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봉련

재킷과 팬츠 모두 코스(COS),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 이봉련

두 여인

감독 장선희 출연 이봉련, 이한서 신문 배달을 하는 소녀(이한서)와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전단을 붙이러 다니는 여인(이봉련)은 각자의 여정을 지나는 중에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 서로의 사연을 꺼내 놓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여성의 삶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얘기하는 여인을 보며 소녀는 또 다른 여인인 엄마를 떠올린다.

영화 <두 여인>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기 힘든 이야기들이 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더 내 마음을 모를 것 같을 때가 있지 않나. 이 영화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 타인에게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는, 그래서 잠시나마 숨을 돌리는 마법 같은 순간을 그린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와 여인의 대화는 두 사람이 각자의 고된 여정에서 잠시나마 앉아 숨 돌릴 틈이 되어주었으니까.

원 테이크 우연히 만난 소녀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같이 앉는 순간부터 대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끊지 않고 원 테이크로 촬영했다. 실은 이야기만큼 이 촬영 방식에 흥미를 느껴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장선희 감독이 ‘선배님이면 원 테이크가 가능할 것 같다, 꼭 같이 해내고 싶다’라며 부탁하기도 했고.(웃음) 지금 돌아보면 도전 정신이 발동했던 것 같다. 배우는 늘 자신 없고, 잘 모르겠고, 어려울 것 같은 일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한 선택이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더 어려우면서 동시에 흥미로웠다. 리허설 때는 없던 트럭이 갑자기 지나갈 때도 있고, 시도가 거듭되면서 해가 지기도 하고, 그런 외부 요소에 반응하고 대응하면서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구나 싶으면서도 이런 게 묘미구나 싶었다.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연기한 현장이었다.

여인의 여정 여인과 소녀의 대화로만 이뤄진 영화지만, 실은 이건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전단을 붙이러 다니는 여인의 로드무비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기보다 이 인물이 길에서 겪었을 일에 대해 생각했다. 중간에 화장실도 갔을 테고, 내 맘 같지 않게 전단을 떼라고 하는 사람도 만날 테고, 테이프가 닳아 잘 붙지 않으면 새로 사러 가고, 그런 자잘한 상황을 상상해봤다. 때론 삶이 고통 속에만 함몰되도록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지 않나. 그래서 고통 앞에서도 결국 일상을 살아가게 되고. 울 시간도 없이 아이를 찾으러 다니는 여인의 일상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옛날로 돌아가도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그리고 지금은 내 딸을 꼭 찾을 거야.” 사람들이 여자는 아기를 낳고, 밥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시대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여인은 심지어 자신의 엄마에게 ‘네가 일을 해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자신은 일을 하겠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주체적인 여성의 다짐이라 더 기억에 남는 대사다.

흐르는 시간 ‘정말 짧다.’ 영화를 본 직후 이런 감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단순히 21분 분량의 단편영화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 체감한 시간과 결과적으로 담아낸 시간의 간극을 느낀 것이다. 영화는 끝났지만 여인과 소녀의 시간은 또 흘러가고 있겠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고. 이 작품을 하면서 시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무엇이고,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여전히 도전하는 14년의 시간 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여전히 안 해본 것이 많고, 그래서 배울 것 투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역할을 한번 해봤어’ 하며 넘기기에는 우리 삶에 너무 많은 인간 군상과 관계가 존재하지 않나. 단순하게 나누는 엄마 역할 안에도 너무나 많은 유형의 인물이 있고, 그에 따라 마주하는 인물들도 달라진다. 보는 사람은 비슷하게 느낄 수 있지만, 적어도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늘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걸 주로 해왔고, 이런 역할이 좋다 하는 건 없다. 내 역할이 크지 않을 때는 그 이야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하고, 내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에서는 또 그만의 매력으로 한다. 내가 아니어도 되겠다는 마음만 들지 않으면, 어떤 작품에서든 도전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찾으려고 한다.

