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앵커>와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나란히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오래 기다린 작품들이에요. 개봉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싶기도 하고. 영화 <앵커>는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 크랭크업 했으니 3년 차가 다 되어가는데, 지금 촬영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해요. 그사이 연기력이 늘었다기보다는 <앵커> 속 ‘세라’라는 역할이 지금 제 나이와 더 잘 붙을 것 같거든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더 오래된 작품이라 추억 앨범을 꺼내 보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요. ‘맞다! 나 저랬었네’ 하며.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수년 전에 촬영한 두 작품이 우연찮게 한 주 차이로 개봉하게 됐잖아요. 배우라는 직업은 자신의 계획이나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에 연연하면 마음이 굉장히 힘들어지는 일이기도 할 것 같아요. MBTI상 제가 INFJ거든요. 계획적인 사람인데 배우라는 직업은 선택받는 위치이기 때문에 계획성은 그다지 중요한 덕목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놔야 해요. 근데 타고난 성향이 이렇다 보니 일상도 최대한 계획적으로 보내려 하고, 일에서도 어떤 작품을 분석하거나 캐릭터를 구축할 때 꽤 철두철미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감정을 많이 쓰는 직업을 가진 터라 제가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라 생각하실 수 있지만 오히려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성격에 가까워요.
그런 성향 때문인지 일전에 ‘역할을 분석하고 구현해내는 데 있어 끝에서 끝을 더 가보려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자신을 끝까지 써보려는 노력이 주는 고통과 기쁨이 있을 것 같은데요. 분명히 있을 거예요. 예전에는 극한에서 발현되는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어요. 무언가에 심취해 몰입하다 보면 한 부분만 보게 되잖아요. 예전에는 그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10대와 20대에는 이 정도로 집중할 만큼 흥미로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껴본 거예요. 그 희열을 계속 느끼고 싶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 방식 말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어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지만 무조건 다그치고 몰아붙이지는 않아요. 최대치의 노력만으로 충분히 잘한 거라고 나 자신을 칭찬하기도 하고요.
자신을 다 써보려고 하는 건 타고난 기질 같아요?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뭐든 열심히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것 같긴 해요. 청소를 하더라도 아주 열심히 하거든요. 엄마가 저랑 성격이 똑같아요. 아마 엄마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커왔기 때문일 것 같아요. 남들은 ‘답답하다’, ‘약지 못하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 방식을 누군가에게 맞춰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죠. 모든 일이 그렇듯 매번 결과물이 좋을 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 결과는 알 수 없고, 모두가 책임질 수도 없기 때문에 과정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아요. 돌을 다지듯이 한 발 한 발 노력해서 스스로 만들어왔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껴요. 물론 슈퍼 루키처럼 한눈에 드는 배우의 삶도 그것대로 좋고 즐겁겠지만요. 제가 하나하나 노력해 만들어왔다는 것 그 자체로 스스로 만족해요.
하지만 배우라는 일은 주로 결과로 평가받고, 그 과정에서 배우 천우희는 여러 차례 극찬을 경험했잖아요. 감사한 일이지만 배우가 완전한 예술가는 아니거든요. 공동 작업이고, 선택되고 쓰여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어떤 극찬을 받았다는 사실이 저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좋은 결과물은 모든 조합과 균형, 시기가 맞았을 때 얻어지는 것 같아요. 단지 내 능력치가 높아서, 탁월하게 뭔가를 발휘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그래서 비난과 비판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칭찬도 비난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요. 그래서 ‘운이 좋았지’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감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공동 작업이라는 특성이 배우 개인을 성장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연기로만 인생을 배우려고 한 때도 있었어요. 왜 농담으로 그러잖아요. ‘화장을 글로 배웠어요’라든지.(웃음) 연기를 통해 세상을 탐구하려고도 했지만, 현장에서는 늘 그 이상을 경험하게 돼요. 나와 다른 여러 사람을 만나고,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을 배울 수도 있죠. 가장 크게 배우는 건 ‘합’이에요. 조합과 균형. 현장에서 배우는 것만큼 개인적인 삶에서도 많이 배워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한쪽에 치우쳐 있어요.
배우는 촬영 현장뿐 아니라 한 인간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끈을 잡는 과정에서도 배우는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 이해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들이 있었죠? (이 말이)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캐릭터를 맡은 순간부터 그냥 이해돼요. 누군가 ‘그 인물은 너무 무섭고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했을 때 ‘아냐, 그 사람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 거야’ 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해돼요. 그게 좀 다른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그 역할을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인물에 동화되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요.
