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영웅 홍경

재킷, 셔츠, 보타이, 뱅글 모두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약한영웅 홍경

티셔츠 그렉 로렌 바이 지스트리트 494 옴므(Greg Lauren by G.Street 494 Homme).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늘 함께 작업한 스태프 중 한 명이 홍경 배우가 <D.P.>에서 후임병을 폭행하는 ‘류이강’을 연기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평소에도 이런 이야기 많이 들을 것 같은데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이미지와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내가 뭘 하긴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사해요. 잠시 등장했는데 기억해주시는 것도 그렇고요.

wavve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을 촬영하고 오는 길이죠? 네, 오늘로 3일째 촬영했어요.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성장물이에요. 두 친구를 동경하며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복잡다단한 감정선을 지닌 ‘오범석’을 맡았죠. 요즘 인물의 어떤 면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며 누구나 한번쯤 지닐 법한 감정을 품은 인물이에요. 자아가 정립되지 않았을 때는 자꾸 옆을 보게 되고, 바깥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게 되잖아요. 타인의 시선 그리고 자의식, 소속감이 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범석에게서 발견하고 있어요. 동시에 그렇다면 나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신경 쓰며 살고 있는지 돌이켜보려 해요.

본인은 어땠어요? 섬세한 청소년이었나요? 그렇게까지 섬세하지는 않았고요.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이랑 축구 하는.(웃음) 혼자 있는 시간에 영화를 많이 보던 아이였어요.

영화라는 매체는 때때로 보는 이를 감정적으로 섬세하게 만들기도 하잖아요. 주로 어떤 영화를 봤어요? 시네필이라고 할 순 없지만(웃음) 영화 취향은 분명해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모든 작품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영향을 받고 있어요. 저런 작품에 참여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을 정도로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대표작인 <펀치 드렁크 러브> <마스터> <데어 윌 비 블러드> <팬텀 스레드> 등을 보면 욕망과 탐욕 혹은 치밀한 관계성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잖아요. 영화의 어떤 지점이 본인을 사로잡은 것 같아요? 평소 경험하지 못한 섬세한 감정들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자꾸 내 피부와 마음을 건드는 매혹적인 지점들이 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저마다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하지만 그 체험이 배우의 길로 이어지진 않잖아요. 배우가 될 만큼 매혹적이었던 건가요? 그 영화들이 자극을 줬고, 연기를 하게끔 이끌었지만 실제 배우가 돼 연기를 할 때 느끼는 좋은 순간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건 몰입의 순간이에요.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등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 없이 그저 하게 되잖아요. 저에게는 연기가 그런 순간의 연속인 것 같거든요. 매 순간 완전히 그 인물이 되는 경험이 드물기도 하지만 그 몰입의 순간을 지속하고 싶고요.

 

약한영웅 홍경

테디베어 재킷과 탱크톱, 네크리스, 팬츠, 부츠 모두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약한영웅 홍경

약한영웅 홍경

2017년 데뷔 이후 5년의 시간이 지났어요.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 본인에게 어떤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일은 정해진 경로가 없잖아요. 누군가는 일찍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봐주는 분들이 없다면 해나갈 수 없는 일이고요. 돌아보면 저는 슬로 스타터였던 것 같아요. 지나온 시간 동안 배운 게 많아요. 영화나 드라마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배우는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경험했어요. 아마 갑자기 높게 점프를 했다면, 내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했다면 부담이 됐을 거예요. 연기는 작품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이니 지금도 언제 어떻게 점프를 하든 부담이 되겠지만, 그래도 저 나름의 유연성을 갖출 수 있게 만들어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호흡에 맞춰 지금에 이르렀다는 말로 들립니다. 맞아요. 그 과정에서 힘든 지점도 있었지만 소망한 일들을 이루기도 했어요. 어떤 작품,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바람은 없지만 좇고 싶은 건 있어요.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피부에 와닿는 작품과 역할을 해나가고 싶어요. 거울 같은 이야기들이요. 보편적으로 누구나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어도 혹은 보기 불편하고 도전적인 작품이어도요. 그런 이야기들에 제가 쓰였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결백> <D.P.> <약한영웅> 등 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해왔다고 생각해요. 잘 지켜나가고 싶고요.

