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여진구와의 대화는 호흡이 빠르다. 거의 모든 질문에 빠른 속도로 답한다. 지나간 캐릭터에 대한 소회, 선배들과 함께한 현장에서 느낀 심경,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 삶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나면 하고 싶고 가고 싶은 곳들. 주제를 막론하고 주저 없이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씩씩하고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는 점에서 연기도 예술의 영역이라는 그는 현장에서 부딪히며 연기를 배웠으니 이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잘 표현하고 싶어 대학에서 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간 여진구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괴물 같은 아빠들을 자양분 삼아 더 큰 괴물이 되어버린 화이를 연기했고, <서부전선>과 <대립군>까지 설경구, 이정재 등의 선배들과 함께하며 현장에서 제 몫을 거뜬히 해냈다. 그리고 12월 개봉을 앞둔 장준환 감독의 차기작 <1987>(가제) 속 이야기의 시작인 박종철을 연기하며 자신이 살지 않은 시대, 경험하지 않은 역사 한가운데에 선다. 인터뷰가 있던 당일 새벽까지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 촬영을 했다지만 마지막 회차 촬영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는 스물한 살의 이 배우는 지금 연기에 대한 열정과 취향에 대한 발견으로 자신의 세계를 건강하고 현명하게 빚어가는 중이다.
올 상반기에 <대립군>이 개봉했다. 많은 배우가 연기한 바 있는 ‘광해’ 역을 맡았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캐릭터를 만들어가기 어려웠을 것 같다. ‘광해군’이기 때문에 어려웠다기보다는 <대립군>의 광해가 내가 알던 왕의 모습이 아니어서 어려웠다. 위엄 있거나 권위적인 왕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 리더십을 갖추게 되리라 짐작은 하지만 당장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힘든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약한 소년이자 어린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몇 편의 사극을 해오면서 왕을 맡기도 했는데 그때 캐릭터와 많이 달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감독님과 의견을 많이 주고받았다. 감독님은 광해의 감정이 격정적이지 않고 잔잔한 시냇물이나 촛불처럼 흔들리기를 바랐다.
배우에게 캐릭터는 숙제다. 숙제를 풀 때 어떤 식으로 푸는가? 혼자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힘들다. 선배들이나 감독님과 영화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시간들이 모여 차츰차츰 선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아무래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많다. 그런 식으로 틀을 다지고 현장에서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는 게 편하다. 지금껏 선배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았는데 내가 애써 역할에 힘을 주지 않아도 선배들과 함께 연기하면 감정이 잘 흘러간다.
선배들로부터 들은 조언 중에 마음에 유독 와 닿았던 조언이 있다면? 작품에 몰입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러다 자칫 역할에 집착하게 되면 스스로를 틀에 가둬버릴 수도 있다는 말. 작품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오히려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연기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도 중요하다. 독백하듯이 연기할 수 없지 않나. 지금보다 더 진한 감정을 연기하게 되면 그런 조언이 마음에 더 크게 와 닿을 것 같다.
영화 속 광해처럼 흔들리거나 위태로웠던 순간이 있었나? 어려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많은 응원을 받아서인지 그런 순간은 없었다. 사춘기도 별다를 게 없었다.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하고 힘들어할 때도 나는 운 좋게 안정적이었다. 가끔 뒤늦은 사춘기가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불안하진 않다.
늘 칭찬받는 배우였다. 그런 칭찬이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연기만큼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줄다리기 같은 긴장감은 필요한 것 같다. ‘잘해서 칭찬받고 싶다’라기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작품을 앞두고 목표는 늘 ‘살아보자’다. 그 역할로 후회 없이 잘 살아보자.
