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방식으로 한 사람을 짐작해볼 때가 있다. 그 어떤 주제에도 막힘이라곤 없이 쾌속 질주하는 달변가는 속도감에 취해 성급한 확언을 일삼는가 하면 말끝마다 ‘진짜’, ‘사실’ 같은 부사를 남발하는 ‘사실주의자’의 말은 도무지 진실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안소희와 나눈 대화는 여백이 길었다. 그녀는 천천히 답을 이어가다가 한 박자씩 쉬기도 했는데, 더 생각해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다시 생각에 집중했다. 제 안에서 정리를 끝낸 뒤 내놓는 답은 중언 부언하거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과장하는 버릇도, 인정받기 위한 처세도 없이 차분하고 명료했다. 그 대화의 방식이 곧 안소희라는 사람 같았다. 조금만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최선의 답으로 기대를 채워주는 그런 사람.
“연기를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보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내가 이 상황이라면 어떤 감정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해요. 자신에 대해 꾸준히 생각한다는 건 연기는 물론 일상을 살아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연기를 배워가며 그녀는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치열한 아이돌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덧댔던 껍질이 이제야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거다. 조용하지만 정확한 방향 감각을 지닌 10년 차 직업인. 일이란 누구에게나 어렵고 복잡하다. 잘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계속하는 것이다. 안소희는 고작 한 편의 드라마와 두 편의 장편영화에 출연했을 뿐이다. 그녀는 보여줄 것이 더 많다.
인터뷰하기 전에 개인적인 근황을 알고 싶었는데 인스타그램을 안 하더라고요? 잘 못해요.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 계정만 만들어놓고 방치할 것 같아서 아예 시작하지 않았어요. SNS를 잘하려면 셀카나 음식 사진을 예쁘게 찍어야 하는데 재주가 없는 것 같아요.
티를 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SNS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 혹은 내 진짜 모습은 이렇다’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충동 같은 게 드는 때요. 그런 충동은 없어요. 말주변이 좋거나 글을 잘 쓰는 편도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노출된 생활을 해와서 그럴 수도 있는데, 일상적인 것은 고스란히 나만의 일상이었으면 좋겠어요. 뭘 올릴 만큼 특별할 게 없기도 하고요.
인터넷을 떠도는 흔한 일상 사진조차 없는 게 그 때문이군요. 혼자 조용히 잘 다녀요. 보통 제 또래 여자들은 예쁜 옷을 입고 운동하러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운동이 끝나면 옷을 다시 갈아입잖아요. 전 그냥 처음부터 운동복 차림으로 나와요.(웃음) 조용히 티 안 나게 다니니까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것 같아요. 가수 활동 할 때 찍힌 사진은 꽤 있어요. 지금보다 어리기도 했고 그때는 꾸미는 게 재미있었어요. 일이 없는데도 혼자 치장하고 다녔죠. 패기 넘치는 스타일의 옷들도 많이 입고.(웃음)
고요한 일상을 보내는 요즘 가장 기쁜 일은 뭔가요? <부산행>이 천만 관객 영화가 된 거요. 드라마 <안투라지> 촬영을 준비하면서 그 소식을 들었어요. 크게 환호하고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슛 들어가기 전이라 차분히 눌렀어요.
영화 <부산행>은 지금까지 배우 안소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품이죠. 가수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때와 지금의 관심이 다르게 느껴져요? 가수 활동을 할 때는 매주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한다거나 길에서 우리 음악이 자주 흘러나오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인기를 느낄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어요. 영화는 매주 관객 수가 얼마큼 늘었다고 하는데, 이게 숫자다 보니까 마음에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러다가도 50대 이상 어른들이 영화 잘 봤다고 인사를 건네면 깜짝 놀라죠. 정말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셨구나 하고요.
아이돌은 충성도 높은 팬덤을 기반으로 활동하지만 배우에게는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게 없다는 것도 다른 점이겠죠? 맞아요. 그런 부분에서 확실히 달라요. 영화는 팬이 아니더라도 관객으로서 좋아해주는 거니까 다른 차원의 기쁨이 있는 것 같아요. 연예계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 저를 알아봐주고 연기가 좋았다고 말해주는 게 신기하고 좋아요. 그래서 더 책임감도 생기고요.
