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미우(Miu Miu), 이어링 천천(XHENXHEN).

 

셔츠, 팬츠, 슈즈, 이어링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이번 화보에서 헤어피스를 붙여 아주 긴 머리를 연출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지금까지 이 정도로 머리를 길게 길러본 적이 없거든요. 길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어요. 화보 컨셉트와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고요.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앞으로 길러볼까 싶은데, 엄청 오래 걸리겠죠? 한 4~5년은 길러야 할 것 같아요.

실제 머리는 아주 짧던데요. 신작 드라마 <살인자의 쇼핑몰>의 ‘지안’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겠죠? 맞아요. 지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표현이 가벼움, 날쌤, 민첩함이었어요. 그래서 자신의 움직임에 거치적거리는 요소를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서 머리를 과감히 잘랐어요. 사실 오늘처럼 긴 머리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짧은 스타일도 처음이거든요. 지안이라는 캐릭터를 생각하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김혜준으로서는…(웃음) 아직 어색하네요.

작품 때문에 원하는 스타일만 고수할 수 없다는 게 배우라는 직업을 가져서 생기는 제약일 수 있겠네요. 반대로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해보는 일들이 좋은 경험이 될 때도 있어요. 배우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평생 해볼 일 없는 스타일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킹덤> 속 계비 조씨의 쪽진 머리 같은 것이요. 어쨌든 시도해보면 어떤 식으로든 남는 것이 생기는데, 그 점을 좋아해요.

외형을 차치하더라도 배우는 실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드러낼 일이 거의 없어요. 더군다나 김혜준 배우는 장르물을 여러 편 해온 터라 실제로는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편이고요. 온전히 나를 드러낼 작품을 상상해보면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나요? 아마 다들 그렇겠지만 저도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사람이에요. 고요하게 혼자 있는 걸 즐기면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있으면 한없이 들떠요. 웃고 있지만 조금은 지쳐 있는 사회인이기도 하고요.(웃음) 장르로 말하자면 휴먼 드라마일까요? 일할 때의 저를 떠올리면 <미생>이 생각나기도 해요. 힘들어하면서도 소소한 즐거움에 웃기도 하고, 계속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으면서도 저만 아는 작은 성취감을 느낄 때도 있거든요.

생각해보니 일상성을 그린 작품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거의 없죠. 제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찾기 힘든 장르가 휴먼 드라마나 멜로물이에요.

신기해요. 실제로 만나서 인사만 몇 마디 나눠도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선 잔인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잖아요. 이와 관련해 감독님들에게 들은 말이 있는데, ‘안 그럴 것 같은 애가 세게 나오는 게 임팩트가 더 클 것 같아서’래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더라고요. 거기에 배우의 취향이 더해지기도 할 테고요. 사실 저는 좀비물이나 스릴러물을 잘 못 봐요. 무서워서요. 그런데 제가 연기할 거라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읽으면 그런 작품들이 더 재미있더라고요. 평온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제 삶에 절대 없을 일이라는 걸 알아서 더 끌리는 것 같기도 해요.

배우로서 작품을 볼 때와 관객으로 볼 때 시선이 다른가 봐요. 완전히 달라요. 제가 유난히 많이 본 영화 중 하나가 <어바웃 타임>이에요. 그 영화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볼 때마다 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 점이 너무 좋아요. 최근에 가장 좋았던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였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몰입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에요. 보면서 내 인생의 첫 영화는 무엇이었는지, 그 영화는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었는지 생각하게 됐죠.  시간이 무척 소중하고 좋았어요.

 

셔츠, 팬츠 모두 페라가모(Ferragamo), 글러브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벨트 핀코(Pinko).

드레스 샹샹루안 바이 아데쿠베(Shanshan Ruan by ADEKUVER),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드레스 발렌티노(Valentino), 부츠 지미추×팀버랜드(Jimmy Choo × Timberland), 네크리스 로스트인에코(Lost in Echo), 브레이슬릿 케이비케이(KVK).

 

“저는 오랫동안 길게 연기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다고 압박감을 느끼거나 초조해하진 않아요.
한 해 한 해 흘러서 지나버리는 게 아니라
제 안에 쌓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

 

셔츠, 팬츠, 이어링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셔츠,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김혜준 배우의 첫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어요? 아주 어릴 때 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예요. 그날이 지금도 아주 선명히 기억나요.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총성이 울리고, 폭탄 터지는 소리에 놀라 코트를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울었어요. 그때 심어진 전쟁의 공포가 워낙 커서 지금도 전쟁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잘 못 봐요. 그 정도로 강렬한 영화였어요.

그게 영화가 지닌 힘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는 ‘이건 그저 영화일 뿐이야’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렬한 기억을 남기기도 하니까요. 뇌리에 박힌다고 하잖아요. 누구에게나 그런 영화가 하나 이상은 있을 거예요. 그게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마력이 아닐까 싶어요.

김혜준 배우의 작품 중에도 그런 힘을 지닌 영화나 드라마가 꽤 많아요.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겨준 작품을 떠올려본다면요? <미성년>이 기억에 남아요. 제가 연기한 ‘주리’가 멀리 아빠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시사회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펑펑 울었어요. 전혀 슬픈 장면이 아닌데 촬영하는 동안 주리로 살며 겪은 감정들이 몰아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지금도 누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물으면, <미성년>의 첫 장면을 떠올려요. 그 안에 담긴 제 얼굴을 좋아하거든요.

<미성년>이 나온 지 벌써 4년이 흘렀네요. 벌써요? 연기하면서 햇수를 가늠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몇 년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놀라요.

조금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하자면, 데뷔작으로부터는 8년이 흘렀더라고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죠.(웃음) 그런데 앞으로도 지난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으려 해요. 저는 오랫동안 길게 연기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다고 압박감을 느끼거나 초조해하진 않아요. 한 해 한 해 흘러서 지나버리는 게 아니라 제 안에 쌓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시간에 구애받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말로 들려요. 그러려고 노력하죠. 다만 정말 힘든 순간에는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믿으며 의지하게 될 때가 있어요.

김혜준 배우가 느끼는 연기의 괴로움은 무엇인가요? 매번 새로운 걸 해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간혹 이미 한 것을 반복하는 것 같아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안주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될 때가 있어요. 여력이 없어서 놓아버릴 때, 즐거움도 슬픔이나 분노도 없는 무감정의 상태가 가장 두렵고 괴로워요. 그런 순간에는 잠시 흐르는 시간에 저를 맡겨요. 아직까지는 그 시간이 길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와 반대로 시간을 붙잡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나날도 있겠죠?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요. 저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많이 받거든요. 그래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덩달아 밝아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장입니다.(웃음)

오랫동안 연기를 하겠다는 목표와 함께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앞으로의 여정에 마주하길 바라는 것들이요. 확신이 더 커져가길 바라요. 잘하고 있는 건지, 옳은 길로 가는 건지. 불안은 배우의 숙명인 것 같아요. 다만 언젠가는 이 불안이 조금 더 옅어지고 조금 더 확신이 커지면 좋겠어요. 제 여정은 연기를 계속 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얻어가는 길이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