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OGRAPHY
다수의 드라마에 아역으로 출연한 배우 노정의. 그는 학교 폭력을 마주한 쌍둥이 ‘수연’과 ‘정연’(<드라마 스테이지 – 모두 그곳에 있다>),
동성 선배를 사랑한 고등학생 ‘선화’(<소녀의 세계>), 친구와 함께 집 나간 엄마를 찾아 나선 ‘정애’(<히치하이크>) 등을 연기하며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이어서 10대의 마지막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는 유서를 남긴 채 사라진 소녀 ‘세진’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어느덧 스물한 살이 된 그가 10여 년 동안 꾸준히 연기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내면에 자리한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덕분이다.
화보 촬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순간적으로 집중을 잘한다고 느꼈어요. 시크한 분위기, 날카로운 눈빛, 내면에 아픔을 지닌 듯한 표정 등을 떠올리며 컷마다 다양하게 시도해봤어요. 화보 촬영은 카메라 앞에 선 순간에 완전히 집중한다는 점에서 연기와 비슷해요. 그 외에는 화보 촬영과 연기의 매력이 자못 달라요. 화보는 단시간에 몰입해야 하지만, 연기는 앞서 벌어진 상황을 전부 이끌어가야 하죠.
<신의 퀴즈> <총각네 야채가게>를 비롯한 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한 후 다양한 캐릭터에 몰입해왔어요. 각 캐릭터를 만나고 떠나보내는 기분은 어떤가요? 아쉽죠. 그런데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은 아니에요. 그게 저 자신에겐 좋은 것 같아요. 깊이 파고들어 연기하더라도, 그 순간이 지나면 곧 제 본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유독 마음에 오래 머문 캐릭터가 있다면요? <드라마 스테이지 – 모두 그곳에 있다>의 수연과 정연은 처음으로 맡은 1인 2역이라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또 영화 <내가 죽던 날>의 세진도 기억에 남아요. 이 작품을 촬영할 때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거든요. 삶의 의지가 강했고,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지만 세상은 제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죠. 그게 저와 세진이 맞닿은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세진을 통해 제 감정을 표출하고 나니까 저 자신이 한층 단단해진 것 같아요.
<내가 죽던 날>에는 김혜수 배우와 이정은 배우도 출연했어요. 두 선배와 함께하며 무엇을 배웠어요? 연기에 임하는 마음이요. 그 마음은 선배님들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해야 온전히 느낄 수 있어요. 지금도 가끔씩 선배님들과 연락을 주고받아요. 한 번은 이정은 선배님과 같은 지역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선배님에게 연락드렸더니 근처의 맛집을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또 김혜수 선배님은 <마음 챙김의 시>라는 시집을 선물해 주셨어요. 평소 시를 좋아하는 저를 생각해 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내가 죽던 날>이 개봉한 지 1년 가까이 흘렀죠. 지금 이 영화를 돌이켜 보면 어떤 생각이 앞서나요?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좋은 영화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욕심이 컸거든요. 매번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지만, <내가 죽던 날>은 그런 감정이 1%라도 더 큰 작품이에요.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면서 한층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는 일에 재미를 느껴 배우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어릴 땐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나 봐요. 최근에 네 살배기 조카 ‘지아’가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즐겁게 춤추는 모습을 보고 ‘누구 닮아서 저럴까?’ 싶었는데, 모두 저를 닮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지아를 보고 있으면 제 과거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번 주말엔 지아랑 같이 뮤지컬 <시크릿 쥬쥬>를 보러 갈 거예요. 지아는 아직 판타지 속 캐릭터가 실존한다고 믿어요. 직접 보여주면 얼마나 좋아할지 기대돼요.
조카와 비슷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배우라는 직업과 어떻게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연기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들과 호흡을 맞추며 관계를 이어가야 하잖아요. 사람과 교감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제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촬영 현장에서도 활발한 편일 것 같아요. 처음 대본 리딩을 하러 가면 긴장해서 잘 웃지 않아요. 그런데 촬영이 시작된 후에는 밝게 이야기하고 장난도 많이 쳐요. 그 모습을 보신 분들이 반전이라고 말씀하시곤 해요.(웃음) 전 촬영 현장을 즐기고 싶어요. 그래서 연기하는 순간을 온전히 누리려고 노력해요.
