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OGRAPHY
말간 얼굴을 지닌 열네살 여자아이 ‘은희’. 벌새처럼 바쁘게 날갯짓을 하는 그의
평범하면서도 찬란한 일상을 그린 영화 <벌새>로 독립영화계의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한 배우 박지후는
올해 2월 개봉한 두 번째 장편영화 <빛과 철>에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사고의 실마리를 쥔 소녀 ‘은영’이 되었다.
1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그는 현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촬영을 마친 상태다.
재난을 소재로 한 두편의 작품에서 박지후의 새로운 얼굴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얼마 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촬영을 마쳤다고 들었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유일하게 남은 아 파트에 생존자들이 모이며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저는 고등학생 ‘혜원’ 역을 맡았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태화 감독의 작품이에요. 기억에 남는 감독과의 일화가 있나요? 감독님이 인스타그램에 ‘구름 수집 시리즈’를 올리고 계세요. 휴대폰으로 찍은 구름 사진 위에 재치 있는 그림을 그려 넣으시죠. 저도 가끔씩 감독님에게 사진을 보내드리며 이 시리즈에 참여하고 있어요. 감독님은 저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웃음을 지으세요. ‘왜 웃으세요?’ 하고 여쭤봐도 그냥 ‘허허허’ 하시더라고요.(웃음) 감독님과 편한 사이로 지내고 있어요.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등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의 라인업이 화려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 현장은 멋진 선배님들과 대화하며 연기할 수 있는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항상 관찰하고, 연구하고, 연기에 진중하게 임하는 선배들의 태도가 멋져 보였어요.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장에 보낸 커피차 사진을 공개했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 마지막 촬영 날, 조감독님이 갑자기 저한테 오시더니 “커피 잘 마실게!” 하시는 거예요. 김보라 감독님이 보낸 커피차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드렸죠. 제가 좋아하니까 감독님도 기뻐하시더라고요.
첫 장편영화 <벌새>의 인연이 오래 이어지고 있네요. 다수의 상을 안겨 준 만큼, <벌새>가 본인에게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듯해요. 맞아요. <벌새> 촬영 전에는 단지 연기가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은희를 만난 이후 연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벌새>를 통해 많은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으니까 제가 은희와 함께 성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죠. 마치 오랜 친구 같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처음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2018년에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벌새>가 최초로 상영되었어요. 그땐 영화보다 관객의 반응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중간중간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면 ‘관객이 각자 은희가 되어서 영화를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어요. 관객에게 전해진 은희의 상황과 감정이 떠올라 마음이 아리기도 했고요.
만약 은희가 실존한다면, 지금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그때처럼 아파하지 않고, 성숙한 내면을 지닌 멋진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당돌한 면도 있으니까 정의롭게 성장해가지 않을까 싶어요.
<벌새> 이후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촬영 현장에 있을 때 예전보다 익숙해진 것과 아직은 좀 낯선 것은 각각 뭐예요?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이전에 비해 좀 익숙해졌어요. 반면 연기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해요. 연기는 정답이 없잖아요. 제 시선이 맞다, 틀리다 확언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자주 듣고 조언을 얻으려고 해요.
연기는 내가 아닌 남이 되어보는 일이죠. 각 캐릭터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요? 대본을 읽을 때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그의 성격을 세심하게 살펴봐요. 제 주변에도 이런 인물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꾸준히 관찰하죠. 그뿐 아니라 ‘나에게도 이 캐릭터와 비슷한 면이 있을까? ’ 생각하면서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편이에요. 그리고 똑같은 대사와 감정이라도 표현 방법이 굉장히 많잖아요. 선배님들의 연기를 보며 참고하기도 하고, 제 마음이 가는 대로 무작정 질러볼 때도 있어요. 연기할 땐 최대한 다양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음이 가는 대로 질러본 장면 중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벌새>에 은희가 거실에서 방방 뛰듯이 춤추는 장면이 있어요. 지문에는 ‘오징어 춤’ 이라고만 적혀 있었어요. 제 느낌을 그대로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은희의 상황과 감정만 생각하면서 그냥 질렀죠.(웃음) 결과적으로 저와 감독님의 마음에 드는 장면이 완성되었고, 관객의 반응도 좋아서 기뻤어요.
