하다 저를 만나 무척 반가워 해주셨어요. 두 분 모두 저랑 나이는 물론이고 경력도 많이 차이나는데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편안하고 긴장이 풀렸어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열일’ 하는 중이었네요. 촬영장에 있지 않으면 늘 학교에 있었어요. 친구들이 제가 연기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TV에 나오거나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면 그제야 제가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줘요.(웃음) 친구들은 제가 화면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어 해요.
서강대학교에서 연기가 아닌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대학교에서는 연기와 완전히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규칙적이지 않잖아요. 언제 일하고 쉬게 될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연기하지 않는 동안 다른 공부를 해두면 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어릴 때 연기를 시작했다는 건 미처 제대로 적성을 찾기 전에 진로를 찾은 걸지도 몰라요. 고등학교에 다닐 때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잖아요. 연기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내가 이 일을 해도 되는가 하는 고민은 중·고등학생 때 많이 했어요. 그때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든 일이 있었다면 연기를 그만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연기보다 확실히 재미있고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못 찾았어요. 오히려 ‘배우를 오랫동안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요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수록 좀 더 많은 에너지를 내며 즐겁게 연기하느냐 하는 거예요. 물론 여전히 재미있고 즐겁기보다는 어렵고 고민스러운 순간이 더 많아요. 부담도 많이 되고요. 작품을 할 때마다 괴롭고 고민도 많고 힘들어야 ‘제 몫을 잘하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스무 살이 되고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많은 선배님들과 연기하다보니 제 생각이 틀렸더라고요. 선배님들처럼 즐겁고 재미있게, 힘든 일이 있어도 담담하게 이겨내며 연기하고 싶어요.
배우의 세계가 자신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사실 학교에서 진로 적성 검사를 하면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직업이 나온 적인 단 한 번도 없어요. 친구들도 도대체 네가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고 물어봐요. 그래도 이 일은 흥미로운 점이 많아요. 못 해본 것을 해볼 수 있고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와 저라는 사람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공통점을 발견할 때 재미있어요.
해본 것보다 하고 싶은 게 더 많을 나이예요. 뭘 해보고 싶어요? 평범한 남지현으로서는 혼자 배낭여행도 가고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싶어요. 친구들이랑 부산에 다녀오긴 했어요. 가서 오픈 버스 타고 시티 투어도 했고요. 얼마 전부터 드디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천천히 하나씩 해보려고요.
배우 친구들도 많겠죠? 여자 친구들이랑은 연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현우 오빠, 노영학 오빠, 진구, 지빈이처럼 함께 연기한 친구들이 거의 남자예요. 근데 여고를 나와서 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여자죠. 그러고 보니 성비가 맞네요.(웃음) 가끔 학교 친구들이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이 실제로 잘생겼느냐, 만나면 무슨 얘기 하느냐며 물어볼 때도 있어요. 그럼 저처럼 보통 사람과 별 차이 없는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얘기해줘요.
여전히 공부 잘하는 학생이고요? 공부는 저보다 잘하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요. 예전처럼 공부하는 게 괴로울 만큼 하기보다는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걸 하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어요.
곧 <쇼핑왕 루이> 촬영에 들어가겠네요.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은 처음이라 많이 부담스럽겠어요. 스타일이나 외모도 중요하잖아요. 고민이 많아요.제 스타일이 아직 확실하지 않고 정해진 것 없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요. 어떤 것 하나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고 나중에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돼요. 그런데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실수하거나 실패하더라도 아직은 잃을 게 없으니 괜찮다. 차라리 빨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보고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며 배워가야겠다고요.
초반에 강한 인상을 줘야 하는 아역 때와 달리 이번에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야 해요. 그래서 걱정이 많아요. 강원도 사투리도 배워야하고요. 제가 가끔 저 스스로에게 먹히는 경우가 있어요. 연기하면서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면 답을 찾지 못한 채 길을 잃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감독님과 작가님을 믿고 재미있게 하려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밝고 활달하게, 즐겁고 재미있게 하려고요.
고집스러운 취향 같은 거 있어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취향이랄까. 고집까지는 아니고 아직 너무 여성스러운 옷은 못 입겠어요.
이렇게 원피스를 입었는데요? 실은 사연이 있어요. 엄마가 저더러 좀 하늘하늘한 원피스도 입고 그러라는 거예요. 처음엔 과하게 여성스러운 옷만 골라주시다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고른 게 이 옷이에요. 원래는 오늘 입은 옷보다 훨씬 심플하고 베이식한 옷을 좋아해요.
오늘 촬영 끝나면 뭐 할 거예요? 집에 갈 거예요. 가서 엄마가 만들어준 맛있는 집밥 먹어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