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블라우스 레지나 표(Rejina Pyo).

화이트 블라우스 레지나 표(Rejina Pyo).

한예리의 일상에는 억지스러운 구석이 별로 없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순간을 매번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묘사했다. 그러곤 그러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주어진 현실에서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내 마음에 두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가장 자신답게 생활한다는 것. 동시에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도록,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매순간을 충실하게 채운다고 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무용에서 배우의 세계까지 영역을 넓혀갔고, 자신을 더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어느새 두 예술 장르 모두 한예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일이 되었으며 <춘몽>의 ‘예리’, <최악의 하루>의 ‘은희’, 드라마 <청춘시대>의 ‘진명’ 등 자신과 닮은 여자들도 연이어 찾아왔다.

지난 작품을 끝내고 숨을 고르는 동안 한예리는 에너지의 균형을 다잡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떠났던 무용 무대로 돌아간 날을 보냈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다니며 세상의 이야기를 분주히 보고 들었다. 아직 차기작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그녀는 어떤 세계로든 담대하게 스며들 준비가 돼 있다. 그녀에게 바람이 있다면 그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연기를 하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한예리는 그런 내일을 위해 오늘의 자신을 마주한다.

 

카키 원피스 앤(AAN).

카키 원피스 (AAN).

지난해 개봉한 영화 <춘몽>이 가장 최근작이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작년 12월에는 무용 공연을 했고, 근래에 또 한 번 무대에 올랐다. 오랜만에 무용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한예리는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 배우다. 찾아보니 SNS 계정이 하나도 없더라. 워낙 그런 쪽으로 게으른 편이기도 하고, 발을 한번 들이면 SNS 관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쏟을 것 같아서 시작조차 않는 것도 있다. 너무 사적인 일상은 노출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고.

다행히 작년에는 SNS 없이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세어보니 2016년에만 드라마 2편에 영화는 4편이나 찍었더라. 그러게. 나 정말 열일했더라.(웃음) 2016년에 들어서면서 세운 새해 계획이 어떤 일이든 너무 망설이거나 고민하지 않고 쉽게 선택해서 경험해보자는 거였다. 그래서 빈틈없이 바빴지만 그만큼 유난히 즐거운 해를 보낸 것 같다.

그렇게 1년이 훌쩍 흘렀고, 새로운 봄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 작년에는 바빠서 못 갔는데, 올봄에는 꼭 나들이를 가보려 한다. 아, 제철 음식은 이미 여러번 챙겨 먹었지. 냉이랑 달래, 씀바귀 같은 봄나물.

봄나물을 챙겨 먹는 사람이라니. 한예리의 평소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될 수 있으면 규칙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 하고. 그런 틈이 있어야 일을 할 때도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처럼 여유로운 때를 맞았으니 지난 활동을 돌이켜보는 순간도 많았겠다. 한 라운드를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다. 연기할 때 쏟았던 에너지를 다시 채우고 있는 느낌이랄까. 무용을 하면서는 내가 여전히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있구나, 댄서로서의 움직임이 망가지지 않았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검열하는 기분도 들었고. 생각보다 내가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작년에 한창 바쁠 때는 일 없인 못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쉬니까 또 게으른 대로 좋더라.(웃음)

 

카키 원피스 앤(AAN).

카키 원피스 (AAN).

촬영장에 오기 전에 <춘몽>을 보고 왔다. 꿈처럼 미묘한데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고, 다양한 감정이 동시에 드는 작품이다. 주연배우들의 호흡도 흥미롭다. 촬영할 때 엄청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다 편해서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거든. 흑백으로 찍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고, 영화의 정서도 마음에 와 닿았다. 장률 감독님의 영화를 문학 장르로 보자면 시와 가깝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축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다채로운 감정을 전하면서도 궁금증을 유발한다는 점이 특히나 매력적이다. 여러 의미에서 작년을 <춘몽>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춘몽>을 포함해 <최악의 하루>, 드라마 <청춘시대>까지 모두 여자가 주체가 되는 작품들이다. 여배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생각해보면 남자든 여자든 구분 없이 극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건 당연한데, 여성 캐릭터에게 중요한 키를 맡긴다는 것 자체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게 유감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다행히 여배우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는 중이다. 그러니 영화계에서 여성의 자리도 조금씩 더 넓어지겠지?

