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배우 김고은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통기타를 치며 ‘소격동’을 부르는 동영상을 본 적 있다. 연쇄살인범과 싸우는 미친 여자, 복수를 위해 검을 휘두르는 여인, 빛보다 어둠에 익숙한 삐딱한 여고생, 혹은 도깨비의 신부까지,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영상 속 김고은에게는 작품에서 보여준 그 어떤 모습도 없었다. 다만 슬렁슬렁 동네 산책을 나온 듯 편한 옷을 입고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작품이 아닌 다른 곳에서 김고은을 보기란 흔치 않다. 가끔 개인 SNS로 전하는 근황이 전부인데, 얼마 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 촬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는 드라마 <도깨비>가 끝난 후 하는 오랜 만의 인터뷰였다. 그렇게 대중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동안 그녀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배우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편한 차림으로 친구들을 만나거나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지우고 자신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며 자유롭게, 그렇게.
지난해 11월에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이 크랭크업했다. 촬영이 주로 변산 지역에서 이루어졌겠다. 부안과 춘천, 두 곳에서 촬영했다. 촬영 일정이 빡빡하지 않은 편이라 여유로웠다. 작품을 위해 7kg 정도 살을 찌웠는데, 그래서 더 행복했다.(웃음) 주로 걸으며 이동했고 틈틈이 동네 맛집도 찾아다녔다. 어느 가게에 가면 배우들이 있고, 또 멀지 않은 곳에 감독님이 있고 그랬다. 촬영장이 마치 동네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곳처럼 편했다.
지금까지 주로 배우 윤여정, 김혜수, 전도연처럼 대선배와 작업했는데 이번에는 선배이긴 하지만 또래에 가까운 배우 박정민이 상대역이니 현장에서 책임감이 달랐을 것 같다. 이준익 감독님이 현장을 워낙 편하게 이끌어주었다.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겁지 않았고 함께한 배우와 스태프 모두 친구처럼 편하게 마음을 열고 즐기며 촬영했다. 위안과 치유가 되어준 촬영장이었다.
영화 <몬스터>나 <협녀, 칼의 기억> <차이나타운>에서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필모그래피를 어떤 식으로 채워야겠다는 자신만의 목표가 반영된 건가? 데뷔하고 4, 5년 동안은 필모그래피의 방향을 생각했다기보다는 좋은 선배님들과 작품을 하며 성장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배우로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잘하는 것만 좇다 보면 관객이 나에게 다른 것을 기대할 때 용기 있게 도전하기 어렵지 않겠나. 그래서 신인 배우일 때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에게 더 냉정하고자 했고 스스로를 끝으로 몰아갔다.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데 대한 책임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배우인데 연기를 형편없이 할까봐 두려웠다. 물론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동안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을 주로 선택해왔다. 그런 작품들에 눈길이 많이 가는 편인 것 같다. 제안받은 작품 중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했는데 돌이켜보니 여성 캐릭터가 극의 중심이 되는 작품의 비중이 높았다. 아마도 그런 작품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어느 작품이던 현장에 가는 건 즐겁고 연기하는 것도 참 재미있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뭘 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실은 그때그때 눈길이 가는 작품이 다르다. 작품을 제안받은 당시의 내가 느꼈던 무언가가 그 작품에 담겨 있으면 운명인 것 같고 그렇다. 하지만 늘 변치 않는 기준도 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욕심나더라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작품은 선택하지 않는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데 여전히 두려움이 없나? 없다. 그래도 이제는 안전한 선택과 도전을 좀 번갈아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껏 ‘용감하게’에만 초점을 맞춰 선택해온 건 아니다. 다만 도전해보고 싶었고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인가? 일상과 일을 분리하려고 노력한다. 친구도 많이 만나고 많이 돌아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즐기고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할 수 있는 걸 다 하며 산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드라마 <도깨비>가 워낙 잘돼서 얼굴을 많이 알아봐주신다. 그런데 그런 시선에서 빗겨 서려고 나 자신을 꽁꽁 싸매기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자연스레 내 행동이 자유로워진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거나 힘들지 않다. 화장도 하지 않고 트레이닝복에 점퍼만 걸치거나 어떤 때에는 머리도 감지 않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면 오히려 친구들이 그렇게까지는 하고 다니지 말라고 한다.(웃음)
애써 배우의 삶과 김고은의 삶을 분리하려는 이유가 있나? 그렇지 않으면 더 힘들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다보면 더 고립된 삶을 살게 되지 않겠나. 나 자신을 자 유롭게 두고 일상을 영위해야 작품에 들어갈 때 더 큰 에너지가 생긴다.
