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를 잃은 강아지처럼 소녀의 손짓을 따르고 인간성 대신 야성을 몸에 걸친 늑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얼굴과는 어울리지만 야생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송중기는 지저분한 얼굴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눈빛으로 관객 앞에 섰다. 그리고 2017년 우리에게 어느새 익숙해진 군복을 입고 상처 가득한 얼굴로 총과 칼 혹은 촛불을 들고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사람들을 지키고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영’으로 돌아왔다. 제작 전부터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받아온 영화 <군함도>는 예상치 못한 논란과 비판의 한가운데에 들어섰지만, 실제 군함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춘천의 세트장에서 동고동락 한 감독과 배우들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를 넘나들며 꿋꿋이 관객을 만났다. 어쩌면 상업 영화로 만들기에 다소 예민한 소재의 영화를 차기작으로 고른 순간부터 논란 혹은 그로 인한 갖가지 위험 요소가 예상된 건지도 모른다. 흥행과 비평의 결과에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해 아쉬움도 크며 결국 모든 책임은 자신을 비롯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속상한 마음의 근원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함도>를 위해 보낸 모든 시간은 대견한 성장의 시간이었음은 확신한다. “인생의 큰 일을 앞두고 있어 더 진지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영화를 촬영했죠. 광화문 촛불집회가 있던 날 영화 속 촛불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고요. 좋은 선배들을 만나 영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주제로 토론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선배들과 교감하면서 제 더듬이가 넓어진 듯해요. 서른두 살에 이 영화를 찍었고 서른세 살이 됐는데 이제 시선을 좀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중심에 류승완 감독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있죠.”
<군함도>와 관련한 해외 프로모션까지 모두 마쳤겠다. 2주 전에 아시아지역 영화 프로모션이 끝났다. 요즘은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다.(웃음) 실은 개인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기억이 좋다. <늑대소년>의 첫 상영을 부산국제영화제 때 야외의 전당에서 했거든. 박보영, 유연석 배우와 함께 그곳에서 <늑대소년>을 처음으로 봤다. 좌석 수보다 두 배 정도 많은 관객이 찾아준 바람에 자리가 모자라 계단까지 꽉 찼다. 나도 계단에 앉아 봤다. 첫 상영이어서 엄청 떨리는 자리였는데 관객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상영이 끝나고 횟집에 가서 정말 기분 좋게 뒤풀이를 했다. 아쉽게도 공식 초청작이 아닌 데다 당시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어서 시간이 여의치 않아 레드카펫을 밟지는 못했다. 마리끌레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쉽지 않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무사히 잘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고, 영화배우 중에는 그래도 막내에 속하는 나라도 이렇게 나서면 더 많은 어른들이 동참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러고 보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배우들의 기억이 다들 좋다. 왜 영화제에 정치적인 이슈가 얽혀 문제가 됐는지 아쉽다. 어쨌거나 이 시기를 잘 지나 더 멋지게 나아가면 좋겠다.
<태양의 후예> 방영이 끝날 즈음 인터뷰를 했을 때 <군함도>를 위해 몸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크랭크인 전이었는데 배우들과 촬영장에서 함께 만들어갈 에너지가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며칠 전이었나? 어떤 분이 <군함도> 출연 배우들과 류승완 감독님의 사이가 틀어졌느냐고 물었다. 아마 개봉 후 많은 논란이 있었던 터라 그런 소문이 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개봉하고 더 친해졌다. 사흘 전에도 황정민 선배와 한잔했다. 풍파를 겪어서 그런지 진짜 끈끈해졌다. 무대인사를 다니며 더 진솔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촬영장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나눴다. 어쩌면 서로 좋은 ‘오지랖’을 펼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이니까. 혹시 영화에 대한 논란이 상처가 될까 봐 서로에게 더 애틋해진 것 같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촌스러움이 좋다는 말을 했다. 감독님이 제작발표회 때 나를 일컬어 ‘촌스럽다’고 평하셨다.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아니까 좋았다. 촬영장에서는 감독님이 나에게 우직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며 더 영악해져도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도 감독님이 촌스러워서 좋다. 감독님은 나보다 더 촌스럽다.(웃음) 인간적으로는 쓸데없는 감정의 허세가 없고 영화를 보면 앵글의 허세도 없으며 일부러 멋 부리지도 않는다.
