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블랙 드레스 델라라나(Della Lana), 레이어드한 가죽 원피스 코스(COS), 팬츠 나이스클랍(Nice Claup), 그린 컬러 뮬 찰스앤키스(Charles & Keith). 신수원 셔츠 코스(COS), 팬츠 아르켓(Arket), 오렌지 컬러 클로그 찰스앤키스(Charles & Keith).

블랙 드레스 델라라나(Della Lana), 레이어드한 가죽 원피스 코스(COS), 팬츠 나이스클랍(Nice Claup), 그린 컬러 뮬 찰스앤키스(Charles & Keith), 슈즈 구이디(Guidi).

 

영화를 계속 할 수 있을까. 3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지완’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안고 있다. 그런 지완에게 의미는 있지만 돈은 안되는 아르바이트가 들어온다. 1세대 여성 감독의 영화를 복원하는 일. 사운드를 입히고 사라진 필름을 찾아가며 지완은 이전 세대 여성 영화인의 험준한 삶을, 그 속에서도 버티고 해낸 기개를 발견한다. 그리고 끝내 포기해야 할 것만 같던 필름을 찾은 후, “자네는 끝까지 살아남아”라는 말을 듣게 된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계속 해야 한다. 하는 수밖에 없다. 신수원 감독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선배들에게 얻은 힘을 담아 영화 <오마주>를 만들었다.

 

레터링 티셔츠 아이디어북스(IDEA Books), 가죽 재킷 코스(COS), 선글라스 생 로랑(Saint Laurent).

스웨터 베르소(Verso).

 

어깨에 닿을 듯한 긴 단발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지완’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이건 감독 본인의 이야기라고요. 신수원 처음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의상과 분장을 정할 때 제가 정신이 없었거든요. 헤어를 테스트하는데 보니까 제 머리랑 완전 비슷한 거예요. 잠깐 고민하다 나쁘지 않다 싶어서 오케이. 그리고 의상 피팅을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나의 도플갱어를 본 듯한 기분이.(웃음) 그러곤 이참에 “제 옷이랑 외투도 입어볼까요?” 했죠. 그러다 안경까지 주고. 농담 삼아 내 눈알도 주고 마음도 줬다고 얘기했는데. 결국은 배우가 캐릭터에 동화되는 데에는 도움이… 됐나요? 이정은 어유, 그럼요. 신수원 어쨌든 저의 경험 이 녹아 있는 이야기이긴 한데, 이건 다큐멘터리는 아니잖아요. 지완이 저 자체라고 할 순 없어요. 어떤 부분은 정은 씨가 소화해서 만든 지점이니까요.

이정은 배우가 집중한 지완의 모습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이정은 특별하게 저만의 캐릭터를 만든다는 느낌을 갖기보다는 끝까지 꿈과 이상을 잃지 않고 젊은 생각을 유지하는 지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감독님과 이어진다는 생각을 했어요. 감독님이 늘 옷도 청년처럼 입고 다니시거든요. 그런 점이 좋게 느껴졌고, 저도 그렇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다 갖추고 나니 ‘점점 똑같아지는 거 아니야?’ 싶긴 했죠.(웃음) 신수원 한 번은 연출부가 정은 씨한테 ‘감독님!’ 하고 부른 적도 있어요.

<오마주>는 12년 전, 대한민국 1세대 여성 감독인 홍은원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수원 영화에 몸담은 지 10년이 넘은 2020년쯤에 이 영화를 구상했어요. 끊임없이 달려오면서 흥행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미미한 스코어를 보면서 몸도 지치고, 같이 작업한 배우나 스태프들에게도 미안하더라고요.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어요. 그때 다큐멘터리의 실존 인물이던 편집 기사님이 해준 말이 생각났어요. “신 감독은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어. 은원이는 그렇게 못했는데, 신 감독은 좋은 사람들 만나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그분이 바닷가 마을에서 홀로 사셨거든요. 거기서 손 흔들면서 인사하던 모습과 그 말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마주했던 1세대 여성 영화인들의 이야기에 나의 불안과 고민을 녹여내는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고, 그렇게 <오마주>를 만들었어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지완의 생각과 시선을 따라 흐릅니다. 이 역에 이정은 배우를 떠올린 이유는요? 신수원 주인공이 홀로 끌고 가야 하는 이야기니까 기본적으로 연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톤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싶었고요. 정은 씨에 대해선 여러 작품을 보면서 진짜 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영화 <미성년>을 보고 어떤 아우라를 발견했어요. 바로 김윤석 감독님께 연락해서 말씀드렸죠. 같이 하고 싶다고요. 이정은 그 연락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하겠다고 답을 드렸을 거예요. 기존에 하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모색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때마침 그때 만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인데다 이야기가 지닌 흥미로운 지점도 좋았거든요. 그리고 감독님이 워낙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신수원 꼬시려고.(웃음) 이정은 좋을 거라고 해주시니까 용기를 내봤죠.

어떤 의미의 용기였나요? 이정은 부지영 감독님의 <여보세요>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연을 해봤지만, 이렇게 긴 영화에서 호흡을 이어갈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모험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 부분에서 감독님께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도전한 것 같아요.

현장에서 이정은 배우에게 ‘더 하지 말고 덜 해달라’는 디렉팅을 하셨다고요? 신수원 시나리오가 코믹한 부분도 있고, 정적인 부분도 있고, 어떻게 보면 어두운 부분도 있거든요. 그 지점을 잘 정리해서 끌고 가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튀겠다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살다 보면 꺼이꺼이 울다가도 맛있는 거 먹으면 신나고, 남편이랑 싸우다가 갑자기 웃을 일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그런 일상의 면면을 담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조금 자연스럽게 눌러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정은 그동안 조연으로 서포팅하는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신을 더 재미있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감독님께 많이 여쭤보고 모니터링을 세심하게 하면서, 특정한 장면에서 튀는 게 아니라 지완의 감정선이 잘 이어지는 데 집중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가만히 있을 때 제 얼굴이 되게 좋더라고요.

