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들어 사는 집을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원형’의 가족은 오랫동안 왕래가 없던 할아버지의 부고를 접한다.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와 속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아버지, 장례 부조금을 두고 언쟁을 벌이는 고모들까지. 영화는 짙게 드리운 초록빛으로 원형의 가족에 자리한 문제와 갈등을 조용히 비춘다. 원형을 연기한 강길우는 우울과 어둠이 배인 가족의 이야기에서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떠올렸다.
인스타그램을 보니까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꽤 많더라고요. 사진에 관심이 많으실 거라고 짐작했어요. 사진, 좋아하죠. 찍히는 거보다는 찍는 편이 좋고요.(웃음) 찍히는 건 늘 어색해요. 제가 카메라를 들 때도 인물보다는 공간이나 사물을 주로 담는 편이에요.
먼저 개봉을 앞둔 영화 얘기부터 해볼게요. <초록밤>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한 가족의 내밀한 문제와 갈등을 그린 영화예요. 관객에게 영화를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가요? <초록밤>은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적나라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보여주는 영화예요. 어떻게 보면 천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은 뒤 윤서진 감독을 만나 두세 시간 동안 긴 대화를 나눴어요. 그 이후에 이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고요. 윤서진 감독은 <초록밤>의 연출자인 동시에 제작자예요. 다시 말해 개인 돈으로 영화를 찍은 거죠. 두려울 법하잖아요. 대중에게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고요. 그럼에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더 응원하게 됐어요.
윤서진 감독과 동갑에다 동료로서 함께 영화를 만든 만큼 이야기가 통하는 지점이 많았을 것 같아요. 각자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개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영화를 위해 필요한 대화이긴 했지만,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을 깊이 알고 가까워질 때 작품이 농밀하게 나온다고 생각해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초록밤>을 본 소감이 궁금해요. 영화가 강길우 배우에게는 어떤 잔상을 남겼나요? 저는 영화에 초록색 독을 퍼부은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초록빛 독에서 희망이 새어나와요. 원형의 가족은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내요. 무뚝뚝하고 서로 애정도 없어 보이지만, 결국 끊을 수 없는 가족의 연이라는 게 있기에 서로 기대어 살아가죠. 이 가족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희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니까요.
원형의 세계에서 유독 곱씹게 되는 장면이 있어요? 원형과 ‘은혜’의 장면들이요. ‘언제 돈 벌어서 집 사고 결혼하지?’ 이게 지금 20~30대의 현실이잖아요. 저 또한 같은 고민을 안고 있고요. 은혜와 함께하는 신에 유독 마음이 쓰였어요.
원형은 극 중에서 언제나 같은 기조를 유지하는 듯 보여요. 대사가 많지 않고 감정의 폭도 단조롭죠. 어느 때보다 덜어내는 것이 중요한 작품이었을 것 같아요. 대사가 적다기보다 말수가 적은 인물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말 이외의 것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상당히 많아져요. 원형은 전화를 한 번에 받는 법이 없고, 목소리도 크지 않으며, 말씀하신 것처럼 늘 같은 표정과 속도로 움직여요. 이런 사소한 행동이 인물의 상황이나 성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한 원형은 무기력하고 삶을 살아가는 의지나 희망이 많이 꺾인 인물이에요. 그냥 사는 거죠. 직업이 있지만 일을 통해 성취나 만족을 느끼진 못해요.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애인이 있지만 결혼도 이별도 아닌 어딘가에 애매하게 머물러 있죠. 원형의 일관된 톤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어요.
배우가 연기할 때 자기 안의 것을 꺼내 쓴다고 표현하잖아요. 원형에게는 강길우 배우의 어떤 면이 투영되었을까요? 제가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가족들하고 있을 때는 유난히 말이 없거든요. 원형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와 가족들과 있을 때가 미묘하게 다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삶을 살아가는 속도도 비슷한 것 같고요.
원형에 비해 훨씬 온화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 다르죠.(웃음) 촬영 내내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줬어요. 강길우 배우가 하이 텐션이 되는 순간은 언제예요? 텐션 높은 인물을 연기할 때?(웃음) 평소에 내가 하이 텐션이 될 때가 있나? 모르겠네요. 쉽게 흥분하거나 들뜨지 않는 편이긴 해요.
데뷔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어요. 연기를 업으로 삼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감정이 가장 먼저 드나요? 제 연기 인생 전체를 100으로 본다면 아직 10까지도 못 간 느낌이에요. 그래서 사실 과거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아요. 번아웃이 온 적도 없고요. 아직 ‘번(burn)’하지 않은 거겠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아서 그런지 오히려 시작하는 마음이라 미래가 더 궁금해요.
최근 상업영화와 TV 드라마에도 참여하며 배우로서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어요.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 드는 데는 이런 행보의 변화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처음에는 제가 환경의 변화에 적응을 잘 못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변화된 방향 안에서 견고해져 있더라고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면서 제 스펙트럼이 확장된 거죠. ‘나를 더 믿고 단단해져야겠다’, ‘앞으로도 흔들리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지금은 어때요? 자신을 많이 믿고 있나요? 그러려고 노력해요. 뭘 하든 정답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기준 삼아 연기를 할 수 있겠어요. 확신을 가지고 일단 행동에 옮겨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하기 전에는 미술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오늘 이야기를 듣고 보니 20대 중반에 이르러 진로를 과감히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림은 어릴 때부터 그렸어요. 미대에 진학했다가 군대 제대하고 복학할 무렵 전혀 생각지 않았던 연기로 진로를 틀어버린 건데, 그저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했어요. 물론 일말의 두려움은 있었죠. 욕심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 작품씩 임하면서 기회를 만들어갔어요.
배우의 얼굴에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드러난다고 하죠. 연기하지 않는 일상의 삶에서 잃지 않으려 애쓰는 자세가 있나요? 저는 배우이기 이전에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연기를 계속하다 보면 배우라는 직업에 과몰입하는 순간이 올 수 있는 것 같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적 관점에서만 사고하게 되는 거죠. 사람들 앞에 서는 직업이고, 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표현의 대상은 대부분 사람이에요. 그러니 더더욱 배우라는 틀을 벗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연인으로서 나에 대해 고민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마무리할까요. 여름이 무르익고 있어요. 올해의 남은 기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요? 건강해야죠. (잠시 정적) 너무 재미없나?(웃음) 오늘 계속 도인 같은 소리만 하네요. 근데 건강해야 스케줄도 소화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배우로서 성취만큼이나 나를 잘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온전해야 일도 잘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럼요. 내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여름, 좋아하세요? 저는 추운 게 너무 싫어요. 여름이 좋다기보다 추운 걸 질색하는 사람이에요. 겨울엔 그냥 겨울잠을 자고 싶어요. 지금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났는데 수리 기사님이 일주일 넘게 연락이 없으세요. AS 예약이 많이 밀려 있나 봐요. 근데 저는 금세 적응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걸 넘어서 여름에 최적화된 인간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웃음) 그러네요. 앞으로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해야겠어요.(웃음) 사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봄이나 가을보다 여름의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추우면 몸도 굳고 움츠러들잖아요. 땀 흘리는 여름엔 건강한 생기가 느껴져요.
그렇다면 지금이 강길우 배우가 가장 하이 텐션인 때가 아닐까요? 하하. 지금요? 이게 텐션이 제일 높은 상태면 안 되는데.(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