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섭 홍천기

홍천기 안효섭

블랙 셔츠 드레스와 울 팬츠 모두 버버리(Burberry).

 

드라마 <홍천기> 얘기부터 해야겠죠. 보면서 시작 단계에서 고민이 많았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사극인 데다, 맡은 역할이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 중 한 명이고, 그의 서사가 복잡다단합니다. 부담과 걱정이 많았어요. 일단 사극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상상하면서, 평소 쓰지 않는 말투로 연기해야 하잖아요. 예전에 <퐁당퐁당 LOVE>라는 드라마에서 도전해본 적 있는 장르이긴 하지만 그땐 대사가 별로 없어서 그나마 덜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홍천기>는 제가 끌고 가야 하는 부분이 많으니까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런데도 선택한 이유는 제가 도전을 즐기는 편인 데다 장태유 감독님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점도 컸어요. 무엇보다 ‘하람’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갔어요. 불운한 사건을 겪은 그가 어떻게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궁금증이 저를 이 드라마로 이끈 것 같아요.

게다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연기해야 하는 판타지물이고요.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많은 장면을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하면서 그 지점에서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특히 마왕(몸속에서 마왕이 발현되어 흑화한 하람의 모습) 같은 경우는 레퍼런스를 찾기도 어려웠거든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끊임없이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나? 이게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감독님, CG 감독님과 계속 얘기하면서 만들어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드라마가 어떻게 나올지 유난히 더 궁금했어요.

결과물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어떻게 나왔을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막상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니까 그건 잊고 이야기에 몰입해서 봤어요. 그만큼 잘 나왔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일 궁금했던 게 제 안에 있는 마왕의 실제 모습이었거든요. 촬영 내내 어떤 모습인지 모른 채 연기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꽤 웅장하고 멋있게 나오더라고요.

마왕의 모습이 CG인 줄 알았는데, 모두 직접 분장한 거라고요. 그런 분장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웠어요. 신기하면서도 막막했달까? 하면 할수록 마블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들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동안 집이나 극장에서 편히 본 영화들이 다른 시선으로 보이고, 새삼 그들에게 존경심이 들고.(웃음) 어쨌든 힘들었지만 신기하고 해볼 만한 경험이었어요.

 

 

홍천기 안효섭

블랙 터틀넥과 롱 카디건, 팬츠 모두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레이스업 부츠 디올 맨(Dior Men).

홍천기 안효섭

블랙 재킷과 링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하람은 비운의 서사를 잔뜩 품은 인물이에요. 어린 시절 가족을 모두 잃고 남은 건 복수심뿐이고, 알 수 없는 마왕이라는 존재가 몸을 지배하는 데다 눈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동정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서사인 건 인지하고 있었어요. 저 역시 대본을 읽으면서 동정심이 먼저 생겼거든요. 그런데 마냥 불쌍한 채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인물이기도 해요. 복수를 해야 하잖아요. 이 점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람 안에 있는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보여주려고 애썼어요. 사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리적 제한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마치 보이는 사람처럼 움직이고, 심지어 홍천기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장면도 나오잖아요. 그게 판타지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단련해온 하람이기에 가능한 거라고 이해했어요. 그렇게 하람은 자기 앞에 있는 불행에 무릎 꿇고 무기력하게 가라앉는 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여러모로 도전으로 가득한 작품이네요. 저는 매 작품이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언제나 제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고, 알지 못하는 불안한 세계에 발을 내딛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이번 작품은 유달리 도전할 부분이 많았어요. 진한 멜로드라마와 판타지 성향이 섞여 있는 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하는 것도, 불운한 서사를 지닌 인물을 마주하는 것도, 사극 현장을 경험하는 것도 매 순간 도전이었어요.

이 도전으로 얻은 게 있다면요? 드라마는 현재 방영 중이지만, 촬영은 마무리되었거든요. 끝나고 돌아보니 제가 훨씬 단단해졌더라고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처음에는 참 막막했어요.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죠. 하람처럼 한 단계씩 극복해가면서 8개월을 보내고 나니 발전한 모습이 제 눈에 보이더라고요. 쉽게 상처받았던 부분을 이제는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충분히 감정적이 될 수 있는 문제에도 감정이 앞서지 않고, 화낼 만한 일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정확히 얼마큼 발전했다고 말은 못하지만, 전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한 건 느껴져요.

엄청난 수확이네요. 그만큼 열심히 고민하면서 찍은 작품이에요.

