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온갖 변수로 가득하다. 내일의 일을 오늘 예측할 수 없고, 당장 오늘의 일도 어디선가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 변수들이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조작된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서 조작된 변수에 갇혀버린 한 평범한 백수가 싸움을 시작한다. 2월 개봉을 앞둔 영화 <조작된 도시>는 조작된 상황에서 누명을 쓰고 부당하게 살인자로 몰린 한 평범한 남자가 사건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다. 지창욱이 게임 속 세상에서는 승승장구하는 리더지만 현실에서는 PC방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게임에 몰두하는 백수 ‘권유’를 연기한다.
배우에게는 모든 작품이 변수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씩씩한 청년 ‘동해’는 <기황후>의 나약한 왕을 지나 <힐러>에서는 강인한 히어로가 되었다. 그리고<THE K2>의 용병 출신 경호원으로 그의 액션 연기에 정점을 찍었다. 그렇게 필모그래피가 예상치 못한 색깔로 촘촘히 채워지는 동안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환호를 받는 스타가 되었다. 배우의 옷이 어색했던 순간은 지났고, 이 길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던 시간은 이제 경험이자 지금을 위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 에너지 덕분에 함께 작품을 하는 사람들과 힘들 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어머니와 친구들 (반려견도 큰 힘이 된다고 한다)의 위로와 응원으로 비우기와 채우기를 부지런히 반복하며 지창욱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지창욱은 복한 삶을 기대한다.
“전 배우이기 전에 사람이잖아요. 예전에는 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면 이제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고민이에요. 그 답은, 글쎄요.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이거 하나는 알겠어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이요.”
오늘 <조작된 도시> 제작 발표회가 있었다. 주연을 맡은 첫 영화이니 긴장되겠다. 어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만큼 긴장됐다. 무엇보다 영화가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다. 만화 같은 요소가 꽤 많은 작품이어서 시나리오의 텍스트만으로는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 장면이 있어 상상에 기대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었을지 확인하고 싶다. 아직 개봉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 CG가 완성되지 않아 최종본을 보지는 못했다. 박광현 감독님의 색깔이 워낙 독특해 더 궁금한 것 같다. <조작된 도시>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것도 감독님 때문이다. 시나리오만 봤을 때는 첫 주연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감독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설득되었다. 박광현 감독님이라면 내 생애 첫 영화를 신나고 즐겁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영화의 출연으로 거둘 수 있는 배우로서의 성과가 있다면 뭘까? 첫 영화 촬영을 무사히 마치는 경험을 했다는 것, 영화 촬영을 하며 만난 배우와 스태프들을 얻은 게 나에게는 성과다. 물론 흥행하면 좋겠지만 그건 바람일뿐이다. 관객의 선택을 받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정말 기분 좋은 일이겠지. 잘되면 좋겠지만 큰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박광현 감독으로서도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첫 작품이니 부담이 많이 됐을 것 같다. 서로의 부담감이 좋은 에너지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감독님의 부담감이 훨씬 크지 않았을까? 감독님은 대단히 꼼꼼한 분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올 때까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기 때문에 감독님이 오케이 하면 믿음이 생긴다. 처음이라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감독님을 믿고 함께 촬영하는 동료, 스태프들을 보며 위안을 얻고 안심했다.
이번에도 액션이 키워드다. <힐러>부터 <THE K2>까지 어느 순간 액션이 지창욱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 점은 사실 나도 놀랍다. 의도한 건 아니다. 다만 흘러가는 대로 상황에 맞게 작품을 고르고, 그 작품에 내가 선택되고 그렇게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오히려 이제는 그만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앞으로 액션 외에 보여줄 것이 많다. 나에게 더 재미난 일이 많이 벌어지겠지. 조금이라도 몸이 성할 때 액션 연기를 마음껏 해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웃음) 액션의 즐거움은 통쾌함인 것 같다. 시원시원한 재미가 있고 보기에도 화려하고 멋지지 않나. 어찌보면 액션은 나에게 로망 같은 거다. 어릴 때부터 견자단의 <정무문>을 좋아했는데 보면서 따라 했던 기억이 난다.
액션영화의 즐거움은 통쾌함이기도 하다. <조작된 도시>도 관객에게 그런 통쾌함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어떤 오해로 태권도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백수가 된 주인공과 그 주변사람들이 권력과 싸우고 힘겨운 상황을 이겨내고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을 굉장히 유쾌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의 통쾌함이 관객에게 전달되고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희망을 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늘 멋지고 흠결 없는 주인공이 아니라 뭔가 결핍과 아픔을 가진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런 인물이 매력적이지 않은가. 결핍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부족한 게 없는 게 결핍이 될 수도 있고. 한 캐릭터를 대할 때도 저 사람은 과연 뭐가 부족한 사람일까 생각한다.