<부산행>을 촬영한 지 1년이 지났어요. 그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많이 차분해졌어요.
원래 차분한 편 아니에요? 단편영화도 했고 드라마도 했지만 오랜만에 영화를 하는 거라 걱정도 많고 긴장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더 빨리 완성된 작품을 확인하고 싶고 관객 반응도 궁금한데, 영화는 촬영하고 나서 개봉하기까지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 시간 동안 기대했다가 답답해하기를 반복했어요. 아무리 혼자서 예상한다 한들 결과는 나와봐야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열심히 한다고 했으니까 결과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시간은 더 안 간다’ 하며 마음을 다졌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되레 편안해지더라고요.
표정 변화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주변 사람들이 마음속 요동을 알아채기 쉽지 않겠어요. 힘들다고 내색하고 싶지는 않고요? 내색하는 편이 아니에요. 장단점이 있긴 한데 일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지 아닌 척하는 데 익숙해요. 보여주기 식이나 엄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때에 따라 조금은 내색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약간의 어리광이 허용되는 나이대가 있잖아요. 이제는 너무 감추고 숨기지는 않아요.
무엇인가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되죠. 스스로 만족하기란 쉽지 않고요. 그런 경험이 있나요? 혹은 연기가 그런 대상인가요? 어릴 때는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마냥 힘이 넘쳤거든요. 지금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초조하고 괴로워요. ‘더 해야 돼, 더 해야 돼’ 하면서 재촉하거나,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하니까 오히려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요. 혼자서 롤러코스터를 엄청 타요. 어디까지나 작품을 시작하기 전까지요. 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애써요. 막상 일을 시작하면 편해지는 편이에요. 내 일이지만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분야마다 전문가가 있는 거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고 나머지는 감독님을 비롯한 전문가들을 믿는 거죠.
롤러코스터에서 내리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예전에는 혼자 많이 삭였어요. 아닌 척하다 보니까 더 힘들었고요. 변태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웃음) 지금은 상황을 조금 즐기려고 해요. 안 좋은 생각이 들때면 중간에 대충 끊지 않고 밑바닥까지 생각을 이어가봐요. 물론 그럼 더 우울해지겠죠?(웃음) 그렇게 지하 100층까지 내려갔다 오면 오히려 맑아지더라고요. 최악의 경우의 최악, 그 최악을 생각하려다 보면 최악의 최상급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렇게 털어내요. 좋은 생각도 해보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될 때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아요. 정리된다기보다 정리하기가 한결 쉬워져요.
오늘 만난 소희씨는 과장이나 꾸밈이 없는 사람 같아요. 본인을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은 소희씨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던가요? 추진력 강한 행동파요. 그리고 의외로 번복왕이라고 하고요. 추진력은 강하나 방향을 자꾸 바꾸는 리더군요. 사소한 일에만 그래요. 계획이 없는 건 싫어요. 성격이 급해서 누가 뭘 해줄 때까지 잘 기다리지도 못하거든요. 결국 답답한 제가 못 참고 계획도 막 세우고 빨리빨리 하자고 재촉해요.
의외의 면이 많네요. 친해지면 저 재미있어요.(웃음)
올가을에 방송하는 드라마 <안투라지>에서는 여배우로 등장하죠.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에 실제 나이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예요. 본인 성격과 흡사한 면도 있어요? 배우라는 역할도 그렇고, 어느 부분에 한해서는 편하게 연기한 것 같아요. 극 중에서는 남자 캐릭터들과 오랜 친구 사이거든요. 연기하는 도중에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만 하는 행동들이 나오더라고요. 친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툭툭거리거든요. 고마운 순간에 그냥 툭 ‘고맙다?’ 해버리고요.
스물다섯 안소희가 풀어갈 숙제들은 뭔가요? 오래만에 출연한 영화가 잘돼서 기쁜 만큼 책임감도 생겨요. 그 전에는 제가 연기자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도 많았거든요. <부산행>을 계기로 안소희가 연기를 한다는 것을 널리 알릴 수 있어 기쁘지만, 그 사실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부담스럽지 않게요. ‘어떻게 해야 잘 스며들 수 있을까?’는 지금부터 풀어가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