개봉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 논란에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나 역시 진짜 속상했지만 일단 이런 상황에선 자기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더 잘했더라면 더 많은 관객이 인정해주었을 텐데.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도 사람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감독님은 요즘 계속 고전을 읽으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인데 종종 인상적인 문장을 보내주신다. 무대인사를 다니면서는 우리끼리 있을 때 농담도 더 많이 했는데 실은 다들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 내 새끼 같은 작품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드니깐. 솔직히 나는 흔들리지 않기 위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나마 찾은 방법이라면 <군함도>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 것이다. 관객 옆에서 반응을 보고 모니터링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그냥 계속 봤다. 몇 번이고 다시.
영화에 대한 논란 중에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뭘까? 그렇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겠냐마는, 모두 죽을 듯 살 듯 덤비다시피 작업한 작품이라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내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 평가를 정답과 오답으로 나눌 수도 없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뿌듯했던 순간도 있다. 마지막 무대인사를 간 곳이 춘천이었는데, 춘천은 <군함도> 촬영의 90% 이상이 이뤄진 곳으로 무대인사는 처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충분히 했어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극장을 찾아주신 관객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그렇지. 영화가 더 잘됐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군함도에 대해 많이 알릴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라는 얘기를 나눴다. 물론 상업 영화의 가치는 많은 관객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미라도 남긴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또 이런 순간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삼척에 놀러 갔는데 그때도 혼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감사하게도 내가 찾은 상영관이 꽉 차 있었다.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계속 ‘아이고, 아이고’하며 보시고 그 아주머니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에고, 나쁜 놈들’ 하며 보시더라. 신선하고 고마운 경험이었다. 영화란 게 분명한 산업이고 어떠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영화적인 여러 다양한 요소를 섞어야 하는 건데 많은 비난을 받으니까 영화라는 매체로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내년 이 맘때면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좀 더 정리가 되려나?
실은 영화의 흥행이 예상 밖으로 저조해서 이번 인터뷰에 더 나서지 않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거야 사실이니까.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끄러운 작품이 아니다. 열과 성을 다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아쉬움이 있을 뿐. 나는 이경영 선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경영 삼촌이 보내주신 문자를 캡처해뒀다. 그걸 자주 본다. 삼촌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연기를 하신 분이니까 주옥같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나는 아직 젊은 배우고 할 게 많으니 배우의 길을 길게 봐야 하지 않겠는가.
<늑대소년>의 소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보호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반면 ‘무영’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다. 결의 차이가 꽤 크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인데 이번 영화를 보시고 지금껏 내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공감한 역할이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 왜냐고 물었더니 ‘난 네가 활동하는 모습이 다 좋았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네 모습에 깊이 공감했어. 지금까지 네가 꽃미남이었다면 이제야 좀 연기를 더 하고 싶어 보였어. 그렇게 또 시작하면 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뭉클하더라. 길지 않은 영화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군함도>는 결이 많이 다르다. 앞으로 작품을 선택하는데 이번 영화가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소년’이 아니라 사람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리더’ 격이었으니 현장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을 것 같다. 뭐랄까. 선수 중의 선수들이 모인 현장이었다. 그분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끓어올랐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분들에 비해 경험이 턱없이 적은 나에게 그곳은 배움의 터였다. 그래서인지 현장에 가면 한결 진지해졌다. 촬영하러 가는 길이 학교에 가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하나 더 배우고 싶은 현장이었다.
