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연극 <비평가>

배우 백현주

BIFF 백현주

블랙 레더 재킷과 안에 입은 니트 톱 모두 자라(ZARA), 데님 팬츠 문탠(Moontan), 메탈 오브제 장식 로퍼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MICHAEL Michael Kors).

극단 한강에서 연극배우로 연기를 시작했다. 연극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사건이 있었나? 고등학교 때 성당을 다녔는데, 거기서 한 성탄절 연극이 처음이었다. 그때 담당 교사가 꽤 의욕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교의 연극 동아리 멤버였던 것 같다. 성탄절이라고 굳이 마구간 배경으로 예수님 나오는 극을 해야 하냐면서 <방황하는 별들>이라는 작품을 하자고 하더라. 처음에는 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무대에 오르게 됐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다른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커튼콜의 기억만 선명했다. 공연이 다 끝나고 조명이 밝게 비춰지는데 내면에서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올라왔다. 이걸 한 번만 더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달라진 게 없었다. 잠깐 배우를 꿈꾸긴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연영과를 지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한 친구가 연극반에 놀러 가자며 날 이끌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역할을 맡았고, 못 이기는 척 또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엄마도 좋아하진 않으셨지만 대학 생활에서 한 번쯤 경험하는 건 나쁘지 않겠다며 허락해주셨는데, 그 후로 지금까지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웃음)

그때부터 배우의 길을 걸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건가? 그건 2학년 때부터였다. 1학년 때는 ‘한 번만 더’라는 생각이었다. 2학년 때 선배가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을 한 적이 있다. 한 가족 이야기였는데, 작품 속에 나오는 순간과 비슷한 상황을 우연히 집에서 맞닥뜨린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연습한 대사를 내뱉었는데,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연기를 좀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을. 그리고 대학로에 나와 연기를 한 지 벌써 27년이 됐다.

그렇게 배우가 되어 연극 무대에 오른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연극을 하면서 커튼콜의 전율을 느끼고 있나? 이제는 그런 순간들이 훨씬 더 이르게 찾아온다.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리허설 중에, 무대에서도. 사실 이제는 그런 뜨거움이 없어도 할 순 있다. 직업이란 게 그렇지 않나. 오랜 숙련 과정이 있으니까 그냥도 가능하지만, 여전히 그런 뜨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좋다. 그래서 연극이라는 장르를 못 놓는 것 같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대본을 받았을 때 그런 느낌이 나면 좋다.

지금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연기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세 가지 매체를 오가며 연기를 하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는 이유가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다 잘 몰라서다. 처음 영화를 제안받을 때만 해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 선배가 영화를 해보라고 추천했는데 단번에 안 한다고 했다. 아마 연극이 아닌 다른 매체에 대해서는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선배가 네 생각이 맞는지 일단 해본 다음 다시 생각해보라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 해보니까 너무 다르더라. 연극을 할 때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클로즈업 신이 되기도 하고, 풀 숏이 되기도 했는데 영화는 그게 내 선택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 뭔가 재미가 덜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그때부터 영화를 알아가고 싶어서 1년 반 정도 단편을 했다. 드라마도 그렇게 강력한 의지로 시작한 건 아니다. 어느 날 캐스팅 디렉터가 ‘혹시 드라마 할 생각 없어요?’라고 물었고, 그 작품이 <송곳>이었다. 그렇게 지금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 모두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완벽히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없다. 어디서든 그저 나는 연기를 할 뿐이다.