한 인터뷰에서 “작품 속 캐릭터와 스토리를 분석하며 자신의 다른 면을 알아간다”라고 말한 적 있어요. 최근에 연기를 통해 발견한 자신의 새로운 면이 있나요? 공교롭게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이에 앞서 촬영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둘 다 재난물이에요. 처음에는 꼬질꼬질한 분장이 어색했는데, 언제부턴가 점점 더 캐릭터에 몰입하면서 즐기게 되더라고요. 저도 이런 모습이 어울린다는 걸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온조’ 역으로 출연한 <지금 우리 학교는>에는 윤찬영과 조이현 등 또래 배우들이 함께해요.나이가 비슷한 언니, 오빠들이 나오는 작품은 처음이라 다른 때 보다 편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어요. 배우들끼리 연기 이야기도 틈틈이 하면서 알찬 시간을 보냈죠. 서로의 연기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솔직하게 조언하기도 했어요. 모두가 작품을 위해 열정을 불태운 현장이었죠.
두 작품 모두 기대되네요. 한편 지난 2월에 개봉한 배종대 감독의 영화 <빛과 철>은 사전 준비 없이 촬영을 진행한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빛과 철> 촬영 현장은 굉장히 고요했어요. 각자 캐릭터에 집중한 것은 물론이고, 사전 만남 없이 현장에서 처음 마주해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죠. 나중에 포스터 촬영과 관객과의 대화(GV)를 할 때가 되어서야 서로 말문이 트였어요. ‘촬영할 때 너무 심심했다’, ‘배우 간 교류가 많지 않아 아쉬웠다’ 하면서요.(웃음)
시간이 흐른 뒤 <빛과 철>을 다시 봤을때 더 마음이 끌린 장면이 있었나요? 감독님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고라니를 본 관객들이 은영의 얼굴을 떠올리면 좋겠다’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서 고라니가 나오는 장면을 봤을 때, 제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은영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 장면에선 이런 마음으로 연기했었지’ 하면서 당시를 추억하기도 했고요.
<벌새>와 <빛과 철> 모두 독립영화예요. 독립영화만이 갖고 있는 매력도 있을 것 같아요. 독립영화는 캐릭터의 일상을 사소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보여줘요. 그래서 각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고, 관객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독립영화관들도 되게 매력 있잖아요. 작지만 아늑한 공간 안에 다양한 것이 담겨있죠.
독립영화관에 자주 가는 편인가 봐요. 고향 대구에 있는 ‘오오극장’을 참 좋아해요. ‘삼삼오오’라는 단어에서 따온 이름에 걸맞게 그곳에 가면 마음이 평온해 지거든요. 오오극장에서 <벌새> GV가 열린 날, <벌새> 포스터 속 유화를 그려주신 김승환 작가님이 오셔서 저와 김보라 감독님을 그린 그림을 선물로 주셨어요. 은희가 오롯이 담긴 그 그림을 제 책상 한쪽에 놓아 두었어요.
올해 열아홉 살,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에요. 9월부터 원서 접수가 시작돼요. 전에는 수능이 먼 얘기 같았는데, 이렇게 확 다가오니까 걱정이 되는 한편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최근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셰익스피어와 안톤 체호프 같은 작가의 희곡을 처음으로 접했어요. 사랑을 말하는 시적인 표현에 감탄이 절로 나요. 마치 연기하듯이 ‘과몰입’ 하면서 읽고 있어요.
연기를 시작한 이후 일상에 변화가 생겼나요?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저더러 연기를 시작한 이후나 그 전이나 똑같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에 서는 연기를 하지만, 대구에 내려가면 또래와 같은 학생으로 지내니까 스스로도 크게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아요.
서울과 대구를 수시로 오가야 하니까 무척 바쁘겠어요. 기차 타고 가면 금방이더라고요.(웃음) 요즘엔 코로나19 상황과 촬영 때문에 대구에 자주 못 가서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절 너무 보고 싶어 하세요. 두 분 모두 연세가 아흔을 넘기셨기 때문에 함께한 순간들을 일기장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록하고 있어요.
평소에도 일기를 꾸준히 쓰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시간이 흐른 뒤에 일기장을 들춰 보면 별의별 감정이 다 있더라고요. 그게 캐릭터의 감정을 찾아갈 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해요.
배우로서 욕심이 생기는 작품도 있나요? 할 수 있다면 다 하고 싶죠. 몸이 열 개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굳이 고르자면 수년이 흘러도 캐릭터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요. 어떤 작품을 떠올렸을 때 캐릭터가 바로 생각나고,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저였으면 해요. ‘박지후가 박지후 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웃음)
박지후가 배우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뭘까요? 연기를 해 나가며 겪는 여러 상황을 건강하게 이겨 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제가 워낙 긍정적인 편이라서요.(웃음) 이 마음가짐을 앞으로도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