홍경 배우에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상을 안겨준 영화 <결백>의 ‘안정수’를 시작으로 <정말 먼 곳>의 ‘현민’, <D.P.> ‘류이강’ 등 다양한 각도에서, 다층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 연기했어요. 두려움도 있었을 텐데요. 작품을 공개한 뒤 받는 감상이나 평가는 어쩌면 연기자에겐 성적표라 할 수 있잖아요. 두렵죠. 여전히 잘 모르겠고, 어려워요. 근데 그런 건 있어요. 적어도 이미 했던 역할이나 연기를 다시 하거나, 내가 편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지는 않았어요. 그거 하나는 제 마음에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아요. 맞아요.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만이 제 목표는 아니에요. 작품에 내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멋져 보여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는 아니거든요. 그런 것들은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에 대한 확신은 있어요.

배우로 살아가는 데 본인이 가진 타고나거나 혹은 훈련된 성정 중 도움이 되는 점이 있다면 뭔가요? 승부욕이 강해요. 예전에 한 감독님이 저를 두고 ‘경주마처럼 달린다’라고 표현하셨어요. 마음속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해나가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면 때로 사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져서 단점이 될 때도 있죠. 누구나 그렇겠지만, 간절함이 강한 편이에요.

 

약한영웅 홍경

스트라이프 수트 허즈번드 파리(Husbands Paris). 셔츠, 스니커즈, 넥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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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디올 맨(Dior Men), 셔츠 아워레가시(Our Legacy), 팬츠, 스카프,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약한영웅 홍경

인상 깊은 점 중 하나가 한 인터뷰에서 강화길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고 말한 것이었어요. 굉장히 동시대적인, 젊은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게 새삼 낯설고 놀랍더라고요. 영화보다 글로 채워진 소설이 더 좋을 때가 있어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거든요. 김진영 철학자의 <아침의 피아노>도 좋더라고요. <아침의 피아노>는 한강 작가님이 한 인터뷰에서 외국 생활을 하던 때에 한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챙긴 책이라고 소개하면서 알게 됐어요. 이미 유명한 책이고 저는 뒤늦게 읽게 됐는데 마음에 큰 위안이 되더라고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도 읽고 있어요.

보는 것과는 다른, 읽는 것이 주는 기쁨과 위안이 있죠? 현실에서는 뭔가를 느끼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맞닥뜨리기보다는 도망가고 싶잖아요. 하지만 책은 그런 지점에서 그냥 조용히, 솔직하게 한번쯤 맞닥뜨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나도 이랬었지 하면서.

지금 이 순간 가장 작은 소망이 있다면 뭔가요? ‘최선을 다해, 건강하게,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예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마음이 닳지 않아야 할 것 같아요. 마음이 닳는 것. 그게 가장 두려워요.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어떤 종류의 것들은 느끼기 싫어서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회피하고 도망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걸 크게 맞닥뜨렸을 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이 이야기가 무섭게 다가왔어요.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피하고 도망쳤다가 훗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들이 생길까 봐요. 냉소적으로 변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이에 대한 경각심은 늘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나? 나는, 기쁜가? 화가 났나? 슬픈가? 슬프다면 무엇을 보고 슬픈가?’ 하며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요.

비단 배우이기에 깨닫는 각성은 아닌 것 같아요. 부족하지만, 삶과 사회에 대해 보다 깊이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무차별적이고 극단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연대 의식이 생겨야 하는데 연대 의식을 만들어내는 수단에 영화도 포함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내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나란히 앉아서 2~3시간 동안 함께 영화를 보고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맞아요. 그 순간만큼은 연결돼 있죠. 그런 순간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우리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더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요. <D.P.>가 그랬던 것처럼요. 서로 마주 보고 서로 자기 입장만 이야기하면 싸우기 십상이잖아요. 그보다는 어떤 것을 함께 보고, 읽고 교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음 한편에 그런 소망을 품고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영화가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죠. 부드럽게 타이르는. 싸우지 않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