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들으니 목소리가 더 좋네요. ‘중저음’이라고만 설명하기엔 아쉬울 정도로요. 연기하기 전에는 제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은 탓인지, 저도 그 말에 동조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을 하면서 목소리가 좋다는 얘기를 들으면 좀 신기했어요. 칭찬을 몇 번 들으니까 다시 생각해보게 되던데요.
지금은 어때요? 보통이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래도 이제 편견 없이 제 목소리를 인지하게 됐다는 점은 좋아요.
성악을 배운 적 있어요? 나무위키에 특기로 적혀 있는 걸 보고,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던데요. 되게 설레는 헛소문이네요. 그거 잘못된 정보예요. 제가 노래를 좋아하긴 하는데, 마음대로 잘 부르진 못하겠더라고요. 사실이면 좋을 텐데 싶어 왠지 아쉽네요.(웃음)
배우로서 두 번째 여름을 맞이했어요. 지난여름엔 <D.P.>로 뜨겁게 주목받으며 시작했다면, 올여름은 마음의 파고가 조금 잦아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상치 못한 시작이었어요. 극 전체가 아니라 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그렇게 주목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남성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에 몇 안 되는 여성 인물이니 도드라져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의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어요. 지난여름은 줄곧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지낸 것 같아요. 제 세계가 갑자기 확장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사실에 설레고 떨리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어요. 이제는 그 마음이 많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감흥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어요.
감흥이 이어지는 데에는 다음 작품인 <소년비행>도 한몫했을 것 같아요. 다정은 늘 사건의 중심에 있고,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주인공이잖아요. <D.P.>의 ‘영옥’ 역을 맡았을 때와 확실히 다른 무게감이 있었어요. ‘다정’을 이해하고 해석해서 연기하는 것 외에도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거든요. 촬영 분량이 많다 보니 잠깐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훅 지나버릴 것 같았고요. 계속 집중하려고 애쓴 기억이 나네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꽤 굵직한 경험들을 해왔어요. 그사이에 성장의 순간을 체감한 적도 있을 텐데요. 계단식으로 훅훅 올라가는 게 느껴지면 더 저를 믿고 ‘가보자!’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진 않았어요. 잔잔하게 가다가 성장한 건가 싶은 짧은 순간들이 오가는 정도였어요. 성장보다 적응했다는 말에 더 가까울 거예요.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차 안에서의 모습이 전과는 다른, 조금은 편안해진 상태였고요. 현장에서 대기할 때도 처음처럼 극도의 긴장은 사라지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돌아보면 그런 것들이 성장이 아닐까 싶어요. 연기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고요.
연기 외에도 현장에 적응하고 작업하는 이들과 소통하는 것도 배우의 일이니, 그 부분에서의 성장도 중요하죠. 전에는 저를 불편하게 느끼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건 아마 제가 벽을 두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일을 하면서 좀 말랑해졌어요. 이제는 현장에서 처음 보는 분과도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런 면에선 대단한 발전이죠.
그게 변화일까요? 아니면 실은 본래의 모습이었을까요? 둘 다 맞는 것 같아요. 변화이지만 그게 실은 제 안에 있던 모습이기도 해요. 시기마다 상황마다 드러나는 제 성향이 있잖아요. 아주 어릴 땐 밝고 활발했는데 학교 다닐 땐 친구 만나는 시간보다 책 보는 시간이 더 긴 문학소녀였거든요. 그런데 성인이 되고 일을 하면서 다시 밝아지고, 사람을 더 편하게 대하게 되었어요. 어쨌든 지금이 더 좋아요. 친구가 많이 생겼거든요.(웃음)
친구보다 책이 좋아 책에 빠져 살던 문학소녀가 어떻게 배우를 꿈꾸게 된 건지 궁금해지네요. 어릴 때 책만큼 그림을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직업으로 생각해보면, 왠지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 이후로 다른 직업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갑자기 3년 후에 성인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불안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내내 직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뭘 좋아했지? 글 공부? 그런데 영화도 좋아하는데? 그러다 그냥 연기를 배워볼까 싶더라고요. 연기가 좋아서라기보다 되게 어려울 것 같지만, 해내면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뭔가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어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주말마다 연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죠.
해보니까 어땠어요? 예상이 맞았어요. 처음 2년간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깨고 싶었어요. 포기하면 도망자가 되어버리는 것 같고, 용기도 잃을 것 같고, 그래서 이겨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 힘으로 계속하다 운 좋게 연기과에 진학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지속하는 과정에서 작은 재능을 발견하기도 했겠죠? 재능이요? 있었으면 참 편했을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좀 느렸어요. 고3 때나 성인이 되어 연기를 시작한 친구들도 있던데, 저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연기 학원을 다니지 않았더라면 절대 한 번에 대학에 못 갔을 거예요. 이른 나이에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점에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길을 빠르고 명확하게 찾는 것 역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가요.(웃음)
이제 신작 얘기를 해볼까요? 삶의 끝에 선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에서 ‘하준경’ 역을 맡았다고요? 이전에 연기했던 인물들보다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평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해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며 연기했나요? 원래는 이유를 많이 따지는 편이에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런 게 납득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인물은 달랐어요. 일단 그냥 했어요. 너무 어려운 인물이니, 제가 이유를 찾으려 하면 스스로의 굴레에 빠지게 될 것 같은 느낌인 거예요. 그래서 ‘얘가 하니까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그간의 집착을 버리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해나간 게 컸어요. 신기하게 거기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셈이네요. 그럼에도 여전히 ‘왜’라는 질문은 잃지 않으려 해요. 그게 한 인물의 중심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저의 방식이거든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그 인물이 되는 건 아니니까, 밖에서 접근하는 작업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다음 문제는 ‘왜’에 대한 저만의 답을 어떻게 내 몸으로 가져오느냐인데, 이를 연기로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얻은 셈이에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말과 행동의 연유를 이해하는 것만큼 그 인물 자체를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용기를 낸 거라 생각해요. 지금 제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용기요.
용기란 단어가 마음에 남네요. 어떤 선생님께서 배우는 용기를 내는 직업이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게 정말 맞는 말임을 매번 느껴요. 그래서 연기하는 거, 되게 멋진 일인 것 같아요.
곧 다음 작품 촬영에 들어간다고요. 다시 용기를 낼 시간이 오고 있네요. 맞아요. 그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해 잘 쉬어야 할 것 같아요.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속 비가 오네요. 저 비 오는 거 좋아해요.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눈이나 비, 우박 다 좋아해요. 그래서 이런 여름의 휴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