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100년을 기념해 <마리끌레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판> 인터뷰를 함께한 배우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 영화와 한국 영화 속 한 장면에 대해 물었다. 많은 작품이 떠오른다던 전도연은 불쑥 <접속>이라고 답했다. 좋아하는 장면은 한석규와 본인이 스치며 엇갈리는 장면. 22년 차 배우 전도연은 자신의 첫 영화를 골랐다. <접속>의 이 장면은 한국 영화 100년 기념 사업에서 꼽은 ‘최고의 명장면’이기도 하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영화 속 전도연을 기억한다. 그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도연은 수많은 인물이 되어 우리 곁에 왔다. 올해 영화 <생일>에서 연기한 ‘순남’은 메마르고 건조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참고 참았던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울분으로 토해낸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파일 만큼 아픈 엄청난 고통. <무뢰한> 속 ‘혜경’은 살고 싶지 않은 얼굴로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 한다.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소박한 한 끼를 누군가와 나누는 보통의 삶. 하지만 이마저 절망으로 끝난다. <남과 여>의 상‘ 민’은 많은 것을 버리고 선택한 남자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차가운 눈밭을 바라보며 오열한다. <인어공주>의 ‘연순’은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우리 모두의 추억 속 한편에 그런 모습이 있기를 바랄 만큼. 전도연이 연기하는 모든 감정은 단순히 희로애락이라는 네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자신으로부터 여전히 새로움을 찾아내고,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며 수많은 감정을 우리에게 각인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가 아직 미처 보지 못한 감정과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다. 전도연이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의미가 더해질 것이다.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생일>은 인터뷰와 홍보를 위한 자리가 다른 작품보다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모든 것이 지난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나? 지금에와서 드는 생각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건 아니었나 싶고 그래서 약간 아쉽기도 하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상처를 들추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 어렵게 접근한 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하는 말이지, 그 시간을 다시 보내더라도 조심스러울 것 같다.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처음엔 고사했다. 그런데 왜 마음을 바꿨나? 쉽지 않은 이야기고 무척 고통스러웠다. <밀양>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밀양>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 그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을 품고 사는 인물을 연기했고 그만해도 될 것 같았다. 이후에 그런 작품을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고. 그래서 <생일>의 시나리오가 무척 좋았음에도 거절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놓지 못했다. 이종언 감독이 <밀양>의 연출부일 때 인연이 있던 터라 내가 영화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출연을 거절한 후에도 계속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더 작품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시간을 돌아 돌아 내게 다시 왔을 때 이건 피해갈 수 없는, 운명 같은 작품이라고 여겼다.
<생일>이 개봉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 곧 개봉한다. <생일> 촬영이 끝나자마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촬영에 들어갔는데, 편집이 많이 필요한 작품이어서 개봉이 좀 늦춰졌다. 일을 너무 오래 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체감상. 일하지 않을 때는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하지 않을 때도 물론 아이를 돌보거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데, 이럴 때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억울한 건 아니다. 그런 시간도 마땅히 내 일부지만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전작들과 결이 많이 다르다. 다르다는 점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한가? 결이 많이 다르다. 이야기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많은 인물이 돈 가방 하나를 두고 쫓고 쫓기는, 이야기만으로는 아주 심플하다. 상황과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여서 전작들과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시나리오도 아주 매력적이고. 또 하나 큰 차이는 많은 인물이 얽히고설켜 있는 점이다.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많은 인물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시나리오상에서는 내가 극의 중반 이후에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여러모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 같다. 여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편인가? 작품에 대해서는 그렇다. 사실 자연인 전도연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고 아주 작은 변화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런데 작품을 선택하거나 영화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화보를 찍는 등 일할 때는 새로운 모습을 발굴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내가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작품 속에 전도연이란 배우가 들어갔을 때 감독과 작품의 영향을 받아 내가 이전과 다른 모습이 되길 원한다. ‘내가 바꿀 수 있어’ 하기보다는 촬영장의 모든 요소와 섞였을 때, 어떤 감독을 만났을 때, 감독이 나에게서 어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지 기대한다. 같은 전도연이라도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지 않나. 이번 작품에서도 김용훈 감독이 바라본 전도연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올해 개봉하는 두 작품 모두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다. 감독의 이전 스타일을 알 수 없으니 접근 방식이 다를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해왔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나도 잘 몰랐기 때문에 함께 만들어갔다면 지금은 그때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신인 감독과 작업할 때는 어떤 단편을 찍었는지, 작품에 대한 정서적인 부분이 얼마큼 비슷한지 알아두려고 한다. 현장에서 처음부터 맞춰가려면 힘드니까. 어쩌면 신인 감독에게 나라는 배우는 조금 어려운 선배일 수도 있다. 나는 서로 이해하기 위한 소통이라고 생각하지만, 감독은 전도연의 입장 혹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의견을 낼 때 조금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말하기보다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많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촬영에 들어가면 장면에 대한 디테일한 부분을 상의한다. 내가 영화에 데뷔한 작품이 1997년작인 <접속>인데, 그때 내게 감독은 하늘 같은 존재였다. 감독의 말은 모든 것이 정답이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여전히 나이나 경력과 상관없이 어떤 감독과 작업하더라도 그런 자세로 대하게 된다. 내가 존중해야 할 존재. 나는 좋은 자세를 가진 배우다.(웃음)
영화 <접속>이 개봉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리고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쌓아온 그 시간은 고스란히 관객의 기대가 담긴 무게감이 되었을 법하다. 때론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건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대한 평가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담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 나는 오히려 앞으로 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거지. 나는 과거에도 전도연이었고 지금도 전도연이며 앞으로도 전도연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다.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내가 그동안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않다. 좀 더 다양한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은 생각을 좀 비우고 보다 가벼운 작품,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나 스스로 감독과 작품에 더 의존적이길 바란다. 그렇게 나를 맡기고 작품 속에서 달라지는 나를 보여주고 싶다.
