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진을 만난 건 <내성적인 보스> 촬영이 끝난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몇 달간 살아온 ‘은환기’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었고, 그때의 감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다른 작품을 마쳤을 때보다 유독 더디게 연우진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직 ‘환기’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발버둥 치듯이 화보 촬영을 한 것 같아요.” 아직 환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진 못했지만 드라마 <7일의 왕비>로 새로운 옷을 입을 준비를 시작했다. 첫 촬영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나눌 순 없었지만 커다란 틀은 로맨스라고 한다.
“로맨스 작품 속 저를 많은 분들께서 좋아해주시지만 그 자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고민을 늘 해요. 물론 특정한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뜻대로 되진 않지만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만남이 찾아오기도 하더라고요. 올해 세 편의 영화, <사선에서> <더 테이블> <궁합>이 개봉해요. 이 영화들에서 익숙하지 않은 저를 만나실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올해가 기대되는 이유죠. 그러고 보면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순간 잃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이건 열심히 하면서 깊은 생각과 철학이 쌓여갈 때 기쁨을 느껴요. 앞으로도 로맨스가 아닌 더 다양한 색을 입게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의 저다움을 잃지 않고 연기하며 꿋꿋이 가보려고요.”
포즈가 다이내믹해서 의외였다. <내성적인 보스> 방송 전에 했던 화보 촬영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드라마 방영 직전이어서 캐릭터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해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들뜬 상태로, 스스로를 좀 더 자유분방하다고 느끼며 촬영했다. 사실 오늘 스튜디오에 오면서 걱정했다. 드라마가 끝난 지 2주 정도 되어가는데 아직 은환기라는 캐릭터와 그때의 추억들이 남긴 잔상에 여전히 취해 있는 중이라 화보 촬영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검은 옷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이렇게 밝은색 옷을 입었는데 낯설지 않았다. 화보 촬영 덕분에 어두운 톤의 은환기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다. 기분 좋은 작업이었다.
작품을 끝낸 후 연기한 캐릭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편인가? 보통은 작품이 끝나면 고향인 강릉에 가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엔 내려가지 못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뭔가를 하려 하지 않고 일상을 보내면서 생각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가장 중점을 둔 것이 나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다. 몸에서 힘을 최대한 빼고 내 안의 많은 것을 비워내려 했다. 작품이 끝나고 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기 좋아하고 여행도 떠나곤 하는데, 이번엔 여운이 길어서인지 오히려 뭘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환기를 준비하며 왜 자신을 비우려 한건가? 처음에는 내성적인 은환기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자꾸 뻔한 부분이 부각되며 재미없게 느껴졌다. 말수를 줄이고 정적인 모습만 표현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란 사람과 캐릭터의 공통점을 찾지 않고 그냥 나를 비우기로 했다. 그래서 애써 뭔가를 찾으려 하지 않고 음악을 들으며 혼자 많이 걸었다.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일상의 나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니까 어느 날 은환기가 나에게 탁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걸었나. 처음엔 살을 빼려고 매일 1만5천보 이상 걸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보고 사람을 구경하며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중독이 되더라. 그리고 자연스레 환기에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작품 때문에 살을 빼긴 했는데 지금의 상태가 썩 나쁘진 않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까? 상쾌하기도 하고 몸이 가벼운 느낌도 좋고 머리가 맑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적당한 예민함이 생긴 것 같아 좋다. 오감이 자극된달까.
예민함이 독이 되기도 한다. 장단점이 있겠지. 일단 연기할 땐 좋다. 그런데 이런 예민함에 빠져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지 못할 때가 있더 라. 너무 나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드라마가 ‘소통’에 관해서 얘기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 소통을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미안하기도 했고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하더라. 하지만 지루한 일상에서는 이 예민함으로 스스로가 더 풍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일을 하고 있구나’, ‘내가 어딘가에 빠져 있구나’라는 생각에 기분도 좋았다.
드라마는 한 회 방송이 끝나면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그 반응을 보며 16부를 끌어가야 하는데 <내성적인 보스> 시청률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서 배우로서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삶의 철학이기도 하고 똥고집이기도 한데,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편이다. 모든 일 는 이유가 있을 테니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는 않는데 그래도 처음 겪어본 일이긴 했다. 나다움으로 그런 것들을 덜 어내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일희일비하기보다는 큰 그림 속에 이 작품이 높은 완성도로 끝까지 유지하려면 우리의 길을 정확하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무사히 끝냈고 촬영 내내 아등바등하며 이를 악물고 연기했다.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들과는 오히려 더 잘 뭉쳤다. 촬영장의 우리는 뜨거운 용암같이 들끓었다.