송중기의 외모에서 상처투성이 ‘무영’의 얼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잘할 수 있고 잘 어울릴 것 같은 역할과 자신감에 비해 욕심을 부리고 싶은 역할 사이에서 어떤 걸 선택하는 편인가? 시나리오를 택할 때마다 늘 그 기로에 선다.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고 나에게 맞는 것을 되풀이할까, 아니면 새로운 것을 해볼까. 나는 그 선택을 색에 비교하곤 하는데 가령 내가 원래 가진 색이 파란색이면 빨간색으로 바로 가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해도 변화하고 싶은 욕심과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군함도>의 ‘무영’이 파란색이었다면 빨간색으로 가기 전에 초록색에 갔다가 노란색으로 가서 주황색, 그다음에 빨간색이 되어야 한다.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확 변해버리면 관객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빨간색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걸 해내고 싶다. 아직 그 고민의 답을 찾지는 못했다. 어떤 작품이 맞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래서 요즘 선배 배우들을 만나면 선배들 얘기를 많이 듣는다. 선배들은 어땠는지.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색으로 채우고 싶나? 빨주노초파남보보다는 후회 없는 선택으로 채우고 싶다. 작품의 흥망과 상관없이 이유가 확고하니 선택했을 것이고, 긴 세월이 지나 돌아봤을 때 ‘그래, 내 선택이 맞았어’라는 작품이 쌓여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 앞서 빨주노초파남보를 이야기했지만 그건 사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한 모습이다. 스스로의 만족도를 따진다면 선택에 후회 없는 작품을 많이 갖고 싶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을 수야 없겠지. 그래도 후회가 없다면 조금이나마 덜 아쉬울 것 같다.
지난 인터뷰에서 언젠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를 김민기의 ‘봉우리’에 빗대 말했다. 그 뒤로 나도 종종 ‘봉우리’를 듣는다. 가사를 되새기게 하는 곡이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지난번 인터뷰 내용을 캡처해 보내면서 취향이 왜 그리 나이 든 사람 같으냐고 놀렸다.(웃음) 어제도 ‘봉우리’를 들었다. 노래에 보면 ‘나는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거긴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그럼 또 다른 봉우리로’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인생의 모습과 잘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해질 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내 다음 봉우리는 무엇일까? 결혼이 될 수도 있겠다. 전에는 나는 배우니까 다음 봉우리는 당연히 어떤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봉우리가 굳이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올라가서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다. 아직은 다음 봉우리를 찾지 못했다. 내가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이 하나 먹으며 계속 걷는 중인 것은 맞다.
배우로 더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나?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해보고 싶다. 많은 선배들이 먼저 이뤄놓은 ‘한류’라는 공간 안에 나도 조금이라도 들어서게 되었으니 좀 더 확장해 다른 문화권의 현장도 경험하고 싶다. 가장 함께하고 싶은 감독님이 이안 감독님인데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많이 다르고 현장 분위기도 다를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대중은 송중기라는 배우가 정의롭고 바르길 기대한다. 그런 점이 부담도 될 테고 뭔가를 선택할 때 걸림돌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엄청. 그런 기대가 없으면 좋겠다.(웃음) 선택할 때 그런 시선이 장애가 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남들에게 보이는 직업이다 보니 당연히 신경 쓰인다. 부담도 크고. 내가 박보검에게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있다.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마라, 다 짐이 될 수 있다. 착하다는 이미지가 배우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제 보라색으로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할 수도, 주춤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뜨거웠던 20대를 지나 30대에 들어섰다.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세월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의 내가 더 기대되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다행인 건 불안보다 기대감이 더 크다는 거다. 당장 내년, 내후년보다는 30대 후반의 내가 어떤 역할로 어떤 무대 위에 서있을지 궁금하다. 어떻게 세월을 보내야 할지 찾고 있다. 요즘 문득 30대의 사춘기가 온 것 같다. 결혼하고 사춘기가 오면 안 되는데 어쩌지.(웃음)
당신의 전성기는 지났는가, 아니면 앞으로 올 것 같은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점을 찍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기준으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의 정점은 아직 찍지 못했다. 어느 시점에 정점이 왔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다만 그때가 온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 정점이란 정말 뭘까? 선배들과 술을 마시며 한번 얘기해봐야겠다.
지난 인터뷰 때와 같은 질문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지금의 송중기는 행복한가? 심하게 행복하다. 지난 작품을 생각하면 속상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 행복하고 뿌듯하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큰 결정을 한 시기이기에 행복하다. 그녀가 있어서 행복하고. 인생의 아주 행복한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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