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선물 받은 <Uptown Girl> 피지컬 앨범을 잠시 살펴봤어요. CD부터 포토 카드, 포스터, 스티커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첫 EP인 만큼 하나하나 제 손길이 닿아 있어요. 전반적인 비주얼과 무드, 팬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 등에 대해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EP 단위 작업은 처음이니 발매를 준비하는 과정에 차이가 있었을 것 같아요. <쇼미더머니 9>이 끝난 지 약 1년이 지난 이 시점에 EP를 꼭 내고 싶었어요. 아티스트는 작업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게 제일 멋있잖아요. 그런데 호기와는 다르게 완성해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더라고요. 싱글에 비해 많은 걸 고민해야 했고, 수정 작업에도 적잖은 시간을 쏟았어요. 꽤 힘든 여정이었어요.(웃음)
‘Uptown Girl’부터 ‘Daisy Remix’까지, 총 일곱 곡을 수록했어요. 곡마다 느낌이 달라 트랙 구성에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는 게 느껴졌어요.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앞으론 ‘Lambo!’처럼 센 곡만 내면 안 돼요?”, “팝 같은 느낌의 ‘티키타’도 괜찮은데요?” 등 여러 반응이 있어 오히려 좋았어요. 미란이가 이런 것들도 할 수 있는, 한계가 없는 아티스트라는 걸 알리는 것이 <UPTOWN GIRL>의 목적이었어요.
<Uptown Girl>이라는 제목이 ‘부유한 동네에서 자라 티 없는 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들었어요. 앨범 소개 글에 이 문장이 적혀 있더라고요. ‘낯선 곳에서의 적응은 끝났어’. <쇼미더머니 9>에 출연한 후 제 삶이 확 바뀌었어요. 달라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지난 7월쯤 번아웃이 왔어요. 앨범 준비를 위해 매일 작업실에 갔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죠. 왜 그런지 깊이 고민해봤는데, <쇼미더머니 9>을 통해 화제가 된 ‘VVS’나 지난 4월에 공개한 ‘Daisy’처럼 긍정적인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일종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둬놓았더라고요. 제가 아직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이제부터 ‘진짜 적응’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갔어요. 나중에 곡들을 모아보니까 지난 1년간의 감정이 너무 잘 드러나 있더라고요. 그때 ‘이 앨범은 나의 적응기다’라고 느꼈어요.
수록곡 중 처음 만든 곡이 ‘지겨워서 만든 노래’라고 들었어요. 직관적인 제목이 인상 깊어요. 번아웃을 겪던 당시의 슬픔을 풀어낸 곡이에요. ‘이건 지겨워서 만든 노래, 전부 필요 없어 더는 못해’라는 훅이 먼저 나왔어요. 그 이후에는 다른 부분의 가사도 금방 써지더라고요. 이게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던 거죠.
지겨우면 그만하거나 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작업을 이어가며 하나의 앨범을 완성하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저에게 동기부여를 해준 것들을 떠올렸어요.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다시 상기했죠.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과거의 제 방식을 되찾으려고 했어요. 하고 싶던 음악을 그냥 만들고, 마음에 안 들면 버리면서 작업했죠.
<Uptown Girl>을 듣고 아티스트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음반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번 앨범에서 6번 트랙 ‘난 진짜 멋지게’를 가장 아껴요. 솔직한 감정을 담아낸 가사가 유치하게 여겨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이 곡에 대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평소 곡을 만들 때 최대한 감정을 가공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누가 들어도 ‘이 사람의 이야기다’라는 느낌이 드는 음악을 좋아해요. ‘공장스러운’ 음악은 별로예요.(웃음) 물론 언제나 솔직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 가치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티키타’가 타이틀곡이죠. 가사 중 ‘DND’가 눈에 띄어요. 지인들과 호텔에 놀러 갔을 때, 한 친구가 저에게 ‘DND’라고 쓰인 도어 태그를 문에 걸어놓자고 한 적이 있어요. 자세히 보니까 작은 글씨로 ‘Do Not Disturb’라는 뜻이 함께 적혀 있더라고요. 그때 ‘나도 내 마음의 문에 이걸 걸어놓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를 계기로 만든 곡이 ‘티키타’예요. 낯선 세상에 무서움을 느껴 문을 잠가놓았지만, 사랑하는 무언가로 인해 밖으로 나가 적응해간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그게 <Uptown Girl>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죠.
사랑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요? 사랑의 힘은 정말 대단해요.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닌, 사랑이 담긴 사소한 말과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로 인해 엄청난 일들이 이뤄지기도 하고요.