여러 배우의 아역으로 활약했어요. 어린 시절 겪은 촬영 현장도 기억하나요? 그럼요. 전부 다 생각나요. 특히, 2014년에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 <피노키오> 촬영 현장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요. 박신혜 선배님이 연기한 ‘최인하’의 아역으로 출연했죠. 인하는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이 나오는 피노키오 증후군을 가진 캐릭터인데, 신혜 언니가 저에게 인하의 말투와 딸꾹질하는 방식을 함께 맞춰보자고 하셨어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작품을 위해 시간을 내주셨죠. 언니가 저에게 “초코 우유 먹어?” 하고 물으면서 음료를 건네준 날도 문득 떠오르네요.(웃음)
과거의 노정의 배우처럼, 언젠가 본인이 맡은 성인 캐릭터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아역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주고 싶어요? 꼭 안아줄 거예요. 어린 나이에 어른들과 어울리며 일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 아이가 편안하게 현장을 즐길 수 있도록, 친구처럼 잘 챙겨주고 싶어요.
일찍 연기를 시작해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은 각각 뭐예요? 제 또래 배우보다 연예계 경험을 많이 쌓아서 좋아요. 반면 이 시기에만 남길 수 있는 추억이 적은 건 조금 속상해요. 그래도 연기를 통해 제가 직접 겪지 못한 다양한 상황을 접하며 궁금증이 풀리기도 해요.
과거에 상상한 배우의 삶과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비슷하다고 느끼나요?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배우의 삶은 화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면에 굉장히 많은 노력이 숨어 있더라고요.
그 노력에는 캐릭터 연구도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캐릭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어느 시점이 제일 재미있어요? 지문 하나를 통해 캐릭터의 성향을 파헤쳐 갈 땐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같아요.‘이게 답인 것 같은데? 그럼 앞의 지문에서는 이렇게 연기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죠. 이런 식으로 질문의 답을 얻고, 그 답을 바탕으로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가 완성되어 있어요. 저와 다른 존재를 알아가며 희열을 느끼고, 그가 지닌 마음가짐을 배울 때도 있어요.
감독에게도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방대한 양의 캐릭터 연구를 바탕으로 질문을 한다기보다는 사소한 부분이라도 의논하려고 해요. 제 분석이 맞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각자의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아요. 제가 만난 감독님 중에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라고 하는 분이 많았어요. 그래야 제 안에서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현재 촬영 중인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김윤진 감독님도 마찬가지예요. 반대로 감독님이 저에게 ‘이건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하시죠. 다 함께 무언가를 완성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요즘 무척 행복해요.
<그 해 우리는>에서 맡은 ‘엔제이’는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요. 엔제이는 20대 중반의 최정상급 아이돌이에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고, 이젠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하는 인물이죠. 그 과정에서 엔제이는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찾기 시작해요. 처음 <그 해 우리는> 대본을 읽었을 때 ‘이 캐릭터를 꼭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엔제이는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힘들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이 인물에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연기해 내고 싶어요.
연기 외에는 무엇에 관심이 많아요? 반려견 ‘방울이’와 ‘사랑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같이 살고 있어요. 속상한 일이 생기면 방울이랑 사랑이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무언가 아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강아지가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제가 방울이와 사랑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듯, 그 아이들도 저에게 바라는 것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이제는 아이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건강을 세심하게 챙기고 있어요. 제 노력으로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요.
연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어요. 노정의 배우가 꾸준히 연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연기는 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작품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고요. 물론 연기가 늘 재미있진 않아요. 재미의 강도가 커졌다가 작아지고,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이내 다시 부풀어 오르는 과정의 반복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연기가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우로 활동하는 지금도 전 꿈을 완전히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씩 꿈을 향해 나아가면서 하루하루 연기에 노력을 쏟아부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