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임시완과 함께한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

레더 점퍼와 레터링 티셔츠, 블랙 팬츠 모두 벨루티(Berluti), 워치 예거 르쿨트르 (Jaeger-LeCoultre).

배우 임시완과 함께한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

블랙 퍼프소매 셔츠 김서룡 옴므 (Kimseoryong Homme), 네크리스 베루툼(Verutum), 링 트렌카디즘 (TrencadisM),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머리가 꽤 길어요. 전에도 이 정도로 길러본 적이 있었나요? 영화 <변호인> 때도 이 정도 길이이긴 했는데, 그땐 더벅머리에 가까웠죠.(웃음) 그때 말고는 처음이에요. 군대에 다녀온 이후에도 계속 짧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거든요.

어때요? 외형이 달라지면서 움직임이나 다른 스타일이 변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저는 머리를 감을 때와 말릴 때 이전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 말고는 딱히 변화가 없어요.

철저하게 기능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네요.(웃음) 그런 것 같아요. 헤어스타일에 크게 관심을 갖는 편이 아니어서.(웃음)

보는 사람들은 꽤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아요. 토록 온화한 얼굴을 지닌 배우가 영화 <비상선언>의 악역 ‘류진석’이라니, 그 간극에 놀라는 거죠. 획기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할 수 있겠다는 계산적인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에도 결과적으론 적잖이 놀라는 분이 많기는 하더라고요. 무대 인사 때 그런 반응을 꽤 많이 접했어요. 한번은 시사회에서 제가 인사할 타이밍에 어떤 분이 ‘나쁜 놈아!’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웃음)

배우 임시완과 함께한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

변신을 위한 계산은 없었을지라도 본인이 지닌 모습과 류진석이 보여주는 악 사이의 간극 때문에 고민되는 지점은 있었을 것 같아요. 간극에 대해서는 고민이 있었죠. 어쨌건 이전에 맡은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선역과 악역을 나눴을 때, 비중으로는 선역이 더 많았으니까요. 지금 배우로서 제가 가진 이미지는 그 선인 역의 영향을 받았을 테고요. 그래서 더 류진석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간극을 좁히는 길이 아니라, 간극 자체를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을 잘 그려내는 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지 고민한 거죠.

어떤 방식을 시도했나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뭔가를 구태여 하지 않는 거예요. 빌런이 지닌 전형성을 오히려 따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빌런 하면 쉽게 떠올릴 법한 표정, 말투, 행동을 따라가지않고 그냥 제가 가진 양식으로 해보면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확실히 관객으로서 그런 지점에서 놀라움과 충격을 느꼈어요. 악역 하면 으레 짐작하게 되는 모습이 없는 데다 별다른 서사도 없어요. 류진석의 악행은 마치 어떤 미션을 해결하는 단순한 행위처럼 보여요. 그렇지만 배우로서는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려둔 서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이야기가 크게 복잡하지는 않아요. 우선 영어에 능통하다는 건 영어 생활권에서 살았다는 건데, 그 안에서 주류에 속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을 것 같아요. 문화적, 경제적으로 소외 계층이었기 때문에어딘지 모르게 주눅 드는 삶을 살았을 테고요. 또 그 집단에서 바람직한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면서 피해 의식이 점점 쌓였을 거예요. 저는 어찌 됐건 그 피해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전사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매체를 접하게 되는데, 그 속에서는 누군가를 혐오하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무언가를 본 거죠. 그러면서 점점 더 왜곡된 혐오감이 커졌을 거예요.

본인의 혐오감에 대해 합리화한 거겠죠. 네. 그러면서 급기야 ‘그런 존재가 사회악이다’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을 테고, 이제 본인이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하는 거죠. 류진석의 범죄는 정화 작용이라는 신성한 의식을 치러야겠다는 자신만의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배우 임시완과 함께한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

화이트 스트라이프 레더 셔츠와 팬츠, 슈즈 보테가 베네타(Bettega Veneta), 블루 다이얼 워치 예거 르쿨트르 (Jaeger-LeCoultre).

신기하네요. 대개 어떤 인물을 파고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이 들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방금 류진석의 서사를 언급할 때, 그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인물과 어떤 공감대를 만들고자 했다면 저는 애초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지금 제가 늘어놓은 이야기도 다 그럴듯한 헛소리거든요.(웃음) 이 헛소리에 공감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어떤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걸 토대로 만들어갔어요. 프로파일링을 했다는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일 것 같아요. 이해는 하되 정서적으로 다가가지는 않는 과정이었어요.

그렇게 만들어낸 류진석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쉬움만 보였어요. 2년 전에 촬영한 작품이거든요. 이후 연기에 대한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고, 지금도 계속 변화하는 중이에요. 그 때문인지 그때의 제 연기가 어색해 보이고, 부족한 점만 눈에 띄더라고요.

스스로 조금은 칭찬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관객들로부터 연기에 대해 극찬을 받고 있을 텐데요. 물론 안도감은 있죠.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좋게 봐주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은 있는데, 글쎄요. 연기에 대한 가치관을 계속 정립해가는 성장기이기 때문에 칭찬받았다고 해서 마냥 만족하지는 못 하는 것 같아요.

