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선산>을 촬영 중이죠? 드라마 <트롤리>는 방영되고 있고요. 지금 딱 일주일 쉬는 중이에요. 원래는 작품 하나 마치면 휴식 시간을 충분히 갖는 편인데, 이번에는 촬영이 좀 몰렸어요. 이때만 기다리며 달려온 것 같아요.
일주일 중 귀한 하루를 내어주셨어요. 아니에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터뷰가 힘들지.(웃음)
1월 20일에 연상호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실사영화이자 넷플릭스 영화 <정이>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황폐화된 가까운 미래. 전쟁을 끝내기 위해 AI 연구소 팀장 (강수연)이 자신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영웅이었던 군인(김현주)의 뇌를 복제하는 연구를 시작한다.’ 시놉시스를 보면 SF 장르물의 주요 소재인 인간 복제를 다루고 있어요. 익숙한 소재임에도 여타 SF와 다른 지점,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연상호 감독님은 다양한 소재를 다뤄왔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아요. 이번 영화에도 그런 지점이 있고요. 인간과 외형이 아주 흡사한 로봇을 만들어낸 미래에 인간이 오히려 인간 같지 않고, 로봇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보게 되는 지점이 흥미로워요. SF는 아직 우리나라 작품으로 접하기 쉽지 않은 장르잖아요. 이를 시도하는 데에는 많은 이 들의 용기와 재능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연상호 감독님이 <지옥>에서 나에게 액션 연기를 시켰잖아요. 이제껏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모습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니 <정이>는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기도 해요. <지옥>에서 도전한 액션 연기에 일종의 종지부를 찍고 싶기도 했고요.
SF 장르물에서 여성 배우가 핵심적 역할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 그것도 최정예 에이스 용병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죠. 나아가 이 역할을 중견 배우가 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희열을 줍니다. 예고편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뒤늦게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작품을 맡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겁이 나기도 했는데 동시에 이런 작품을 언제 또 할 수 있을까, 하기를 잘했다 싶었어요. 저도 왜 나를 선택했을까 생각해봤거든요. 이야기 진행상 그래야만 하는 역할인 것 같아요. 저에게 기대한 정서적인 부분, 감정적인 연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감정적인 부분이면 연구소 팀장 ‘서현’ 역을 맡은 고(故) 강수연 배우님과 모녀 관계로 등장하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제 나이대여야 하는 상황이 있어요.이번 작품을 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질문보다는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인간다운 것은 무엇일까?’, ‘이중에서 어떻게 인간을 찾아낼 수 있지?’ 하는 질문이요.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인간이 갖는 깊은 관계성에 있는 것 같거든요. 개인과 개인 사이,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야말로 기계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엄마와 자식,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답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연상호 감독은 그간 몇차례 디스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고요.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이야기한다면 디스토피아는 현실을 극대화해 어두운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오늘의 우리’에게 성찰할 기회를 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갖게 된 관점이나 생각이 있나요?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좀 갖게 됐어요. 불확실, 불안정 등 왜 우리는 불(不) 자가 붙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하잖아요. 한데 이 또한 인간이기에 겪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완전하지 않아도, 실수해도 괜찮다.’ 그게 가장 인간다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나 자신에 대해 여유가 없고, 잘 용납하지 못하는 성향이었어요. 실패나 실수를 많이 두려워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실수해도 되고 바로잡으면 된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지표가 되는 작품이기도 해요.
로봇을 연기하며 외려 인간됨에 대해 생각했네요. 그리고 노화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제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거든요. 오랜 시간 집을 비울 때는 못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늘 집을 말끔히 치우고 떠날 정도였어요. 나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있었죠.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옅어졌어요. 내가 자의로 태어난 게 아니며 태어났으니 살아진 것이고, 조금 더 열심히 살고 싶어 애써왔지만 결국 어느 순간 숨이 멎는 것이 인간인데 내가 그 순리를, 죽음을 피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공포심이 옅어진 것 같아요.