대학생 여진구의 모습이 궁금하다. 학교 다니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많이 기대했던 건 또래와 함께 하는 작업이었다. 또래끼리 아이디어도 내보고 거침없이 표현하며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 덕분에 연기에 대한 생각이 조금 변했다. 전에는 ‘이 역할은 이런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렇게 할 것 같아. 이 친구처럼 해볼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좀 더 부딪혀보고 싶어졌다. 물론 친구들과 연기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학교생활부터 다른 관심거리까지 친구들과 있으면 얘기할 게 많다.
배우 말고 인간 여진구가 꽂혔던 게 있나? 궁금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에 흠뻑 빠진다. 최근에 꽂힌 건 와인. 인터넷이나 책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마셔보기도 하며 공부했다. 요즘은 스페인 와인이 좋더라. 고기를 좋아해서 묵직한 느낌의 와인을 좋아한다. 고전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한다. 지인으로부터 유명 감독의 대표 작품을 하나씩 모아놓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책에 소개된 영화를 하나씩 찾아 보는 중이다. 책에 등장한 영화를 찾아 보고 나면 해당 페이지를 접는다. 모든 페이지를 접게 될 날을 기대하며.(웃음) 한동안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빠져 있기도 했다.
예정대로라면 올 하반기에 <1987>이 개봉한다. 이야기의 시발점인 ‘박종철 열사’를 연기했는데 사극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와는 또 달랐겠다. 기술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박종철 열사와 최대한 비슷해 보이도록 분장한 것이다. 가발부터 안경, 옷까지 고증하듯이 맞췄다. 특별 출연이긴 하지만 많이 조심스러웠다. 실존 인물이라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내가 그분의 삶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신 나이가 딱 지금 내 나이다. 촬영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이번에도 역시 선배들에게 많이 물었다.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가늠이 되는가? 대답하기가 조심스럽다. 어렵기도 하고.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거리로 나선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데 직접 살아본 시대가 아니어서 명쾌한 답을 내놓기 쉽지 않다.
<화이>에 이어 장준환 감독과는 두 번째 작업이다. 이번에도 기라성 같 은 선배들과 함께한 작업이기도 했고. 감독님과의 현장은 경험한 적이 있어서 편안했다. 선배들은 늘 나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열정을 잘 다룰 줄 안다. 나는 뜨거운 불을 만들어내기만 할 뿐 그 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데기도 하고 막막하다. 선배들처럼 자신의 열정을 냉철하게 조절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열정에 데는 건 뭔가? 내 열정과 작품의 타협점을 못 찾을 때가 있다. 작품 전체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연기를 하다 보면 시야가 점점 좁아질 때가 있거든. 열정에 데어 힘들 때도 선배나 감독님을 찾아가는데 내가 찾기 전에 먼저 물어봐주실 때도 많다. 아마도 옆에서 내 감정 상태가 다 보이는 모양이다.
주변의 많은 선배들처럼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어떤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나? 내가 지금 바라보는 선배의 바로 그 모습. 후배가 필요할 때 편하게 맞아주고 후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선배가 되고 싶다. 아직은 먼 미래 얘기겠지. 그런데 요즘 <다시 만난 세계> 촬영장에 가면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스태프들도 있다. 느낌이 색다르더라.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았다. 언젠가 다른 좋아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성격이 원래 뭐 하나를 오랫동안 못한다. 그런데 연기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변수도 워낙 많고 선배들도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말씀하신다. 나에겐 무궁무진한 세계다. 연기에 질릴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좋아하는 것들이 더 생길 것 같기는 하다. 전에는 오로지 연기 하나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해보고 싶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연기를 안 하면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들을 함께 좋아하면 되겠다 싶다.
하반기 <1987>이 개봉하기까지 쉬어가는 시간이 있겠다. 올해는 정말 마음껏 연기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고 쉴 생각에 또 기분이 좋다.(웃음) 몇 작품을 이어 하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삶을 대하는 방식도 그렇고. 온전한 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만난 세계> 촬영이 끝나면 여행을 많이 가려고 한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데 지구 정반대편인 남미나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남반구에 가서 완전히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 별다른 계획 없이, 여행 책 한 권만 있으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