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
‘책임감’이라는 말이 떠올라요.
한국 영화계에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큰 책임감을 갖고 임했죠.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많았을 텐데
절대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어요.
어마어마한 스타이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였지만,
동시에 많은 영화인을 보살폈어요.
추억 한 작품에 같이 출연한 적은 없지만, 모로코 마라케시 국제 영화제 때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임권택, 양익준 감독님과 김옥빈 배우까지 함께 일주일 넘게 마라케시에서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하면서 어울렸어요.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면 늘 언니가 있었으니까. 영화 <박하사탕>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거든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제 영화 인생의 시작점이기도 한 곳이라 늘 가까이 있었고, 이런저런 행사에도 많이 참석했어요. 그때마다, 그 자리마다 언니가 있었죠.
기억 속 모습 호탕하죠. 굉장히 호탕하고, 대범하고 의리가 있는 분. 어린 나이에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수상했고,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배우가 없었잖아요.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마음으로 곧은 자세를 많이 보여주셨죠. 매끈하게 깎아놓은 듯, 똑 떨어지는 서울 말투가 기억이 나요. 저는 고향이 부산이거든요. 제가 하는 서울말과는 다르죠. ‘그랬었니?’ 하는. 처음에는 조금 깍쟁이 같은데, 자주 대하다 보면 말맛이 살아 있어요.
떠오르는 작품 언니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친구 집에 있었어요. 중환자실에 있어 가볼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였는데 그 친구 집에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LP가 있었어요. 그걸 듣는데 대사들이 흘러나오더라고요. ‘야, 김철수!’ 하는 음성이 생생해요. 여성스러운데 약하지 않고, 멋있는 목소리요.
“그분의 보살핌을 받은
영화인들이 많아요.
언니는 이들을 챙기는 것도
본인의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고 강수연의 자취 ‘책임감’이라는 말이 떠올라요. 한국 영화계에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큰 책임감을 갖고 임했죠.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많았을 텐데 절대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어요. 어마어마한 스타이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였지만, 동시에 많은 영화인을 보살폈어요. 언니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도 양익준 감독이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을 주문해서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의 보살핌을 받은 영화인들이 많아요. 언니는 이들을 챙기는 것도 본인의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전할 수 있다면 우선 <정이> 잘 봤다고(웃음) 이야기해야 될 것 같고. 배우들이 각자 일하느라 자주 못 만나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언니가 어디서 촬영 중인 것 같아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오랜 침묵) 제가 그렇게 애교 있는 후배가 아니었어요. 대선배님이기도 하고, 조금 어려운 마음도 있었는데 ‘더 애교를 부렸어도 되는데’, ‘좀 더 치근덕댔어도 언니는 다 받아줬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오랜 침묵) 아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갑자기… ‘강수연 영화제’라고 하면 되는데 왜 추모 영화제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분의 노고를 많은 사람이 기억하겠죠. 많은 영화인에게는 한국 영화계를 위해 애쓴 큰 일꾼이었고, 누구보다 노고가 컸다는 걸 다 아니까요. 다들 기억할 것 같아요. 기억했으면 좋겠고요.
이정현
“늘 모두에게 사랑을 넘치게 주셨어요.
중요한 자리마다 중요한 위치에서
항상 후배들을 응원해주는 모습들을 되게 많이 봤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되게 큰 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요.”
추억 영화 <꽃잎>이 나왔을 때, 저에게 생긴 별명 중에 하나가 ‘제2의 강수연’이었어요. 당시에 저에겐 가장 큰 칭찬이었죠. 그리고 3년 후에 사석에서 처음 뵈었어요. 그때 성인이 된 제게 처음으로 술도 가르쳐주셨고, 배우로서 열정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는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어요. 이후에 가수로 활동을 하다 30대 초반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을 때 제게 가장 많은 응원을 보내준 사람 중 한 명이 언니였어요. 만날 때마다 “정현아~ 이리와 이쁜아.”라면서 매번 이쁜이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뽀뽀를 너무 세게 하셔서 볼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 있어요. (웃음) 그렇게 늘 저에겐 너무나 크고 따뜻한 선배님이었어요.
기억 속 모습 의리. 열정, 그리고 사랑. 영화인들의 모임에 가면 항상 계셨는데요, 특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애정이 정말 많았어요. 이건 우리가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열성을 다하는 모습이 되게 멋졌어요. 또 늘 모두에게 사랑을 넘치게 주셨어요. 중요한 자리마다 중요한 위치에서 항상 후배들을 응원해주는 모습들을 되게 많이 봤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되게 큰 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요.
고 강수연의 자취 항상 언니를 보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었죠. 언니처럼 베니스국제영화제라는 큰 무대에서 상도 한 번 타보고 싶었고, 그래서 계속 영화가 하고 싶었고요. ‘제2의 강수연’이라는 멋진 타이틀을 항상 되새기면서 열심히 영화를 사랑하자는 자세를 배웠어요.
전할 수 있다면 얼마 전에 연상호 감독님과 새 작품을 같이 했거든요. 하면서 <정이> 얘기도 하고, 언니 얘기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만날 수 있다면, 셋이 못다했던 술자리를 하고 싶어요.
최희서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 일지만
수면 아래 견고한 땅이 있을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쉽게 휩쓸려 가지 않는 사람.
우아함과 단단함을 동시에 지닌
선배님의 모습이 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추억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진행한 ‘아시아연기자아카데미’에서 선배님을 뵌 적이 있어요. 영화 <킹콩을 들다>로 데뷔한 후 더디게 나아가고 있던 저에게 선배님과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예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이었고, 제게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죠. 오늘 촬영하러 오기 전 그때 찍은 사진을 살펴봤는데, 사진 속 선배님이 제 옆에 서서 팔을 꼭 잡아주고 계시더라고요.