<정이>는 강수연 배우님의 11년 만의 복귀작이자 유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작품이죠. 강수연 배우님과의 만남도 깊이 각인되었을 것 같습니다. 강수연 배우님의 어떤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시는지요? 앞서 말한 삶과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선배님과 함께하는 현장이 참 좋았어요. 같이 연기를 하는 게…(잠시 침묵) 큰일 났어요. 작품 홍보를 하며 선배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잠시 침묵) 이전에 선배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제가 영화를 많이 안 했기 때문에 접점이 없어서 <정이>에서 처음 뵈었죠. 처음에는 선배님이 왠지 무서울 것 같아 긴장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하니 친구 같은 어른이고, 늘 유쾌하셨어요.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건 선배님 목소리와 웃음소리예요. 촬영 외에도 모임을 자주 가졌거든요. 연상호 감독님, 류경수 배우까지 넷이서 개구지게 놀았어요. 저희가 평소 함께 사진을 찍진 않았는데, 하루는 선배님이 “현주야, 우리 사진 찍자. 우리 사진 한 번도 안 찍었잖아” 하며 찍자고 하셨어요. 사적인 사진은 그때 찍은 사진이 유일해요. 동영상을 찍었는데, 선배님은 사진인 줄 알고 정지 포즈로 오래 계시기에 “선배님, 이거 동영상이에요” 하니까 까르르 웃으셨죠.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 지 않아요. 그 웃음소리,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요. 때때로 꿈을 꾸기도 했고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분이 마음을 깊게 나누셨군요. 좋은 영향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작품을 시작할 때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야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끊임없이 질문해야 답이 나오니까요. 드라마 <트롤리> 준비하면서 막막한 마음에 선배님에게 촬영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도무지 모르겠다고 제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선배님이 “얘, 끝날 때나 잡히지. 그게 되니” 하셨어요. 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선배님도 그러시구나, 다 그런 거구나. 배우는 다 그런데 나만 특별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어 <트롤리>는 평소보다 가볍게 임할 수 있었어요. <트롤리> 촬영이 2주 남았을 무렵 선배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촬영 2주 전이라 평소라면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인데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마음이 반듯이 서는 것 이외에 뭐가 더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작품처럼 괴로워하며 찍지는 않았어요. 선배님으로 인한 변화죠.
지난해가 데뷔 25주년이었죠. 인터뷰를 준비하며 오랜 시간 봐왔기에 무심히 지나친 좋은 작품들이 새삼 보이더라고요. 역할과 장르의 스펙트럼이 넓은, 방송 3사의 최우수상을 모두 수상한 배우이자 작품성 뛰어난 작품에 늘 존재한 배우로 자신의 이력을 탄탄히 꾸려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우로서 선택의 상황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결정해왔는지, 어떻게 배우의 삶을 이어왔는지 궁금합니다. 배우의 선택이라는 것이 선택된 상황에서 선택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내가 다 만든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온전히 내 힘이라고도 할 수 없죠. 때에 따라 대중이 원하는 모습이 내게 있었고, 또 내가 갖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선택해왔죠. 매번 과감한 시도를 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은 것 같고요.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매체 환경과 메커니즘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어요.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방향성이 조금 달라진거죠. 돌아보니 그래요.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죠. 25년이 지나 돌아보니 꽤 잘 살아왔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거지 현재를 살 때는 그렇지 않잖아요. 매 순간 빡빡하고 힘들고 괴롭기도 했어요. 다 지난 일이라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겠죠. 외려 저는 배우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어요. 늘 마지막이라 생각했죠. ‘이 작품까지만 하고 그만해야지.’ 남들은 모르지만 혼자 수없이 해온 다짐이에요. 매 작품을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으니 조금 더 힘을 내서 해보자’ 한 거죠.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힘일 수도 있는데(웃음) 예상치 않게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반복되는 회의 속에서도 그만두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태생적으로 외로움과 공허감을 안고 태어난 것 같아요.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불평이 연기를 통해 채워지는 것 같아요. 이 일을 하며 나의 부족함을 느끼는 한편 이 일을 해야만 채워지는 게 있어요. 연기는 기본적으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살다가 돌아오는 일이기에 나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지난 25년이 이 과정의 반복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작품이 끝나면 셔터를 내려요. 딱 끝내요. 그리고 나로 다시 돌아와 내 시간을 많이 가져요. 오래 할 수 있었던 힘은 그거였어요. 그러지 않고 오직 배우 김현주에만 매달려 살았다면 이 일을 오래 하지 못했을 거예요.
마지막 질문을 할게요. 세상은 늘 자신을 믿으라고 하죠. 배우님은 자신의 무엇을 믿나요? (잠시 침묵) 기자 님은 기자님의 무엇을 믿어요?
음… 잘 믿지는 않는데요.(웃음) 어떻게든 아주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는 사람 같아요. 굴곡은 있지만 최악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그건 나랑 비슷하다. 나는 잘 무너지고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는 부류인데, 그래도 아주, 아주 바닥을 찍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나는 근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 이 질문에 답을 할 자신이. 모르겠어요… 나는 외려 불신의 힘으로 강한 믿음을 만드는 건지도 몰라요. 오히려 자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걸 수도 있어요. 불신 속에서 되돌아보면서, 되짚으면서 가야 힘이 생기는 사람인 것 같아요. 너무 믿었다면 자만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과도 연결되는 대답입니다. 그렇죠. 스스로를 믿으라는 말보다 자신을 아끼고 다독여주라는 말이 나에게는 더 와닿는 말인 것 같아요. 더 넓은 의미로 자신을 사랑하자는 말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