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꽤 지난 일이지만, 지난해 배우 박민영이 보여준 <7일의 왕비>의 ‘채경’은 짙고 무거운 슬픔을 품은 인물이었다. 웃기보다 울 때가 많고 행복하기보단 마음 아픈 순간이 많았던 채경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박민영은 자신의 온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너무 안쓰러운 아이’라 유독 마음이 많이 갔고, 고단했던 채경의 삶을 떠나보내기까지 시간도 많이 필요했다. 그렇게 소진한 체력과 마음이 평소대로 돌아오기까지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보통 드라마 한 편을 끝내면 일주일 정도 잠만 자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회복하는 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래도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냈다는 반증이니 한편 기분이 좋기도 했어요. 지금은 아주 좋아요. 체력이 많이 올라왔고, 마음도 단단해졌고요.” 연기를 하지 않는 시간을 채운 것 중 하나는 여행이다. “미술을 좋아해서 그림 보러 가는 여행을 좋아해요. 화가 한 명을 정해서 어느 도시의 아주 작은 미술관부터 도는 거죠. 이를테면 반 고흐라면 초기 작품이 있는 미술관부터 그가 죽기 직전 머물렀던 마을까지 여행하는 거예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여행도 좋아요. 예쁘게 플레이팅된 요리를 보는 것도 좋고요. 한국에도 아름다운 곳이 많죠. 여행지는 어디든 좋은 영감을 줘요.”
지난 작품을 잘 떠나보내고 여행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채운 후 오랜만에 화보 촬영에 나선 박민영은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미소’를 막 만난 참이었다.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는 첫 리딩을 앞둔 그녀는 좋은 기운으로 가득 차 보였다. “화사한 봄을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설레요. 그런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저를 기분 좋게 자극해요.” 그녀가 연기하게 될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미소는 10년 동안 비서로 일하며 ‘비서계의 레전드’라 불릴 만큼 능력이 뛰어나고 책임감도 강한 인물이다. 하지만 일에 파묻혀 살던 어느 날, 자신의 삶이 사라져버렸다는 회의감이 들어 자아를 찾기 위해 일을 관두려고 한다. “하루는 미소가 은행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야 할 곳에 이름 대신 ‘김비서’라고 적어요. 자신의 이름보다 직함이 익숙할 만큼 일에 묻혀 산 거죠. 제 또래 많은 여성이 공감할 고민을 가진 인물이에요. 일에 빠져 살다 보면 나 자신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잖아요.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어요. 과연 배우의 길이 내 길인가 하는 고민이요. 돈을 벌기 위한 길인지 아니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길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죠.” 좀처럼 답을 찾지 못할 때면 자신을 잘 들여다보았다. “모든 걸 비우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요. 그때마다 대답은 ‘촬영장에 있을 때’였어요.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 연기를 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했죠. 가장 행복한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부수적인 스트레스는 받아들여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단 일주일 동안 왕비로 살았던 비극적 운명의 ‘채경’과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으며 살아온 ‘미소’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지난 작품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제가 연기한 인물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역할이죠. 자신감 넘치고 능동적이며 자존감도 높은 인물이에요. 처음으로 할 말을 하는 사람을 연기하게 된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면 엄청난 대사량이에요. 촬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사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연습을 열심히 하는 중이에요.”
새 드라마에 앞서 그녀의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이 찾아온다. 5월에 첫 회가 방송되는 넷플릭스의 <범인은 바로 너>에서 박민영은 사건을 해결하는 일곱 명의 탐정 중 한 명이 된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자기 옷에 걸려 자꾸만 넘어지는,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박민영이 아니라 현실의 박민영이 그곳에 있다. “첫 촬영 때는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엄청 긴장했어요. 그런데 두세 번 넘어지고 나니까 다 내려놓게 되더라고요.(웃음) 열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지는데 하나의 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열 개의 작은 사건을 해결해야 해요. 모두 연관이 있는 사건들이죠. 에피소드마다 카메오도 많이 출연하고 볼거리도 다양해요. 제가 셜록 홈스 마니아여서 추리를 잘 해 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웃음) 수학 문제가 나오는 순간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그냥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게 될 거예요.” 10년이 넘도록 필모그래피를 쌓는 동안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박민영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20대의 그녀였다면 예능 프로그램을 선택하지 않았겠지만 30대의 그녀는 선택했다. “과거에는 이상한 아집이 있었어요. 배우는 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굳이 잘하지도 못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그들의 영역을 범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제게 맞춰야 한다면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른이 넘으니 저 자신이 즐거우면 다른 사람도 즐거울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범인은 바로 너>에 함께 출연하는 (유)재석 오빠가 저더러 예능 계속 하라는 말도 했어요.(웃음)”
그렇게 세월이 쌓일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넓어지고 있었다. 2018년의 박민영이 보여주는 세계는 아마도 좀 더 넓고 다채로울 것이다. 다만 앞으로 지금까지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가치관이 있다. “정직하게 살며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거예요. 전 딸이라고 딱 정해놓았어요.(웃음) 지금의 저와 엄마의 관계가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꼭 딸이 있었으면 해요. 지금처럼 흔들리지 않고 연기하며 정직한 사람으로 살 거예요.” 아직 한해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건 올해의 마지막 날은 지난해의 마지막 날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웃고 있을 것 같아요. 올 한 해 열심히 달릴 테니까요. 떠나보내기 아쉬울 만큼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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