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경이로운 소문 추매옥 영화 빛과 철 벨앤누보(Bell & Nouveau) 르누이(LENUÉE)

진주 네크리스 벨앤누보(Bell & Nouveau), 레더 톱 르누이(LENUÉE).

염혜란 경이로운 소문 추매옥 영화 빛과 철 코스(COS)

재킷 코스(COS).

영화 <빛과 철>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가해자의 아내 ‘희주’(김시은)와 그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피해자의 아내 ‘영남’(염혜란)이 횡단보도를 두고 마주 선 채 시작한다. 영남을 발견한 희주가 뒤돌아 도망치는 순간부터 영화는 질주한다. 두 사람과 그날의 교통사고를 둘러싼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고, 예상치 못한 증언들이 덧입혀지는 와중에 좀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는 이야기는 가속페달을 밟은 채 자꾸 커브를 튼다. 그 와중에 배우 염혜란이 연기한 영남의 진의를 알 수 없는 피로한 얼굴이 자꾸 이야기의 꼬리를 낚아챈다. 지금껏 친숙한 역할로 대중과 만나온 배우 염혜란은 이 영화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좋은 연기, 좋은 배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형형한 눈빛 하나로 보는 이를 숨죽이게 만드는 건 좋은 배우가, 좋은 연기가 해내는 일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2월 18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빛과 철>은 힘이 대단한 작품이에요. 3명의 여성 배우가 발산하는 에너지도 압도적이고. 배우로서 용기가 필요했을 작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두렵진 않으셨어요? 용기, 두려움과 별개로 이런 영화는 배우로서 하고 싶은 작품이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역시 있었고요. 한데 감독님이 배우 염혜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서늘함을 느꼈다고, 지금까지 다른 작품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을 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영화가 시작하고 나면 사정없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왜 염혜란 배우가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대본을 처음 봤을 때부터 흡인하는 매력이 있었어요. 근데 너무 두려운 흡인 있잖아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뭘 감추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듦과 동시에 끝까지 달려가게 만드는, 회오리바람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몰아치는 힘을 가진 작품이었어요. 감독님을 만났을 때 이 작품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았어요. 왜 끝까지 가봤기 때문에 여유로운 사람들 있잖아요. ‘어떤 질문이든 해봐라. 내가 그거까지 생각 못했을 줄 아느냐’ 이런 느낌?(웃음) 이 작품에서만큼은 생각의 끝에 가 있는 사람 같았어요. 완벽하다기보다 고민을 충분히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같이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영남으로 사는 동안 내내 따라다닌 생각이나 질문이 있나요? 이야기가 진행되며 영남이 돌보지 않은 거울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들여다 보지 않고 방치했던 거울을 다시 마주하는 느낌. 워낙 방치해서 거울을 보니 낯선 여자가 있는 거죠. 내 얼굴조차 보지 않고 산 세월을 마주하는 상황이라고 봤어요. 그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게 희주고요. 희주가 옆에서 자꾸 찔러대요. 그러면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니까 고통스러운 거죠.

고통스러운 가운데 영남은 뭔가를 꽉 붙들고 사는 것 같거든요. 그걸 놓으면 살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영남은 뭘 붙들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요? 제 생각에는 그게 명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장 눈앞의 보험금이 중요한, 하루하루 사는 게 급한 사람인 거죠. 정신 차리고 살아내지 않으면 무너지는 상황이니까요. ‘이 사건을 덮어야만 살아갈 수 있어’ 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버거워서 외면하고 강하게 버티는 듯 보이는 거죠. 사실 영화는 버텨내고 있다가 와장창 깨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보거든요. 어떻게든 남은 삶을 아이와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생존인 거죠.

영남이 되어 강한 역할을 했지만 정작 자신을 두고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네. 저는 남들 눈 많이 의식하고, 자주 후회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롭게 다짐하는 사람 같아요. 견고하지 못해서 때마다 한 번씩 다독여줘야 하는 사람이요.

하지만 배우로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현장에서 홀로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렇죠. 근데 당시에는 혼자 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나가는 것 같아요. 다 넘기고 나서야 그때 잘 넘겼네 하고 깨닫는 편이에요. 준비하는 동안은 오로지 연기를 어떻게 해내야 할지만 생각하니까. 그래서 계속 배우를 할 수 있는 것 같고요.

연기하는 찰나의 순간에만 집중해왔다는 말이죠? 일전에도 같은 맥락의 말을 한 적 있어요. 연기를 오래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좁‘ 은 식견’ 덕분이었다고요. 많은 걸 보고, 알았다면 연기를 오래 하지 못했을 거예요.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대부분 큰 그림을 그리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해야 배우의 숙명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언제 일이 끊어질지 모르는, 기약 없는 삶을 사는 거잖아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한 작품 한 작품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랑받게 되면 더 기쁘기도 하고요.

기약 없는 삶이라는 말은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될 것 같아요. 코로나19로 우리의 삶이 크게 변했잖아요. 맞아요.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과연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소중한 가치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좇던 것들이 그저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하려고 하겠죠. 우리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됐잖아요. 행복도 단순해지는 것 같고요. 하지만 정말 힘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도 사치스럽게 느껴질 것 같아요.