 

 

지완이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것만큼 지완이 좇는 1세대 여성 감독의 영화와 그에 대한 마음을 탐구하는 시간도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안에서 ‘오마주’하는 존재들에 대한 생각들이요. 이정은 사실 그 시절 여성 감독들이 어떤 영화를 만들어서 그 영화의 결과가 대단히 유익하고 어쩌고 하는 기록적인 부분보다 다른 게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너무나 어려운 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나아간 것, 하지만 다음 작품을 이어가지 못하는 상황들. 그럼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다음 영화를 준비했던 모습들이 어느 정도는 지금과 닮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 영화가 흥행을 하든 못 하든, 맨 먼저 앞장서서 영화를 만든 분들이 남기고 간 것들에 감사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싶었어요.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고요. 신수원 과거의 감독이든, 동시대의 감독이든 그 사람들이 만든 영화의 유산 안에서 내가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목을 <오마주>로 지었거든요. 홍은원 감독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난 후 가장 크게 남은 게 그림자처럼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영화를 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이었어요. 물론 김기영, 이만희, 임권택 감독님 모두 훌륭하시잖아요. 그들의 유산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해외의 거장들이나 이창동, 박찬욱 등 동시대의 선배 감독들에게 받은 영향도 있고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내가 몰랐던 미지의 여인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바로 1960년대에 활약한 여성 감독들이요. 그 존재를 접한 후론 그들이 지닌 기개가 저한테 직접적으로 전해졌어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선배들에게서 얻은 힘, 그걸로 이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만약 두 분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어려운 여건에서도 연기하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이정은 모르겠어요. 저는 시대에 반발도 하고 순응도 하는, 약간 회색분자처럼 살고 있거든요. 좋아하는 일이었으면 하려고 했을 텐데 그 판로를 찾을 수 있었을까 싶어요. 이분들처럼 개척해서 살 수 있었을까, 아이를 들쳐 업고 영화 하나 믿고 영화판에 나올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영화를 좋아했을 거예요. 신수원 나는 그 시대였으면 빨래하고 있지 않았을까?(일동 웃음) 아버지가 “야, 수원아 이리 와서 빨래 좀 해” 이러고. 학교 가고 싶다고 하면, “학교는 무슨, 계집애가” 이럴 것 같은데요.(웃음) 이정은 집을 나갔을 수도 있지. 신수원 그랬을 수 있어. 사당패 가서 꽹과리 치고 다녔을지도 몰라. 이정은 흥이 많으니까.

반대로 다음 세대를 생각해본다면요? 다음 세대에 남겨주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신수원 아직 워낙 부족해서 뭔가 영향을 줄 만한 건 없어요. 그냥 ‘존버’ 해라.(웃음) 이정은 나도 그 얘기하려 했는데! 살아남아라.(웃음) 신수원 코로나19 이후에 영화를 찍는 게 더 힘들어졌잖아요. 그렇지만 그냥 버틸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잔인한 말이지만요. “정말 좋아하면 어쩔 수 없어. 네가 좋아하는 거 만들려면 그거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아”라는 거죠. 먼저 이 길을 걸었다고 해서 답을 줄 수는 없거든요. 답을 누가 알아요. 저도 죽을 때까지 정답이 뭔지 모를 것 같아요. 이정은 저도 똑같은 말을 며칠 전에 했어요. 후배 배우가 “선생님, 저는 어떻게 가야 하죠?” 이렇게 묻더라고요. 열심히 출연해야지, 보여줘야 내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생기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러니까 영화에서 편집 기사님이 지완에게 했던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라는 말이요. 그거 되게 중요한 말이지 않나 싶어요.

이 영화는 1세대 여성 감독의 영화 <여판사>의 소실된 장면을 찾아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계속 영화를 해나갈 힘을 얻기 위한 지완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과정에서 지완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언제였을까요? 신수원 아들이 그러잖아요. “아빠가 꿈꾸는 여자랑 살면 외롭대. 그건 아빠만의 문제가 아니야. 엄마는 엄마 꿈만 중요하지”라고요. 그때 지완은 ‘내가 뭘 위해서 이제까지 살아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답도 못해요. 그 부분에서 좌절을 느끼고 다음에는 몸도 약해지잖아요. 그렇게 모든 걸 놔버리려 할 때 소실된 필름이 발견돼요. 그런 것 같아요. ‘나 이제 힘들어. 못할 것 같아. 안 해’ 이러고 있는데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야, 너 뭐 해. 해야지’라며 톡 건드리는 거죠.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을 만날 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게 신기하고 좋아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본인에겐 선물 같은 순간을 만나는 것이요. 이정은 저는 그 장면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어요. 소실된 필름을 찾아서 편집 기사님과 마당에 걸린 흰 천을 스크린 삼아 돌려 보는 부분이요. 그 장면이 남들은 모를지라도 두 사람에겐 굉장히 가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라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일상에서 요만한 천 위에 그려진 이야기를 같이 보고 기억하는 것.

그때 지완과 편집 기사님이 무척 즐거워 보였어요. 영화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되던 지완의 여정이 저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 이어졌구나 싶었고요. 이정은 저는 잃어버린 필름을 찾겠다고 기어코 가는 지완을 보면서요, 감독들 참 끈질기다 싶었어요.(웃음) 그런 집요함 덕분에 영화가 만들어진 것 같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