지금까지 해온 작품 중 가장 내 것이다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 글쎄.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할 만한 작품이 있나? 반대로 그게 아닌 작품이 있나? 20대 때는 어떤 캐릭터를 맡으면 그 사람이 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그게 연기인 줄 알았다. 어떻게든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각하려고 기를 쓰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마 20대인 나에게 물어봤으면, 모든 작품이라고 답했을 거다. 그런데 30대는 좀 달랐다. 그동안 만든 나의 무기들을 여러 방식 으로 시도해봤고, 캐릭터마다 다른 색을 입히기도 했다. 그런데 30대 후반에 그런 나의 연기관이 무너지는 순간을 겪었다.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 아주 오래된 친구가 한 말 때문이다. ‘현주야, 너 연기 되게 잘하더라. 그런데 나는 네가 옛날에 했던 연기가 훨씬 좋다’라는 말이었다. 아마 그 친구가 말한 건 기술이 아니라 진실성에 대한 얘기였을 거다. 그게 나를 굉장히 긁었다. 그동안 내가 한 연기가 전면적인 부정을 당한 느낌이었다. 진행하던 연기 수업도 쉴 만큼 내적인 충격이 컸다.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동안은 공연 전에 떨리는 것도 없었는데, 다시 대본 리딩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게 숨이 안 쉬어질 만큼 떨렸다.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30대의 나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아마 없다고 답할 거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 묻는다면 20대에 한 작품, 30대에 한 작품, 그리고 마흔 살이 지나서 한 작품 중에 조금씩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굳이 하나만 꼽으라면 극단 한강 사람들과 공동 창작으로 만든 연극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다. 일본군 위안부 얘기였는데,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신체 훈련만 하루에 4시간씩 하고 대사가 없는 무언 즉흥만 한 달 반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소리 내 대사를 뱉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얘기를 하는 경험이 선명했던 작품이었다. 하면서 내가 연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배우로만 3년을 붙들고 있었으니 그 작품 어딘가에는 내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연기에 관해서는 더 이상이란 게 없을 정도로 완성된 배우라는 시선이 많다. 부담이 많이 된다. 부담이라는 건 누군가의 기대 때문이기도 하고, 동료 배우가 조심스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어쨌든 어려울 때가 있다. 같이 연기를 할 때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편히 하면 되는데 동료 배우들이 조심스러워할 때가 있다. 또 반대로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을 때가 있는데, 뭘 더 하면 연출이 곤란해질까 봐 못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얘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작품을 하고자 한다. 또 하나는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인가. 아직도 나는 안 해본 특이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편이다.

반대로 안 하게 만드는 요소도 있을까? 노출.(웃음)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 사람이 우스워질 때라고 해야 하나. 장르에 상관없이 캐릭터가 도구적으로 쓰이는 작품은 손이 안 간다.

여성이라는 키워드도 영향을 미치나? 그렇다. 그건 내 문제기도 하니까. 여자로 살아온 시간들이 있으니까 어떻게 그려지는지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순 없다. 국내 상업 영화 중에 백델테스트(영화의 성평등 평가 방식)를 통과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 기준이 아니더라도 여자이고 배우인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인물이 가치가 있어지는지 잘 모를 때는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은 거다. 혹은 하고 싶지 않거나. 이 문제에 대해서 특히나 여자 작가들을 붙들고 계속 얘기했다. 제발 작품 쓸 때 사람 같은 여자를 그려줬으면 좋겠다고. 엄마, 소녀, 창녀 말고 그냥 인간으로서 여자가 왜 없냐고. 그런데 글을 쓰는 친구 하나가 자기도 그러고 싶었고, 그럴 줄 알았는데, 글을 쓰려고 봤을 때 주변을 보면 여자가 안 보인다고 말하더라. 네 주변이 다 여잔데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연극이나 예술 하는 쪽에는 많을 수도 있지만, 어떤 얘기를 그리려고 보면 그 일을 둘러싼 주변 인물 중에 여자가 없다는 거다. 좀 답답했다. 배우로서도 그렇지만 아직도 이쯤에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어쨌든 뭔가 다른 게 있었으면 한다.