서울독립영화제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결국 관객을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제가 더욱 귀하고 소중한 자리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를 꼭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끼리 만들고 보며 ‘수고했어, 참 좋더라’ 이런 식으로 끝내기에는 전하고 싶은말이, 마음이 강렬하고 너무 아쉽지 않나.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영화에 머물며 자신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길 바라는 입장에서 <두 여인>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감독과 서로 축하 인사를 나눴다. 특히 단편영화라서 이런 자리가 아니면 내 USB에나 한참 머물고 말 수도 있는데, 관객을 만날기회가 생겼으니 참 다행이고 좋은 일이다.

영화관에 가면 딴짓하지 않고 영화만 볼 수 있어서 좋다. 집에서는 일상의 잡다한 일에 신경을 빼앗겨 영화에 오롯이 집중하기가 힘들지 않나. 재미가 있든 없든 영화관에서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보게 되고, 무언가를 발견하는 게 좋다. 그래서 ‘영화는 무조건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웃음)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 창작자가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해볼 수 있고, 배우 역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가 되면 더 많은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싶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과정이 가끔은 고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제작비가 넉넉지 않아 고생도 하지만, 또 고생한 만큼 나의 한계치를 발견하고 넘어서는 작업이라 늘 뜨겁게 다가간다.

배우의 덕목 계속해서 작품에 참여하며 나라는 배우가 있다, 난 이런 걸 하는 배우다 하고 끊임없이 어필하는 게 내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배우의 덕목이자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고. 사실 관객이 어떤 작품을 보기 위해 예매하고, 영화관을 찾아오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보는 건 꽤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니 배우 역시 최대치의 애를 써서 보게끔 해야 하는 거다. 창작자와 배우, 관객이 서로 수고를 들이고 교류하며, 그렇게 더 많은 극장이 활기를 되찾기를 바란다.

 

 

 

배우 박가영

데님 셔츠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재킷과 플리츠스커트 모두 산드로(Sandro).

배우 박가영

겨울에 만나

감독 이승찬 출연 박가영, 이한주, 유시형, 권다함 동생 지원(권다함)이 세상을 떠난 뒤, 혜원(박가영)은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군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하루는 동생이 사랑했던 유진(유시형)과, 다음 날은 자신을 따라 내려온 애인(이한주)과 시간을 보낸다. 오늘과 어제, 그리고 과거의 시간들이 교차하며 혜원은 동생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겨울에 만나> 이 작품은 사실 2018년 겨울에 단편으로 촬영을 마친 이야기다. 혜원이라는 인물이 가장 사랑하던 남동생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그린 작품인데,연기하면서 내내 단편으로 끝내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이 동생을 잘 보내줄 수 있도록, 애도의 시간이 더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감독님께혜원에게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고 의견을 전했고, 4년이 흘러 장편영화 <겨울에 만나>가 탄생하게 되었다. 혜원에게 혜원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존재였을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놓지 않았던 질문이다. 동생, 동생이 사랑한 사람, 그리고 애인. 처음에는 혜원이 만나는 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를 오래 붙들고 있다 보니 결국 혜원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동생의 유품을 찾으러 가는 것도 본인의 무언가를 털어내려고 가는 길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아쉬움 없이, 후련하게 어떤 영화를 찍어도 늘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만족보다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길었고. 그런데 <겨울에 만나>는 처음으로 찍고 나서 아쉬움이 없었다. 단편으로 만났을 때부터 장편으로 가는 여정에서 혜원으로서 할 수 있는 고민은 다 한 것 같다. 혜원은 배우로서 내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은 인물이자 가장오래 고민한 역할이다. 그래서 후련한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었다.