무의식적인 부분이죠? 저는 그래요. 물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는데, 이는 인물의 표현 방식이나 연출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혼돈이지 인물 자체로 인한 어려움은 아니에요. 배우마다 접근 방식이 다를 텐데, 저는 시나리오를 보면 그 인물이 보여요. 그 후에는 나에게 왜 그렇게 보였는지 역으로 질문하면서 분석하는 거예요. 어떠한 전사로 인해 이런 인물이 되었다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결과가 먼저 머릿속에 보이고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하고 원인을 찾아가는 거죠.
새롭네요. 성향상 누군가를 두고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하는 식의 생각도 잘 안 해요.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누구나 저마다 기준과 입장이 있고, 누군가 저를 봤을 때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이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이해해보려 하거나 남의 기준에 맞추려 하지 않아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저 사람 마음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고 받아들이려는 편이에요. 법과 제도 안에서.(웃음)
어쩐지 종교적으로 들리는데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도 적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미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뭔가가 혐오스럽거나 누군가가 참을 수 없이 밉다는 감정은 들지 않아요. 싫은 건 있죠. 위선적인 것, 가짜이면서 진짜인 양 구는 것도 싫어요. 하지만 그 범주 안에만 들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요동하지 않아요. 이런 면에서 울타리가 넓은 편이거든요. 그 울타리를 넘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다 괜찮아요. 하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웃음)
지금까지 강한 캐릭터도 맡았었죠. 어때요?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강한지는 모르겠는데, 중심을 잡으려다 보니 강해 보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상황적으로 휩쓸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을 테지만, 중심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그렇다고 제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는 편도 아니에요. 보다 고심해보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점점점(‘…’)이 나를 강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점점점? 네. 점점점. 어떤 생각이나 의견, 감정을 많이 드러내려는 편은 아니에요. 의도해서라기보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요. 어떤 상황을 볼 때 한쪽으로 기울지 않기 위해 여러 방향을 보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그게 조금 강하게 보이려나? 잘 모르겠네요.
가장 큰 약점은 뭔가요? 연민이 많아요. 마음이 생각보다 물러요. 누군가 저의 이 연민을 겨냥하고 다가오면 다 무너질 거예요. 막 화가 나다가도 연민에 휩싸이면 바로 ‘그럴 수 있지’ 하게 돼요. 아이한테도 굉장히 약해요. 만약 어떤 작품을 봤는데, 그 작품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도 아이가 등장해 어떤 장면을 연기한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바로 무너져요. 판단력이 흐려지죠. 아이가 지닌 순수성은 제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가 없어요. 아이들은 그 순간이 진짜라고 믿잖아요. 그 진짜라고 믿는 순간이 저한테 전해지거든요.
스스로 ‘진짜라고 믿는 순간’을 자주 느껴요? 배우는 진짜에 닿으려고 하지만 대부분 허상이잖아요. 정말 어려워요. 사람들은 허상 안에서 진짜를 보길 원해요. 허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조차도요. ‘진짜란 무엇일까’, ‘진정성이라는 게 과연 뭘까’ 하는 의문이 들죠. 마음의 차이. 그 하나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설정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지만, ‘이건 가짜야’ 하고 생각하며 연기를 하는 것과 단 한 순간만이라도 진짜를 포착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연기는 다른 것 같아요. 하지만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 그런 생각조차 안 하죠. 카메라가 도는 순간에는 품었던 질문을 다 잊어버려요. 그러면 이 세계가 다 진짜예요. 적어도 제게는. 그래서 호흡도 달라지는 거고, 순간적인 감정도 나오는 거고요.
정리할까요. 배우로서 자신이 지닌 재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예전에는 ‘내가 그래도 뚝심은 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는데, 그게 와르르 무너져버릴 때도 있었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요. 타고난 무엇도 아닌 것 같고, 경험도 한참 부족하게만 느껴져요. 그래도 제가 가진 게 있다면 ‘얼굴’ 같아요. 어느 장르든 어느 역할이든 붙을 수 있는.
그러니까요. 오늘 촬영도. 오늘 괜찮았나요? 쑥스러워서 촬영 결과를 잘 확인하지 못해요. 잘 찍어주시겠지 하면서 잘 안 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