지금 작품을 만드는 이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쓰는 분들은 어려울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엄마가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준영이 엄마나 현수 엄마처럼 누구여도 상관없는 그런 엄마 말고, ‘엄마라면 다 그렇지 않을까. 엄마라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말고 그 사람에 대해서 그렸으면 한다. 사실 남자 배역 중에도 그런 게 있다. 이 과장, 김 대리. 여자 남자 떠나서 그런 인물은 없다는 생각이다. 일반 말고 한 사람의 개성이 있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인물로 그려줬으면 한다. 그리고 참을성 없는 여자도 많고, 기다리는 거 잘 못하는 여자도 있고, 하고 싶은 거 많은 여자도 있으니 가능하면 어떤 욕망이 있는 여자도 그려주면 좋을 것 같다.

이 주제로 비춰봤을 때 <60일, 지정생존자>는 어떤 의미가 있었나? 연기한 기록비서관 민희경 역은 50대로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나이를 드러내거나 여성성을 나타내는 역할은 아니었다. 사실 <60일, 지정생존자>는 작품이 가려고 하는 방향이 흥미로워서 하게 된 거다. 역할에 대해서는 처음에 살짝 기대한 것들이 있긴 했는데, 워낙 많은 인물이 나와서인지 쉽진 않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정원 한나경 요원(강한나 분), 야당 대표인 윤찬경(배종옥 분), 청와대 출입기자 우신영(오혜원 분)을 제외하고는 청와대 내 스태프 중 여자는 딱 3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한 명은 더 있을 법도 한데, 이 성비가 한국 사회인가 싶어서 조금 속상했다. 그래도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과 우리가 잘 버티자면서 촬영을 했다.

<60일, 지정생존자>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졌다. 예전에 아침 드라마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시장이나 마트 갈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봤다. 그래서 한동안 수영장을 못 갔다.(웃음) 그 드라마의 열기가 식고 난 이후에는 어딜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번에 <60일, 지정생존자> 역할에 메이크업이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생얼로 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더라. 아차 싶었다. 나는 연기는 연기대로 하고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게 제일 좋은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작품마다 스타일의 변화가 과감하다.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주저함이 전혀 없는 것 같다. 6개월동안 같이  일한 드라마 스태프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선배님, 이 작품도 하셨어요?’라고 하긴 하더라.(웃음) 물론 나에게도 쉽사리 도전하기 힘든 스타일은 있다. 섹스어필을 해야 하는 캐릭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 외에는 크게 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럴듯하게 분장을 해주면, 다른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예전에 단편 찍으러 다닐 때 노숙자 역할을 한 적이 있는데, 화장실에서 환복하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나와 부딪히기 싫어서 길을 터주더라.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람이 자기가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걸 크게 겪은 거다. 외형에 변화를 주는 것도 그 인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와 지금, 가장 많이 변한 게 있다면? 체력과 기억력. 옛날에는 머릿속에 모든 페이지가 들어와 있었는데, 요즘은 쉽지 않다. 그리고 연기를 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전에는 그 인물과 똑같아지려고 애썼다면 지금은 그 인물의 제일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그 인물이랑 친해지면 사람들이 비슷하게 보지 않을까. 나는 그 인물에 대해 대신 얘기해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연기한다.

보통은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에게 하는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은 무엇인가? 해보고 싶은 거 굉장히 많다. 내 화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언변을 구사하는 인물도 해보고 싶고, 겁이 많아서 공포물을 못 해봤는데 그런 것도 하고 싶다. 어쨌든 사람들이 그 인물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그러면서 새로운 역할을 맡고 싶다.

혹시 배우로서 가지는 유토피아가 있을까? 나다운 걸 아직 가지고 들어가본 적이 없다. 백현주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 다른 것들을 내려놓고 툭 거기 있어도 되는 그런 역할. 오랜 시간을 들여서라도 해보고 싶은 나만의 목표다.

BIFF 백현주

그레이 울 블레이저 코스(COS), 블루 데님 팬츠 렉토(Recto), 레더 스트랩 시계 펜디 워치(Fendi Wa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