애도의 방식 올해 유난히 나와 내 주변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크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이다. ‘내가 너무 못해준 것 같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혜원도 그런 죄책감이 굉장히 큰 인물이고, 그래서 연기하며 깊이 공감했고, 이야기가 끝날 때 쯤 작은 위안을 받았다.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도 혜원을 통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울독립영화제 오로지 잘 만든 독립영화만을 선보이겠다는 고집을 50년 가까이 지켜가고 있는 영화제다. 사실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배우로서도 관객으로서도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크다. 그래서 더 지켜주고 싶다. 매해 연말에 열려서 그런지, ‘다들 올해도 열심히 했다’, ‘내년에도 더 힘내서 좋은 고집을 잘 지켜내자’ 하는 격려의 에너지가 모이는 게 좋다.

함께하는 힘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건 참 귀한 일인 것 같다. 머릿속에 새로운 이야기가 있어도 같이 만들어 줄 스태프와 배우가 있어야 하고, 같은 마음들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지 않나. 특히 독립영화 신에서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가 영화로 나올 수 있는 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게 맞나? 재미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공유하며 확신으로 채워주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배우 김자영

블루종과 와이드 팬츠 모두 메종마레(MaisonMarais), 안에 입은 톱 코켓(Coket), 부츠 렉켄(Rekken),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 김자영

물비늘

감독 임승현 출연 김자영, 홍예서 1년 전 래프팅 사고로 실종된 손녀를 찾기 위해 매일 금속 탐지기를 들고 강가로 향하는 70대 염습사 예분(김자영). 그에게 어느 날 절친한 친구 옥임(정애화)이 찾아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손녀 지윤(홍예서)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상실의 아픔을 경험한 예분과 지윤의 관계는 숨겨져 있던 둘 사이의 진실이 밝혀지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서울독립영화제 2008년에 개봉한 <슬리핑 뷰티>로 서울독립영화제에 참석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 본선 장편경쟁 부문에 초청된 <물비늘>로 다시 찾게 되어 영광이다. 최근 팬데믹을 겪으며 사라진 영화제가 많은데, 서울독립영화제가 어려운 상황에도 꾸준히 자리를 지키며 독립영화에 힘을 보태줘서 감사하다.

영화 <물비늘>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망자를 위해 염을 하고, 술에 빠져 사는 예분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임승현 감독과 예분의 전사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감독은 예분의 남편이 염습사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난 후 예분이 남편의 직업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과 손녀를 잃은 예분의 마음에 상흔이 클 거라고 생각한다. 상실의 아픔을 딛고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이 영화에 담겨 있다.

카메라 앞에 서면 예분이 술에 취해 울부짖는 장면을 촬영하며 김자영이라는 사람을 버렸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서 인물에게 완전히 몰입해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은 참으로 어렵다. 오롯이 내 힘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라 카메라 앞에 서면 굉장히 외롭다. 감정을 완전히 쏟아냈는데도 화면에 잘 보이지 않거나, 나는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는데 감독이 오케이를 하기도 한다는 점이 내가 지금까지 연기하며 품고 있는 고민이다. 늘 진심으로 임해도 실패하는 장면이 생기기 마련이다.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 내가 살아가며 느낀 다양한 ‘진짜 감정’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기억해두려고 노력한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촬영장에 가면 느껴지는 특유의 생기가 있다. 20~30대가 주를 이루는 스태프들이 협업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하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사랑의 영화 최정열 감독의 단편영화 <잔(殘)소리>를 인상 깊게 감상했다. 매일 아들에게 잔소리하던 어머니가 고인이 되는 과정을 롱 테이크 기법으로 담아내는 시도가 놀라웠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독립영화의 매력이다. 순수하게 창작한 독립영화 한 편이 많은 것이 실종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믿는다. 상업 영화 같은 화려한 면모는 없지만, 독립영화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세상에 꺼내 보인다. 그것이 관객의 마음에 닿을 때, 사랑이 피어오른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를 위해 독립영화를 상업영화계로 향하는 가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업영화에는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는 반면, 독립영화를 위한 지원은 부족한 현실이 아쉽다. 적절한 지원이 이뤄진다면 기가 막힌 독립영화들이 탄생할 거라고 믿는다. 언젠가 내게 자본이 많이 생긴다면, 독립영화를 위해 아낌없이 쓸 것이다. 지금 선언한 거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