최근에 경험한 사랑의 순간이 있나요? 얼마 전 처음으로 ‘영통팬싸(영상통화 팬 사인회)’를 했어요. 온라인상으로 저를 만나는 짧은 시간 동안 팬들이 사랑의 말들을 너무 많이 해줬어요. ‘밥 잘 챙겨 먹어라’, ‘건강해야 한다’, ‘하고 싶은 거 전부 해라’ 하면서요. 그 순간의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되게 이상했어요.
<Uptown Girl>을 발매하며 미란이는 무얼 얻었나요? 이 음반을 내기 전까진 두려운 마음이 있었어요. 활동이 적은 기간에는 저를 향한 기대가 사라지진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시기를 버텨 <Uptown Girl>을 발매했고, 저를 기억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니까 용기가 생겼어요. 두 손을 싸매고 있던 수갑이 팡 하고 풀렸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고 싶은 게 많아졌고, 앞으로 제가 원하는 그림을 보다 잘 그려갈 수 있을 듯해요.
<쇼미더머니 10>에서 신스의 파이널 무대 ‘SIGN’에 함께 올랐어요. 경연이 벌어지는 현장을 다시 찾아가니 어땠나요? 상경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시험 합격이나 취업 같은 제대로 된 결과물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장에서 1년 만에 다시 만난 작가님들에게 <Uptown Girl> 피지컬 앨범을 드렸어요. “미란이가 언제 이렇게 컸냐”라면서 감격스러워 하시더라고요.
유튜브에 업로드한 ‘쇼미놈들과’ 영상을 봤어요. <쇼미더머니 10> 파이널 당일, 대기 시간에 다른 래퍼들이랑 PC방에 가더라고요.(웃음) 대기 시간이 엄청 길었어요.(웃음) 평소 게임을 즐겨 해요. 게임 할 때만큼은 잡다한 생각이 안 들고, 상대방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데 집중해요.
요즘 일상에서 미란이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뭐예요? 드라마와 만화를 좋아해요. <연모>를 보면 괜히 마음이 아리고, <비스타즈>는 동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OST 작업을 통해 작품 속 캐릭터를 위한 곡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요. 제가 ‘과몰입’을 진짜 잘하는 편이거든요. 이런 면이 제 개인 작업에도 도움이 돼요. 예전에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Eleven’, <명탐정 코난>이 떠오르는 ‘명탐정’도 발매했죠.
새 피처링 작업도 공개되었어요. 12월 13일에 나온 문별의 신곡 ‘G999’에 참여한 계기가 궁금해요. 지난여름 문별 언니가 호스트를 맡고 있는 라이브 쇼 ‘studio 문나잇’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날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하자면서 연락처를 교환했는데, 며칠 뒤에 연락하시더라고요. 뉴트로 컨셉트의 밝은 곡이라 즐겁게 작업했어요. 평소에 시도하지 않던 느낌의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협업이 참 재미있어요.
한편 직접 DJ로 출연 중인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죠. 매주 수요일 새벽 1시부터 <미란이의 한 시라니>를 진행하고 있어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음악을 통해 청자를 만날 때와 사뭇 다른 기분이 들더라고요. 미란이가 아니라 본캐 ‘김윤진’이 나오죠. 제 이야기를 주절주절 많이 하는, 새벽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방송이에요.
각종 ‘덕질’을 공유하는 코너 ‘이거 내꺼’가 흥미롭더라고요. 만약 본인이 청취자라면 이 코너에 어떤 사연을 남기고 싶어요? 중학생 때부터 박효신의 팬이었어요. 이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한번 덕질을 시작하면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들 하잖아요. 얼마 전 오랜만에 그의 라이브 영상들을 봤는데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나더라고요. 요즘엔 ‘동경’을 다시 찾아 듣고 있어요.
미란이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길 바라나요? 제 음악이 일상에서 종종 떠올랐으면 해요. 살아가다가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에 BGM처럼 깔리는 거죠. 어렵게 만든 음악이지만, 듣는 사람들한테는 쉽게 다가가면 좋겠어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예요. 2022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요? 지난 1년은 반짝반짝 빛나며 살아 숨 쉬는 시간이었어요. 달리기에 비유하자면, 주변의 코스들을 살펴봤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날씨 등에 대해 다양하게 배웠어요. 2022년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쉼 없이 달릴 거예요. 지치지 않게 스스로 페이스를 잘 조절하면서요.
도착지는 어디일까요?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요. 일단 지금은 마냥 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