당신은 무엇이 결핍된 사람인가? 음, 어떨 때에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지난 몇 년간 쉬지 않고 바쁘게 지냈다. 중국에서 활동한 것도 그렇고. 끊임없이 일했다. 계속 소진하고 고갈되면 다시 충전하려 하고. 그게 정서적인 것이든 체력적인 면이든. 얼마큼 충전하고 얼마큼 쓰느냐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쉴 때면 시간이 한없이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간이 충분치 않아 나만을 위해 잘 쓰고 싶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친구가 ‘야, 나와. 이거 하자’ 하면 하고 싶지 않아도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따랐는데 이제는 내가 좀 더 주도적으로 뭔가 하자고 제안한다. 고맙게도 친구들이 잘 따라준다.
요즘은 어떤 것으로 고갈된 자신을 채우나? <THE K2>가 끝난 때가 연말이어서 술자리가 아주 많았다.(웃음) 3주 가까이 술에 빠져 지내다 슬슬 술이 아닌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했는데, 이제 밥도 먹을 만큼 먹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영화 홍보 일정도 많고. 쉴 때는 살을 많이 찌우는 편이다. 일부러 그러기보다는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굳이 식단을 조절하지 않는다. 요즘은 다시 술 대신 차를 마시고 하루에 두 끼 혹은 세 끼만 먹고 있다.(웃음)
그간 지창욱이라는 배우의 입지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런 변화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사실 난 그런 변화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 생활이 달라질 건 없으니. 여전히 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내게 예전에는 마냥 애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른이 된 것 같다고 하더라. 난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그런 말에 좀 슬퍼지더라. 나이가 들어도 철없이 살고 싶거든.
예전에는 갑자기 충동적으로 정동진에 가려고 차를 타고 나갔다가 휴게소에서 잠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맞다. 한여름이었지. 휴게소에서 자고 부산에 갔다.
요즘은 시간이 없으니 그런 일탈을 하기도 어렵겠다. 거의 할 수 없기는 하지만 며칠 전에 친구와 일본에 다녀왔다. 친구와 나 모두 뭔가 답답해서 기분 전환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일본으로 떠났다가 어제 돌아왔다. 온천에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고. 같이 떠나줄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떠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사람은 누구나 기복이 있지않나. 배우로서 내가 과연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저 연기하는 것 자체로 행복하다. 또 한 개인으로서 외롭다가도 다시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는데 유독 지난 연말에 한없이 처졌다. 그래서 어머니랑 태국에 다녀왔다. 군대 가기 전 어머니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배우가 된 건 잘한 일 같은가? 물론이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순간이 더 많지만 고통의 순간을 거쳐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무대 위에 오르면 잠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마치 오르가슴처럼. 그 순간의 느낌을 상상하며 힘들게 작업하고 밤을 새우고, 작품을 위해 운동하고 연습하며 고통을 이겨낸다. 이제는 촬영 현장도 예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신인일 때에는 역할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 촬영장에 가기 이틀 전부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연기한 ‘미풍’이는 실제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여성스럽고 뜨개질 좋아하고.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혼자 골방에 틀어 박혀서 미풍이라면 이럴 거다, 저럴 거다 상상하고 행동했다. 이제는 내가 작품 속 캐릭터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람처럼 보이도록 거짓말을 잘해야 하는 거다. 슬프지 않아도 진짜 슬프게 더 디테일하게 계산하는 거다.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진실되고 진심이어야 하는 거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20대를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주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구나. 서른 살이 되면서 과연 크리스마스에 온전히 쉰 날이 얼마나 될까, 내 생일을 촬영장에서 보내지 않은 적은 몇 번이나 될까, 연말에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 게 언제일까 생각해봤는데 많지 않더라.
20대가 지나기 전에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여행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바이크를 타는 게 취미가 됐다. 대단한 여행을 다녀온 건 아니지만 봄과 초여름, 가을에는 바이크를 타고 다닌다. 친구와 함께 서울 근교에도 가고 이탈리아에 여행 가서도 바이크를 타고 다녔다.
스케줄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는데 계속 뭔가를 한다. 무언가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한다. 바이크를 타고 친구를 만나지만 친구와 만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당신의 시간은 빈틈없이 꽉 채워지는 것 같다. <THE K2>를 촬영하며 <그날들> 무대에도 오르지 않았나. 그 와중에 한강에서 치맥 팬미팅도 했다. 언젠가 퍼포먼스나 이벤트로 채우는 팬미팅이 아니라 편하게 치맥을 먹고 큰 스크린으로 드라마도 함께 보며 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다행히 이번에 그럴 수 있었다. <그날들>은 무리한 스케줄이기는 했지만 작품에 애정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컸다. 스케줄을 위해 배려해준 <THE K2> 팀과 <그날들> 팀에 고맙다. 이게 사실 상당히 복합적인 감정인데 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렇다.
올해 군대에 간다. 긴 공백을 앞두고 있으니 불안할 수도 있겠다. 다녀오면 더 편하지 않을까? 젊은 친구들과 함께할 테니 새로운 경험이 되겠지. 물론 다양한 사람이 있을 테고 괜히 내게 못되게 구는 친구들도 있을 것 같은데, 뭐 내가 잘못하지도 않는데 괴롭히기야 하겠나. 비록 나이 차가 많이 나겠지만 오히려 그들을 보며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입대하기 전에 아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작품 하나만 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