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의 대화를 정리해보면 배우 정은채는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돌진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는 샛길을 찾아 걷는 사려 깊은 산책자에 가깝다. 영화라는 신비로운 길에 매 혹돼 <플레이>(2011), <무서운 이야기>(201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역린>(2014), <더 킹>(2017) 등 장르에 대한 호오나 배역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잘해낼 수 있는 것 들을 찾아 걷는 이다. 그러니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무엇이 되어보겠다는 유의 욕망은 그녀와 멀어 보인다. 외려 자신의 욕심이 작업물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계하는 쪽에 가깝다. 그녀는 이 길 위에서 인연처럼 ‘해원’을 만났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시간을 담담히 지나며 부일영화상 신인여자연기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신인상, 올해의 영화상 신인여우상,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 했다. 그리고 이번 가을, 해원 위에 덧입혀도 좋을 인상적인 연기를 남긴 영화 <더 테이블>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더 테이블>은 싫어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영상은 아름답고 리듬은 유려하며 대사는 생생하고 연기는 사랑스럽다. 정은채가 참여한 두 번째 에피소드는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몇 달 만에 연락해온 남자를 다시 만나는 경진의 이야기다. 두 남녀 사이의 팽팽한 긴장 이면에 겹겹이 감춰져 있는 감정의 레이어를 찾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어색한 공기 속 경진의 어쩔 도리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정은채는 오직 표정과 눈빛만으로 표현한다.
<더 테이블>이라는 영화의 형식이 대화의 흐름으로 인물의 성정과 사건을 유추하게 만들듯 이날의 인터뷰 또한 그녀가 남긴 말들을 더듬으며 배우 정은채라는 사람을 짐작해 본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난 뒤 흘러나오던, 유순하면서도 명료한 대답들이 곧 정은채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은채는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정확히 말한다. 중간중간 특유의 해사한 웃음을 ‘파’ 하고 터뜨리면서.
<더 테이블>이 본격 N차 관람 영화로 사랑받고 있다. 본인은 이 영화를 몇 번 정도 봤나? 세 번 봤다. 부산국제영화제 스크리닝에서 처음 봤고 이후 전주 국제영화제와 개봉 시사회에서 봤다.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편이 아닌데 <더 테이블>은 러닝타임이 짧기도 하고, 피로감이 덜한 편이라 다시 봐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나뉘어 있으니 다음번에 집중해서 보고 싶은 에피소드가 생기는 것 아닐까. 나 역시 볼 때마다 마음이 가는 에피소드들이 다 달랐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영화를 다시 찾는 분들도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김종관 감독이 배우 정은채의 눈빛을 극찬하더라. 어느 시사회였나 김종관 감독님이 4명의 배우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감독님은 일찍이 이런 유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본인 나름대로의 답을 구상하고 오신 듯 했다. 모든 배우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 하고, 그렇다고 그냥 다 잘했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잘 꾸려 오셨다.(웃음)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의 첫 느낌이 궁금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앞뒤 설명 없이 이야기가 바로 열리는 느낌이라 흥미로웠다. 저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두 사람이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은데 경진은 왜 계속 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지 궁금해지더라. 이런 질문들을 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이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촬영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예상보다 큰 긴장감이 돌았다. 상대 배우였던 전성우씨와 사전에 미팅은 했지만 다양하게 교류하지는 못했다. 성격이 진중하고 조용한 편이고,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웃음) 본의 아니게 나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연기하다 보니 감독님이 의도했던 긴장감이 더 살아났다.
‘너를 좋아해서 네가 밉고, 너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나도 밉다’는 것이 경진의 가장 큰 마음 아니었을까. ‘경진’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경진은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했던 거다. 호의와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그 자리에 나갔겠지. 이번에는 상대가 나에게 얼마나 진심을 내줄까 하는 걱정도 컸을 테고. 그렇다고 상대의 감정과 반응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거나 직접적인 화두를 던지지는 않고 그 사람에게 계속 반응하고 그의 반응을 살피는 그런 섬세한 사람이라고 봤다.