말과 태도 ‘아시아연기자아카데미’에 참여하며 쓴 일기에 선배님이 해주신 말씀이 적혀 있어요. “최고의 자리는 없어. 배우는 죽을 때까지 최고를 향해서 갈 뿐이야. 참고 견뎌야 해.” 이 말씀의 의미를 당시에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분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의아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1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제가 배우로서 어느 정도 자리매김한 후 되새겨보니 새삼 그 말의 무게가 느껴지더라고요.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열정, 위로 더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계속 품고 계셨구나 싶었어요. 선배님은 “열심히 해. 앞으로 응원할게” 같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진솔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인 조언을 해주셨던 거예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는 눈앞의 신인 배우들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거겠구나 하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해요. 엄청난 다정함을 보여주신 거죠.
떠오르는 작품 너무 많지만,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씨받이>를 꼽고 싶어요. 어릴 때 이 영화를 보면서 충격과 감동을 함께 느꼈고, 최근에도 다시 봤어요. ‘옥녀’를 연기하던 선배님의 눈빛이 인상 깊더라고요. 특히 옥녀가 본인이 낳은 아이를 떠나보내고 가만히 누워 있을 때, 거의 포기하고 체념한 눈빛이요. 스무살 무렵의 나이에 어떻게 그 감정을 연구하고 표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고 강수연의 자취 선배님이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실 때, 수많은 배우와 감독이 지나간 레드카펫을 마지막으로 밟으셨거든요. 저 멀리서 힘차게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한 명의 여성 배우를 넘어, 한국 영화의 미래를 짊어진 이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나도 좀 더 욕심을 낸다면 배우 이상의 역할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갈망한 순간이기도 해요. 그 가능성을 선배님이 몸소 증명해주셨고요.
기억 속 모습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 일지만 수면 아래 견고한 땅이 있을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쉽게 휩쓸려 가지 않는 사람. 우아함과 단단함을 동시에 지닌 선배님의 모습이 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전할 수 있다면 선배님이 제게 해주셨던, “참고 견뎌야 한다”라는 말이 이제야 마음에 사무쳐요. 만약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여쭤보고 싶어요. “견디고 버티시며, 그래도 즐거우셨나요?”
김혜준
“인터뷰나 방송이나 영화 등을 통해 본
선배님은 되게 유쾌한 분 같았어요.
그 유쾌함과 당당함이 아주 멋져 보였고요.
참 닮고 싶은 어른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워하며 선배님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자라고, 그의 길을 따라 연기하는 후배가 되면서 늘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뒤늦게나마 선배님을 존경하고 그리워한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말과 태도 가장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선배님의 생전 인터뷰를 찾아 보면서 어떤 분인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어요. 영화를, 이를 함께하는 후배와 동료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 함축적으로 담긴 문장이 아닌가 싶어요. 그야말로 선배님다운 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고 강수연의 자취 사실 제가 선배님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언급할 일이 생기면 늘 ‘거기 강수연 배우님 나온 학교 아니냐’라는 반응을 접했어요. 그 작은 연결 고리만으로도 영향을 받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 존재가 선배님이어서 좋았고, 든든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저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줄 수 있는 어른이자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전할 수 있다면 일단 고등학교 얘기부터 할 것 같은데요.(웃음) 학교 얘기도 하고 선배님이 출연한 작품 얘기도 하면서 소소하게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후배로서 여쭙고 싶은 질문도 많고요.
기억 속 모습 인터뷰나 방송이나 영화 등을 통해 본 선배님은 되게 유쾌한 분 같았어요. 그 유쾌함과 당당함이 아주 멋져 보였고요. 참 닮고 싶은 어른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박지현
“선배님의 언행과 업적을 살피며,
영화나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돼요.
긍지를 갖고 현장으로 향할 수 있는 힘을
선배님을 통해 얻었어요.”
그리워하며 선배님을 너무나 존경했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 당신이 아주 어릴 때부터 여성 배우이자 영화인으로 활발히 활동하셨잖아요. 1주기를 맞아 선배님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어 영광스러워요.
떠오르는 작품 초등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드라마 <여인천하>를 재미있게 봤어요. 이 작품 속 ‘정난정’이 제가 선배님에 대해 갖고 있는 첫 번째 기억이에요. 성인이 되어 배우로 활동하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배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최근에 촬영한 영화 <히든 페이스>의 김대우 감독님이 <씨받이>를 극찬하셔서 지난해에 봤거든요. ‘옥녀’로 분한 선배님의 모습이 지금 제일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어요. 1980년대 영화에 담긴 젊은 시절의 선배님이 참 아름다우시더라고요.
고 강수연의 자취 선배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많은 분이 ‘한국 영화계의 큰 손실’이라고 표현하셨어요. 그때 선배님의 영향력을 크게 체감했고, 저도 이에 동감했어요. 선배님의 언행과 업적을 찬찬히 살피며, 영화나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돼요. 긍지를 갖고 현장으로 향할 수 있는 힘을 선배님을 통해 얻었어요.
말과 태도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연기 잘하는 할머니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지긋한 나이에 연기하시는 선배님을 뵐 수 없게 되었지만, 그분이 연기를 대하는 마음을 헤아려보게 하는 말이었어요. 아마 제가 지금 가진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해요. 전 인터뷰를 할 때 ‘삶의 끝까지 연기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로 살아가셨던 선배님을 떠올리며,저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부단히 나아가려 해요.
전할 수 있다면 한국 영화가 나아갈 길을 개척하기 위해 힘써주시며 노고가 참 많으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진심 어린 감사가 천상의 그분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