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영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드라마 <펜트하우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난해 연말 시상식에서 연기대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연기대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쑥스러워요. 제 연기 인생에서 아주 큰일이지만 신기할 만큼 제가 큰 상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상 이름이 어마어마해서 상을 받던 날은 아주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는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이전과 같았어요. 다만, 최선을 다했더니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구나 하는 감회가 드는 정도. <펜트하우스>는 연기에 원 없이 도전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천서진’이라는 인물은 배우 김소연이 그때까지 쌓은 필모그래피에 미뤄 봤을 때 의외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소름 끼치는 악역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내가 과연 이 악역을 잘해낼 수 있을지,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 작가님을 만나 마음을 확실히 정했고, 이후 대본을 읽는데 가슴이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심장이 마구 뛰었어요. 1부 엔딩에 어린 시절의 천서진이 등장하는데, 꼭 제가 직접 그 장면을 연기하고 싶었어요. 감독님이 여러 요소를 잘 조율해주신 덕분에 아역 배우를 쓰는 대신 제가 어린 천서진을 연기할 수 있었고, 촬영하면서도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게 딱 2년 전 이맘때 일이에요.
배우에게 악역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악역은 연기자로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어마어마해요. 감정의 증폭도 크고 표현할 때도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서 악역을 연기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점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때는 촬영이 있는 날이면 팀에 폐가 되지 않고 잘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어요. 그 뒤로 악역을 연기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나는 왜 그때 저런 표현을 아꼈나 싶었어요. 그런 마음이 차곡차곡 쌓였고 <펜트하우스>를 하며 감정의 증폭을 그야말로 마음껏 표현해봤죠.
그만큼 연기하는 동안 감정 소모가 컸을 테죠. 작품이 끝나고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힘들었죠?’예요. 하지만 전 사실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즐거웠죠. 어려운 장면이 많았지만, 감독님이 카메라가 도는 모든 순간에 제가 용기 있게 연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줬어요. 시즌 초반에는 당연히 긴장했지만, 그 이후로는 아주 신나서 연기한 시간이었죠.
오늘 문득 떠오르는 촬영 현장의 기억이 있다면요? 음… 글쎄요. 사실 드라마 <구미호뎐> 시즌 2 촬영을 준비 중이어서 저를 많이 비우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 작품에서 제가 연기하는 ‘류홍주’라는 인물은 한반도를 다스리는 산신 중 하나예요. 뭐랄까, 무던한 인물이 아니에요. 그래서 천서진이라는 인물의 눈빛이나 말투와 닮은 점이 조금이라도 나올까 봐 두렵기도 해요. 천서진을 연기할 때 다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연기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이 더 큰 것 같기도 해요.
지금까지 김소연이라는 배우가 선택한 작품은 모두 현실에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구미호뎐>은 의외의 선택으로 보이고요. 판타지 장르 출연을 제안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웃음) 전 원래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만화책도 엄청 좋아해요. <펜트하우스>를 마치고 <구미호뎐>을 제안받았는데, 처음엔 고민할 요소가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아니면 이렇게 매력적인 배역을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어떤 점 때문에 고민되었나요? 제가 그 작품에 들어가서 이질감이나 어색한 느낌을 주진 않을지 걱정됐어요. 대본을 보면서 저만 잘하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얼마 전에 대본 리딩을 했는데 다들 지난 시즌에서 호흡을 맞춘 덕분에 분위기가 무척 훈훈했어요. 그 안에 제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요.
류홍주라는 인물은 배우로서 어떤 숙제를 안기나요? <펜트하우스>에 출연하며 연기를 조금 유니크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사를 어떻게 좀 더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해달라고 했어요. 그 얘기가 제 뇌리에 콕 박혔죠. 그 덕분에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었고요. <구미호뎐>도 배우로서 제가 가진 여러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배우에게는 매 작품을 선택하는 순간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확신을 가지고 선택하는 편인가요? 선택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고민을 엄청 많이 하는 편이에요. 유일하게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는 게 있다면 커피 주문할 때 단숨에 라테를 고르는 정도?(웃음) 그런 제가 어느 순간부터 ‘도전’이라는 단어가 좋아졌어요. (이)상우 오빠 덕분에 더 용기를 얻게 되었고요. <펜트하우스> 때도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작가님을 뵈어야 하는데 어쩐지 좀 쑥스러워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상우 오빠가 일단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분명 즐거운 일일 거라며 용기를 줬죠. 도전이 두려워서 피하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누구나 도전의 순간에 망설이지만 그 망설임만 이겨내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더군요.
맞아요. 연륜이 쌓일수록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선택하고 싶죠. <구미호뎐>도 저에게 분명 도전이에요. 이런 기회가 제게 왔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해요. 도전이라는 말을 제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요즘 더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려 노력하게 된 것 같아요. 두려워할 시간이 없는 거죠. 이제는 저 자신에게 믿음을 가져도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선택을 주저할 때가 있었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잘해내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이 많았죠. 하지만 이제는 이 작품을 하면 분명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대하는 제 시선이 조금 바뀐 거죠. 언젠가 또 바뀔 수도 있지만, 요즘의 저는 늘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으니까요.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대하며 선택하려고 해요.
무엇이 계속 새로운 것을 선택하게 하는 걸까요? 전 원래 게으르게 지내는 것을 좋아해요. 아무 할 일이 없는 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일만큼은 계속 하고 싶어요. 작품을 찾고, 시놉시스를 읽고 싶고. 여전히 촬영 현장에 가면 초반에는 어색하고 두려움도 느끼는데 신기할 만큼 현장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데도 감사하고요.
지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언젠가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했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쉴 때는 남편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그게 행복한 삶이라 여겼어요. 그런데 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라는 작품을 하고 나서 달라졌어요. 그 드라마에서 함께 연기한 선생님들이 연습을 아주 많이 하시는 거예요. 연륜이 그렇게 많이 쌓인 분들인데도 엄청나게 준비하셨어요. 안주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반성하고, 선생님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최선이 최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오래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나요? 연기를 오래 하다 보니 저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사실이 큰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작품을 준비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마저 행복하고 설레요. 전 원래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무엇을 선택하든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 거죠. 걱정이 일종의 루틴이 되어버렸나 봐요. 걱정이 취미.(웃음) 이젠 이 일을 오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배우로서 본인은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는 것 같아요? 늦봄. 딱 오늘의 계절이네요. 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도전이 될 작품을 해내고 싶어요. <구미호뎐> 촬영을 앞둔 지금은 꼭 놀이동산 입구에 줄을 서 있는 것만 같아요. 그 안에서 얼마나 즐거울지 기대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