김소진 배우는 지난해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비상선언>이 끝난 후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파 재난영화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을 정도라는 후일담을 남겼어요. 재난을 일으키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에겐 다른 마음이 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치우는 사람이 힘들지 어지르는 사람은 힘들지 않잖아요. 저는 감독님이 ‘그냥 편하게 어지르세요’라고 디렉션을 주시면 ‘알겠습니다. 어지를게요’ 하고 마음껏 저지르는 입장이었어요. 그러곤 되게 쿨하게 죽어버리니까.(웃음) 저는 정서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비교적 막 고생하면서 촬영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재난영화를 또 하게 된다고 해도 거부감은 없을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악역이 체질에 맞는 건 아닌가요?(웃음) 분량의 문제이지 않을까요.(웃음) 고생스럽다싶을 정도로 분량이 많지는 않으니까요.

아쉽진 않았어요? 조금 더 어지르고 싶진 않았나요? 아쉬운 마음은 크게 없어요. 분량이 많았다면 오히려 괜한 부담감을 느꼈을 테고, 그 부담감이 대단한 배우들 사이에서 밑천이 드러나는 건 아닌가 싶었을 거예요. 이렇게 치고 빠지는 편이 대단히 바람직했다고 생각합니다.

첫 영화인 <변호인> 이후 <비상선언>까지 딱 10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나요? 크게 체감하지는 않아요. 물론 하나하나 다 소중한 기억이죠. 그런데 10년이나 지난 것 같지 않은 이 느낌이 문제인 것 같아요. 통상적으로 10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잖아요. 그러면 제가 그간 하나만 파헤쳐온 사람으로서 전문가가 돼서서‘이건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봤을 때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간이 저에겐 되게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거죠. 제 욕심 같아서는 군대 갔다 온 2년을 빼고, 그사이에 음악과 병행했던 시기를 좀 빼고, 작품을 하지 않고 고민하던 시기도 좀 제외하고 대략 5~6년 했다고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웃음)

첫 영화 <변호인>으로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루키상을 받았어요. 그때 한 이야기를 살펴보니 <변호인>에 출연한 것이 용기라고 말했더라고요. 지금도 매 작품을 용기 내는 마음으로 대하나요? 크건 작건 늘 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제가 예상한 범주 속에 있는 현장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순간에는 오늘 찍어야 하는 신들이 목에 탁 걸리게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요. 피하고 싶을 때도 있고요. 그런데 마음의 준비가 됐건 안 됐건 카메라 앞에 섰을 땐 어떻게든 해내야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크고 작은 용기를 내면서 사는 거죠. 그리고 그런 순간을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는 도전의 연속인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용기를 이전보다 더 잘 내게 되었나요? 거부감은 덜하죠. 그런 순간을 수없이 많이 접해봤기 때문이에요. ‘진짜 못 할 것 같은데’ 싶은어려운 숙제 같은 것들도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어떻게든 또 해졌으니까요. 한 게 아니라 해져 있었어요.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보다 유연해진 것 같긴 해요.

정의 내리지 못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실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은 각자의 직관에 따르는 일이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저는 이런 마음인 거예요. 영화에 종사하는 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여가 생활로 영화는 볼 거 아니에요. 그리고 ‘재미있다’, ‘별 볼일 없다’ 하며 평가를 내릴 거란 말이죠. 그 평가와 제가 내리는 평가의 결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인 거죠.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그래서 여전히 그 숙제를 안고 어떤 것이 진짜 좋은 영화이고, 좋은 연기인지 따져보려 하지만 딱히 뾰족하고 명쾌한 답은 찾지 못한 상태예요.

여전히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지만, 배우라는 일 자체는 사랑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고백했어요. 이 일이 주는 기쁨은 무엇인가요? 일을 일처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그게 제일 좋아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게 누군가에겐 여가 생활로 끝날 수 있지만, 연기를 직업으로 삼은 저에겐 생산적인 시간이 될 수 있잖아요. 소소하게는 지방으로 촬영하러 갈 때 마치 여행 가는 느낌이 들어 좋을 때도 있고요.

생각보다 소소한 기쁨이네요. 일에 대한 만족감은 결국 소소한 즐거움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와 반대로 이 일을 하며 겪는 슬픔이나 고난은 무엇인가요? 너무 빠져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점?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 일은 운이 작용하는 요소가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흥행 여부는 배우가 노력으로 좌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요. 또 작품의 선택을 받는 것도 노력을 기울인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고요. 고저가 있는데, 저점에서 느끼는 박탈감을 버티기도 쉽지 않을 테고요. 들이는 힘과 나오는 결과가 정량적 수치로 명확히 계산되어 나오지 않는 일이다 보니 좀 의연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 너무 빠져 있지는 말자 싶어죠.

만약 정량적 수치대로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이 일의 고난을 소거할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아마 연기 학원에 주야장천 다녔을지도 몰라요.(웃음) 수학처럼 학습한 시간만큼 온전히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신중하게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속이지 않고 연기를 해나가는 것이에요.

자신을 속이지 않는 최선. 모든 일에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요. 맞아요. 없는 데 있는 척하는 걸 삼가려는 거죠. 그런 태도가 기본 중의 기본인 것 같아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구는 건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잖아요. 그건 곧 보는 사람들까지 기만하는 일일 테고요. 솔직하게 연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