이번 작품이 자신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 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연기를 하며 늘 성찰의 시간을 갖는데 이번 작품만큼 이렇게까지 자학하며 성찰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사실 많이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 다른 내 모습을 보았고, 몰랐던 예민함을 찾았으며, 연기 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인간 연우진과 배우 연우진 모두 한 단계 더 깊어진 것 같다. 지칠 때마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내가 환기에만 빠져 있을 때 주위에 늘 함께 연기하는 배우가 있었고, 이 사실이 매우 안심이 되는 순간도 있었다. 나보다 어린 배우들이었지만 그들로부터 얻는 에너지가 정말 컸다. 그 에너지가 내 안의 어떤 것을 끄집어내는 큰 동력이 되었다. 연기란 함께해야 한다는 것, 작품이란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걸 알았다.
작품 하나하나를 해낼수록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있을 것 같다. 또는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잃고 싶지 않은 신념도 있을 테고. 연기를 할수록 나만의 고집이 생겨 때론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잃고 싶지 않은 가치관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나만의 방법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상황에서나 느긋하고 긍정적으로 대처하고 순리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내 삶을 더 부드럽게 해주는 것 같다.
긍정적인 당신에게 가장 큰 역경이 있었다면 언제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아버지와 이별했을 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자 가장 친했던 친구고 내 인생의 롤 모델인 사람과 이별하는 그 순간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항상 느끼고 있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기를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버지는 내게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어 마음 속 어딘가에서 항상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지금도 기쁜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실지 떠올려본다. 그 선택이 옳았을 때는 아버지가 도와 줬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주 한잔 하면서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얼마 전 공식 SNS에 드라마를 하면서 그린 그림 한 장과 함께 드라마를 끝낸 소감을 남겼다. 처음엔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연필을 깎아 소감을 적고 사진을 찍고 나니 끝까지 내가 아닌 은환기로 작품을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을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드라마에서 집에 혼자 있는 장면이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그곳이 굉장히 편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16부까지 촬영이 끝나고 나니 그림이 완성되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지만 그 속에는 농촌에서 보내는 안락한 시간이 담겨 있다. 편안하게 누워 자연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의도한 그림은 아니었고 손이 가는 대로 자연스레 그렸다. 언젠가 산과 바다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은 꿈이 있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이 좋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여행을 많이 다녀서 지금도 그런 곳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연기 말고 나를 뜨겁게 하는 것이 있나? 재미없게 들리겠지만 아직 없다. 가끔 나조차 연우진이라는 사람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뜨거운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래서 늘 찾으려고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많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시간이 후회될 때도 있어서 앞으로는 좀 더 용기를 내볼까 한다.
뜨거운 뭔가는 무엇이 될까? 록을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 그 취향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록 음악에 재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즐기기 위해 용기를 내볼까 한다. 언젠가는 취미로 밴드도 해보고 싶다. 그럼 나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
하루에 1만5천보씩 록 음악을 들으며 걸었겠다. 아니. 트로트 들었다. 트로트의 구성진 리듬감에 몸이 반응했다. 나훈아 선생님 노래를 많이 들었다. 색달랐다. 새로운 것들이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온 때였기 때문이었을까?
배우 연우진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최종 목표라기보다는 늘 깨달음이 있으면 좋겠다. 인간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관심사일 수도 있고. 깨닫기 위해 움직이고, 그러면서 성숙하고 단단해지고 싶다. 연기가 되었든 다른 무언가가 되었든. 물론 그 범주 안에 연기는 늘 함께하면 좋겠다.
대답할 때 늘 명확한 단어를 선택하려는 것 같다. 단어 선택이 문과보다는 이과생 같다. 그런가? 이과 출신이긴 하다. 연기를 전공한 게 아니라 토목과를 전공했으니. 대학에서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렸을 때는 수동적으로 살았는데 스무 살을 지나면서 그동안 참아온 것들이 터져 나왔다. 물론 선택의 두려움도 있었다. 운 좋게 배우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순간순간의 연결 고리가 잘 맞아떨어졌다. 군대를 비교적 일찍 다녀온 편인데 그때 정말 영화에 미쳐 있었다. 그래서 제대하자마자 배우가 되고 싶은 의지가 불타 올랐다. 그 의지에 스스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냥 흘러가버릴 수도 있던 시간인데 이렇게 좋은 흐름이 되었다.
인터뷰를 즐기는 편인가? 오늘 아주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런 내가 어색하다.(웃음) 인터뷰는 정말 어렵다. 내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메일을 보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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