맞다. 4명의 캐릭터 중 경진이 가장 섬세한 성정의 인물 같다. 실제 배우 정은채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GV에서 저런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받은 적이 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 함께했던 PD님이 ‘아마도 저렇게까지 갑갑하게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확실한 의사 표현을 했을 것이고, 모호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쪽은 아닐’ 거라고 대신 답해주셨다. 나 역시 그 답에 동의하고.(웃음)
두 번째 에피소드는 두 남녀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상 생활에 서 관계를 맺는 데 유연한 편인가? 능숙한 편은 아닌 것 같다.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신중한 편이다.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 스쳐간 사람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깊어진 사람도 있다. 관계의 모양은 제각각이더라. 다만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보고, 깊이 알려 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벌어진 시간이 낮보다는 낮 두 시 반이다. 평소에 주로 무엇을 하는 시간인가? 보통 두 시 반이라면 집에서 차를 마실 시간이다. 오전에 운동을 하고 해가 지면 산책을 나간다. 맞다. 밤 산책만의 묘미가 있다. 낮 보다는 밤 시간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둠이 깔리면 생각이 더 깨끗하고 선명해지는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때니까. 내게 밤은 평온이 찾아오는 시간 같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어릴 때는 강박적으로 일기를 썼다. 지금은 쓰고 싶을 때 쓴다. 쓰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서 굳이 내 글을 쓰고 싶지 않을 때는 책을 펼쳐 필사를 한다. 손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행위가 여러 생각을 없애 주니까 명상하는 기분도 든다.
패션을 전공했고, 그림과 음악도 좋아한다. 음반을 낸 적도 있고. 다양한 예술 매체 사이에서 왜 영화를 업으로 삼았나?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고 미술이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역시 모두 영화를 통해서였다. 영화라는 예술 매체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된 관심인 셈이다.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환상을 품고 있다.
영화에 빠졌던 강렬했던 첫 극장 체험을 기억하나? 중학교 때 부산에서 살았다. 당시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팝콘을 먹겠다고 극장에 갔는데 그때 본 영화가 <번지점프를 하다>다. 영화를 보면서 ‘이게 뭐지?’ 싶은 문화 충격을 받았다. 당시 영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날의 느낌과 극장 안의 공기까지 모든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여전히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고, 여러 번 봐도 좋다.
필모그래피가 한 맥락으로 읽히지 않는다. 매번 장르를 달리해왔고, 특별 출연에 가까운 작은 역할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본인의 의지로 작품을 선택한다는 느낌이다. 의지라기보다 인연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참여하게 된 작품들은 희한할 정도로 과정이 수월했다. 특정 시기에 때마침 작품 제안이 들어오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투입될 수 있는 상황들이었다. 그럴 경우 작업의 결과가 더 좋더라. 진행 흐름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내가 욕심부리지 않고 연기에 임할 때 만족도도 높았다.
작품이나 캐릭터를 통해 배우로서 어떤 입지를 다져야겠다는 계획이나 목표는 세우지 않는 편인가 보다. 그 또한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다. 혹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입증하고,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면 메이저 작품들만 선택했겠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작업에 참여했을 때 내가 얼마나 작품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려한다. 나만의 일이 아니니 적어도 나 한 사람보다는 작업물의 완성도가 더 중요하지 않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작품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는 편이라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상태에서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하나 더 있다면 지금껏 해오지 않은 캐릭터에 끌리는 편이다.
배우들은 늘 새로운 캐릭터에 목말라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여성 배우들은 더더욱. 한국 영화의 성비 불균형 문제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 들 것 같다. 영화계 젠더 문제는 현재 대형 영화관에 걸려 있는 포스터들만 봐도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 아닌가. 이런 이유로 4명의 여성 배우들이 다른 시도라 할 수 있는 <더 테이블>에 기꺼이 참여했던 것 같다. 한국 영화계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시도가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즐겁게 임하고 싶다.
요즘 배우 정은채를 사로잡는 생각은 무엇인가? <더 테이블>로 인한 활동을 하고 있고, 영화 <안시성>을 촬영 중이라 일에 대한 생각이 가장 크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스스로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하나 생각 한다. 방향을 ‘제시해야겠다’가 아니다.(웃음) 굳이 여기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아도 방향에 대한 질문은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나다운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대다. 정은채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건강하고 투명한 정신으로 남에게 해롭지 않은 삶.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