작품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 기준은 없다. 선택하는 이유가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한 가지가 생기면 나머지 아홉 가지가 싫어도 다 괜찮다. 그 한 가지는 스토리가 될 수도 있고, 감독님이나 주연배우일 때도 있고, 캐릭터나 시대 배경인 경우도 있다. 하나가 좋으면 나머지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표현할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중점을 두는지 궁금하다. 유독 악을 쓰거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모습은 만나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표현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정해진 앵글 속에서 의상이나 미술, 메이크업 등 많은 것들이 동시에 제기능을 하면서 완성되는 결과물이다. 그 덕분에 배우는 시나리오를 통해 느끼는 대로, 해석하는 대로 연기를 할 수 있는 거다. 한 배역을 맡으면 얼마간 그 인물 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살게 되는데, 결국 내 안에서 꺼낸 모습이기 때문에 180도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본 적 없었던 색다른 캐릭터에 대한 욕심도 들겠지? 뭐든 해보고 싶다. 한예리라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바로 그려지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는 게 가능할지 나도 정말 궁금하다.

무용과 연기 모두 자신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춤을 출 때와 연기할 때 갖는 감정은 어떻게 다른가? 무용은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운 동작을 백번 천번 연습해서 익숙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연기는 그 반대다. 같은 연기를 여러번 반복하면 틀에 갇혀버리거나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걸 더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일이니까. 춤을 출 때는 에너지를 축적하는 기분이 들고, 배우로 살 때는 내 안에 쌓여 있던 것을 하나씩 없애면서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하나는 채우는 작업, 다른 하나는 비우는 일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후 가장 달라진 건 뭘까?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스물세 살이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너무 뭘 모르니까 힘들었다. 모든 게 막연했고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 했다. 스물세 살 때도 연기와 무용 다 했는데, 돌이켜보면 단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만 기대 살았던 것 같다. ‘난 연기하고 무용을 해. 쉬지 않고 있으니 괜찮게 사는 거겠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사실 어떤 시간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가 가장 중요한데 그걸 잘 몰랐다. 그러니까 당시에 비하면 지금이 당연히 더 좋다. 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할 때 괜찮은 사람이 되는지 알고 있으니까.

 

화이트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톱과 팬츠 모두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화이트 트렌치코트 질샌더 네이비(Jil Sander Navy).

화이트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톱과 팬츠 모두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화이트 트렌치코트 질샌더 네이비(Jil Sander Navy).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깨닫는 건 확실히 중요하다. 오늘의 한예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뭔가? 요즘은 반가운 영화가 참 많다. <히든 피겨스>를 특히 재미있게 봤다. <미녀와 야수>는 보는 내내 애니메이션의 추억이 떠올라서 좋았다. <로건>은 로건과 아름다운 작별을 할 수 있게 해준 영화라서 좋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여운이 짙었다. 그러고 보니 몇몇 작품은 보면서 울기도 엄청 울었네. 얼마 전부터는 음악도 자주 듣는다. 이소라 씨, 김윤아 씨 앨범이 새로 나와서 너무 기쁘다. 근사한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고 있다. 음, 또 뭐가 좋더라…. 참, 최근에 산 그릇이 엄청 마음에 든다. 요즘은 예쁘면서도 실용적인 게 좋다.

앞으로 어떤 순간들로 30대를 채워가고 싶은가? 30대는 여러모로 뭔가 특별하고 아름다운 시기인 것 같다. 서른 살이 되던 날에는 정말 기뻤다. 나만의 고유한 것들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지금 이 시기 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전반과 후반의 점수 차가 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중요한 라운드 한가운데에 선 만큼 너무 편중하지 않고 살면서, 가장 나다운 시간을 만들어가고 싶다. 10년 후의 내가 오늘의 나를 좋아해야 할텐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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