 

염혜란 경이로운 소문 추매옥 영화 빛과 철

재킷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링 모두 타니 바이 미네타니(Tani by Minetani), 톱과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염혜란 경이로운 소문 추매옥 영화 빛과 철

염혜란 경이로운 소문 추매옥 영화 빛과 철

염혜란 경이로운 소문 추매옥 영화 빛과 철

트렌치코트 드미어(DEMERE), 셔츠 대중소(Daejoongso), 쇼츠 자라(ZARA), 운동화 아식스 스포츠스타일(Asics SportStyle), 양말과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들이 흔히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연기가 나온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인가요? 제 바람이기도 한데, 좋은 사람의 연기가 좋았으면 해요. 삶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연기 잘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이들은 사람이 좀 나빠야 연기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해요. 어떤 배우가 해내는 송곳 같은 연기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건 못 가질 것 같아요. 저 같은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야만 할 수 있는 연기가 불쑥불쑥 나오는 배우들이 있어요. 타고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저는 그걸 가지고 있는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추구하는 방향도 그쪽이 아니고요.

무엇보다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말로 들려요. 보통의 삶과 배우의 삶을 분리해 살고자 하는 편이에요. 가령 악역을 맡았다고 해서 실제로 그 삶을 살아볼 건 아니잖아요. 멋진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반복되는 일상을 포기하며 살 것도 아니고요. 사랑에 빠진 역할이라고 실제 사랑에 빠져버릴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내 일상이 유지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둘 사이의 거리를 두는 편이에요.

소위 말하는 현실 배우. 맞아요. 저는 진짜 현실 배우.(웃음)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대중에게 큰 실망을 준 사건이 없고,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며,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서 계속 작업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배우를 오래 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뛰어난 연기력이 다는 아니죠. 앞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연기 오래 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 천재적인 배우들이 갖는 예리함이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오래 갈고 닦은 날카로운 칼도 있을 수 있는 거거든요. 제가 천재적인 배우가 못 돼서 이런 바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오래 하다 보면 그 천재성에 가까이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연기를 시작하던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했나요? 아니요. 어떤 배우가 돼야겠다는 다짐은 젊을 때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톱 배우들이 부럽기도 했고, 나도 내 목소리를 내는 배우가 되고 싶던 때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좋은 작품을 더 하고 싶어요. 유명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적당히 오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배우 염혜란이 연기하는 인물들이 모두 생생하기 때문일까요. 일상을 사는 인간 염혜란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아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요. 그게 싫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나는 배우인데 왜 아이 숙제 때문에 고민해야 하고, 준비물 못 챙겨서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나도 그냥 작품 하나만 생각하는 아티스트이고 싶어.’ 이럴 때가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일상이 있기에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연기해야 할 텐데 작품 활동만 해서는 그런 연기가 나오긴 힘들잖아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견디는 거죠. 일상이 연기의 바탕이 되어줄 거라고 믿으면서.

배우로 사는 데 있어 배우 염혜란의 기초 체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인물에 다가갈 때 늘 처음 공부하는 사람처럼 대하려고 공을 들여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시간들이 쌓여서 배우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 과정이 없으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더라고요. 대충 이런 인물이겠지? 이런 역할이겠지? 극에서 내가 해줘야 하는 부분이 이런 거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연기는 얕아진다고 봐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인물로 접근하려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해요. 근데 가면 갈수록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단지 그 장면에서 필요한 부분만 연기하게 되는 순간, 하고 있는 작품과 반비례해서 배우로서의 역량은 줄어들 것 같아요.

여전히 연기할 때 떨리나요? 그럼요. 여전히 떨리고 항상 두려워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이 흐트러지면 어떡하지 싶고요. 현장에서 갑자기 NG가 많이 나면 ‘왜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하나’ 싶고 같은 대사를 주체할 수 없이 반복해서 틀리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이런 상황이 나에게도 일어날 거라고 상상하면 여전히 떨리고 무섭죠.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건 경력이 쌓인다고 달라지진 않아요.

하지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염혜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가 흑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다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왜 저렇게 했을까, 언제쯤 잘할 수 있을까 싶고요. 현장에 가면 나더러 다들 선배님이라고 하는데 나는 뭐 하고 있는 걸까싶고. 그래서 어제도 자기 전에 힘들었어요.(웃음)

그럼에도 연기하는 것이 좋으니까 두려움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죠? 앞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죠. 나는 앞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다고 믿을 뿐이에요.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열심히 달렸다고 달렸지만 쉬는 것만 못 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냥 그늘에 앉아서 쉴 걸 이러면서.(웃음) 그래도 저는 항상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편이라 분명 얻는 게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아쉬웠던 연기들은 떨치려고 노력하나요?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 본의 아니게 떨쳐가면서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도 문득 과음한 다음 날처럼 훅 들어와서 한동안 일상을 지배할 때가 있어요. 까먹고 있었는데 예고 없이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는 거죠. 이‘ 클립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봤다고?’ 하면서 놀라고. 오늘 인터뷰 주제는 후회 같네요.(웃음)

이렇게 된 거 마지막 질문은 후회하지 않는 것을 여쭤볼게요.(웃음) 배우의 길을 선택한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일생 우유부단했고, 결단을 못 내리고 살았어요. 그중 배우를 선택한 것이 가장 큰 용기였어요. 지금 돌아보면 ‘미쳤었나 봐, 어떻게 이걸 한다고 했어’ 싶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실할 때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 같은 사람도 결정을 했고, 그걸 후회하지는 않으니까.

후회 없는 결정 이후부터는 자잘한 후회들이…. 계속 따라오네요.(웃음) 근데 저는 후회가 필요하다고 봐요. 결국은 되돌아보는 거니까. 조금 더 달라져야겠다고 매일같이 다짐하거든요. 후회하고 다짐하고, 후회하고 다짐하고 매일같이. 작심삼일을 백 번 하면 1년이 된다는 말, 들어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