배우의 길에서 전환점이 된 작품은 뭔가? 배우가 되게 해준 건 <접속>이고, 스스로 ‘아, 나는 배우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준 건 <해피엔드>이며 배우로서 영화 인생의 두 번째 스테이지에 오르게 해준 건 <밀양>이다. 지금은 그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 세 번째 스테이지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세 번째 스테이지는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일 수도 있고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지 내게는 의미 있다.
한발 물러선다는 건 무얼 의미하나? 나는 물러선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전도연이 왜?’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선택. 항상 안정적이기보다는 뭔가 소음이 따라다니는 배우이고 싶다. ‘잘했겠지’ 하기보다 ‘저기에서 좀 이상하지 않아?’ 하는 소음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이야깃거리가 끊임없이 나올 수 있는 배우이고 싶다.
지난 20여 년의 시간 동안 전도연은 늘 배우였다. 그 시간 속 전도연의 배우라는 길에 대한 생각은 늘 한결같았나? 글쎄, 배우로서 내가 어떻게 변하고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에 더 애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 일과 배우 전도연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응원하며 좋은 작품을 끊임없이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계속 이렇게 연기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연기란 어떤 재미가 있기에 이토록 에너지가 계속 생겨나는 걸까? 내가 하는 연기가 재미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현장을 너무 사랑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사랑한다. 항상 신기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마음으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는지. 경외감이 들 만큼.
오랜 시간 연기를 해왔는데도 여전히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나? 항상.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그 인물을 모르고 놓칠까 봐 두렵고, 그래서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정답은 없지만 그 인물을 잘 담아내고 있는지 의심하고 고민하며 계속 생각한다.
그 의심과 고민이 확신으로 결론을 맺나? 확신은 없다. 배우란 결국 다른 인물이 되는 일인데, 한 인간에 대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나 자신에 대한확신도 없는 걸. 단지 내 생각을 믿고 싶을 뿐이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작품을 고를 때 시나리오를 보고 선택한다는 것. 보는 시각은 달라졌겠지만 좋은 작품에 대한 집착과 애착이 있다. 좋은 이야기가 담긴 시나리오. 내가 지금까지 선택한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대중적이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도 누군가 만들고 해야 하는 이야기라면, 그리고 좋은 이야기라면 나는 참여하고 싶다. 해야하고. 좋은 배우가 어떤 배우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좋다’라는 건 정의하기 모호하다. 하지만 배우로서 선택해온 길에 대한 자부심은 있다. 내가 해온 작품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야기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 인어공주>는 참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이런 얘기. 좋은 작품에 대한 내 기준에 대해서는 타협하고 싶지 않다. 나와 다른 시선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누군가 권한다면 동의하고 싶지 않다. 작품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때 숙‘ 부인 정씨’가 얼음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대역을 쓰길 바랐는데 배우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직접 연기했다는 한 제작자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연기하는 전도연은 늘 주저하는 법이 없다. 되도록 내가 다 해내고 싶다. 그래야 인물의 감정과 정서가 더 잘 전달되지 않겠나? 내가 표현한 인물의 감정 그대로 관객이 느꼈으면 한다. 이 일은 하면 할 수록 간절하고 절실해진다. 돌이켜보면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는 철딱서니가 없었다. 우쭐한 기분도 좀 있었고. ‘일을 하다 힘들면 그냥 결혼하면 되지’하고 생각했다. 그때 내 꿈은 배우가 아니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배우가 꿈이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계속 연기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좌절하지 않고 잘 갔으면 좋겠다. 지치지 않고. 나는 아무래도 쉬지 않고 일하고 싶은 것 같다. 에너지를 소모해야 새로운 에너지가 계속 생긴다. 쉬어야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요즘 눈길이 가는 작품이 있나? 가벼운 걸 해보려고 한다. 요즘 많은 감독님을 만나고 있다. 사람들은 전도연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기도 한다. 배우 전도연에 대해서는 작품을 봐서 알겠지만, 아직 보여주지 않은 전도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감독들이 찾고 있는, 그동안 내가 보여주지 않았던 지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여러 감독님을 만나보는 중이다.
전도연이 앞으로 10년이 더 지난 뒤에도 이렇게 <마리끌레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판>의 표지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이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