살도 많이 빠졌다면서요. 8kg 정도 빠졌는데, 원래 작품 할 때마다 그래요. 신경 쓸 부분도 많고, 시간이 빠듯할 땐 밥보다 잠을 선택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살이 빠지는 것 같아요.

작품 할 때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지나 봐요. 누구나 그럴 텐데 새로운 현장과 인물에 적응하는 데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고요. 그래도 촬영이 끝나고 쉬면서 살을 좀 찌웠어요. 그러다 최근 새 작품에 들어가면서 다시 조금씩 빠지고 있고요.

새 작품이 드라마 <사내맞선> 맞죠? 미리 얘기해줄 수 있는 정보가 있나요? 일단 저는 재벌 3세예요. 좋은 차 타고, 시계도 좋은 거 차고, 사무실도 쾌적하고 넓습니다.(웃음) 지금은 이 정도만 얘기해둘게요

 

 

홍천기 안효섭

베이지 니트 베스트 산드로 옴므(Sandro Homme), 브라운 코듀로이 벨티드 팬츠 로에베(Loewe).

홍천기 안효섭

홍천기 안효섭

화이트 레더 코트와 블랙 레더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터틀넥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홍천기>가 도전이었다면, <낭만닥터 김사부 2>는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맞아요. 행복하게 연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현장이거든요. 스태프분들, 배우들, 감독님 모두 호흡이 잘 맞고 아주 유쾌한 현장이었어요. 아침마다 현장에 가는 게 기다려질 정도로요.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한석규 선배님 생각이 많이 나요. 아마 ‘돌담병원’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아버지 같았어요. 연기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셨지만 무엇보다 제가 움츠러들지 않게 기다리고 응원해주셨어요. 그분을 보면서 나도 저런 연기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5년에 첫 작품에 출연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새 작품에 도전했고, 조연부터 주조연, 주연까지 차근히 무탈하게 단계를 밟아왔어요. 스스로 배우의 삶을 어떻게 이어왔다고 생각하나요? 처음 시작했을 땐 연기라는 나무가 보였어요. 그런데 작품을 끝내고 보니 또 다른 나무가 보여요. 계속해서 새로운 나무가 보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여기가 숲인 걸 알게 된 거죠. 작품 할 때마다 깨닫는 게 아주 많아요. 저는 이 숲이 전부라 생각했는데 계속 또 다른 무언가가 보이더라고요. 의아하면서 무섭고 재미있어요. 종점이 없다는 건 무섭지만 설레는 일이잖아요. 저한테 연기가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연구해도 끝이 없으니, 계속 개척해가는 것.

계속된 연구의 과정에서 여전히 닿지 못하는, 개척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면요? 기술적인 부분들.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건 그냥 혼자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감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지 생각해봤을 때,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하다 느꼈고 계속 그걸 연마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성우 학원에도 가고 필라테스도 배운 거예요? 감정을 전달하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다양한 걸 배우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맞아요. 그걸 쓰든 안 쓰든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놓고 싶어요.

연기를 하면서 잃지 않으려고 유념하는 것이 있다면요? 배우기를 멈추지 말자. 나이가 더 들어서 다 알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늘 이 생각을 해요. 그러려면 배움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그런데 아마 저는 잃지 않을 거예요. 제가 지식을 향한 갈망이 크거든요. 그게 연기든 삶이든 또 다른 영역이든 배우고 깨닫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배움을 향한 갈망이 큰 사람이라면 늘 질문을 안고 살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나요? 저 자신을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그 시선을 놓칠 때가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일관성 있게 나를 관찰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말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나의 편견을 뺀 상태에서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나를 똑바로 바라볼 것인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요? 누구에게나 어떤 질문이든 해서 답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질문하겠어요? 재미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최근 좋아하게 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가 있어요. 개인심리학을 정립한 알프레드 아들러예요. 그 사람이 바라는 세상은 어떻게 보면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이상적이에요. 그렇지만 그 이론만큼은 완벽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가 살아 있다면,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정말 이게 됩니까? 정말 실천하고 있고, 유지됩니까?’ 하고요.

안효섭 배우는 이상적인 사람인가요? 아니면 현실에 발을 디딘 사람인가요? 현실에 머물면서 이상을 바라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 쪽으로 조금 기울긴 했어요. 예전에는 뉴스 속 사건 사고를 보면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건가 싶어 짜증만 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인류애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마음이 생겼어요. 다 도와주고 싶고, 같이 이겨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너그러워졌네요. 일단 지금은 그래요. 바뀔 수도 있어요. 미래는 장담 못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