돌이켜보면 데뷔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나? 최근에 감정적으로 힘든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은 힘들다는 감정이 사치라고 여겼던 거다. 나를 어르고 달래가며 살아야 하는데 자신을 다그치며 쉬지 않고 연기하며 지내온 시간이 힘든 감정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내면을 돌보고 잘 들여다볼 것이다. 내 인생의 모토는 ‘행복하게 살자’니까.
배우를 시작했을 때 꿈꾼 모습과 오늘의 김고은이 닮은 점이 있는가? 닮았다. 무언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쭉 해왔다. 배우이기 때문에 특정 이미지를 고수할 필요도 없고 어떤 식으로 비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만 작품마다 다르게 보이면 좋겠다. 배우라는 직업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다.
김고은이라는 배우는 언제나 청춘이 어울린다. 세월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나의 얼굴과 말투, 태도에 모두 묻어났으면 한다.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런데 부모님에게는 늘 아이같이 어리광 피우는 막내딸이고 싶다. 얼마 전에 강아지를 데리고 엄마와 함께 운동장에 갔는데 엄마가 강아지더러 뛰는 모습이 꼭 표범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내가 표범 흉내를 냈다.(웃음) 그랬더니 엄마가 언제까지 아이처럼 그럴 거냐고 웃으며 말하길래 중년이 되어서도 그럴 거라 답했다. 괜스레 서운하기까지 했다. 부모님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도 막내딸이니 영원히 막내딸이고 싶다. 그것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부모님과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도 없다. 맞다. 너무 사랑하는 존재다. 얼마 전 조카가 생겼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치도록 예쁘다.
자신이 가장 빛날 때는 무엇을 하고 있을 때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내가 은근히 웃긴다.(웃음) 농담을 하거나 재미있는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숨도 못 쉴 만큼 웃으면 뿌듯하다. ‘아, 나 역시 안 죽었네’ 이러면서.
당신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 궁금하다. 삶이 아무리 치열하고 각박하더라도 나 자신이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숨 쉴 구멍을 열어두며 살려고 한다. 난 옷도 내추럴하면서 멋스러운 게 좋다. 옷장에 옷도 많지 않은데 지난번 유니클로 광고 촬영 때 입고 간 내 옷을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 산 유니클로 청바지였다. 10년, 20년이 지나도 근사한 옷이 좋다.
이번에 모델로 활동하게 된 유니클로의 옷을 영화 관련 행사 때도 입어 화제가 된 적 있다. 평소 즐겨 입던 브랜드의 모델이 되어 기분이 특별할 것 같다. 영화 제작 보고회에 참석하기 위한 의상을 준비하는데 베이식한 화이트 터틀넥 니트 스웨터라면 심플하면서도 멋지게 스타일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도 큰 고민 없이 선택했다. 옷 자체의 화려한 디자인만으로 평가하거나 브랜드를 보고 옷을 고르기보다는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어울리는 옷에 끌린다. 평소에도 유니클로에 대해 내 옷장 안에 있는 옷들과 잘 매치할 수 있는 옷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무엇보다 소재가 좋다.
<마리끌레르> 코리아 창간 25주년 기념호를 위한 촬영이다. 스물다섯의 김고은은 어떤 모습이었나? 음, <차이나타운> 때였다. <차이나타운>은 정말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감독님과 스태프들, 그리고 김혜수 선배를 비롯해 함께한 배우들과 합이 너무 좋았다. 내가 심각한 영화를 이렇게 즐겁게 찍어도 되느냐고 말했을 정도로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올해는 어떤 작품의 당신을 보게 될까? 우선 <변산>이 개봉할 테고 작품을 하게 된다면 좀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아직 좀 막연한데 스토리 중심의 작품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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