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그럼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이야기.
배우 라미란과 엄지원이 함께 그려낸 동시대의 면면.

라미란 오버사이즈 재킷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레이스 드레스와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엄지원 블랙 튜브톱 드레스 (Rokh), 부츠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이어링 아미(Ami)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잔혹한 인턴>이 8월 11일부터 공개되고 있어요. 지난해 여름에 촬영을 마치고 줄곧 공개를 기다려왔어요. 언제 나오려나 싶었는데 막상 작품을 선보일 때가 다가오니 복기의 시간이 필요했죠. 예고편을 보니까 촬영 당시가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즐겁게 촬영했고, 연출을 맡은 한상재 감독님도 재미있게 완성되었다고 말씀해주셔서 기대하고 있었어요.

한상재 감독과는 <잔혹한 인턴>에 앞서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의 일부 시즌을 같이 만든 적이 있죠. 이번 작업은 어땠나요? 수년간 함께한 사이라 그런지 한결 편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잔혹한 인턴>을 준비할 때부터 저에게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전 대본에 충실한 연기를 주로 해왔기 때문에 내용과 관련한 의견을 잘 제시하지 않는 편인데, <잔혹한 인턴>은 제 출연이 결정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이런저런 참견을 했죠.(웃음) 나중에 감독님이 ‘고해라’ 역을 제안했을 때 “해야죠” 할 수밖에 없었어요.

<잔혹한 인턴>은 직장을 열심히 다니다가 사표를 던진 뒤 7년간 육아에 힘을 쏟던 해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경력직 인턴’으로 복귀하며 시작됩니다. 대본을 통해해라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동안 맡았던 캐릭터들과 결이 사뭇 달랐어요. 생선 가게 주인이나 통닭집 사장 등 서민의 삶과 맞닿아 있는 인물을 많이 연기했고, 오피스 우먼 역할도 <막돼먹은 영애씨> 이후 오랜만이거든요. 회사 생활 자체가 저한테 생소한데, 더군다나 해라는 한때 직장에서 잘나갔던 MD더라고요. 처음에는 제가 과연 해라와 잘 어울릴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색다른 인물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가정보다는 일을 택한 해라와 전작 <나쁜 엄마>의 헌신적인 어머니 ‘진영순’의 간극이 큰 것 같아요. 양극단에 놓여 있는 이들이죠. 영순이 아들을 비롯한 타인의 삶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었다면, 해라는 자신의 삶을 중시하는 독립적인 사람이에요. 자의식이 확고하다는 점에서 해라와 제가 닮았다고 느꼈어요. 저도 제 입으로 이기적이라 할 정도로 자기애가 강하고 자존감도 높거든요. 하지만 해라는 저보다 더 큰 의지를 지녀서 본인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요. 발로 직접 뛰고,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오뚜기처럼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죠. 그래서 그를 동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그레이 수트 셋업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앵클부츠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양손에 착용한 하트 모티프 링 모두 마르타 (Marta).

저도 해라가 멋진 인물이라 생각했어요. 나다운 삶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과감한 선택을 한 거잖아요. 경력이 있는데도 인턴으로 일하면 자존심 상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게다가 과거 입사 동기인 ‘최지원’(엄지원)이 실장으로 있어요. 옛 후배도 이제는 상사가 되었고, MZ세대 직원들마저 본인보다 직급이 높고요. 아으, 열 받아.(웃음) 이런 상황이 해라를 제일 힘들게 할 거예요. 하지만 꿋꿋이 이겨내야겠죠. 쉽지 않은 선택을 한 만큼 일에 대한 욕망이 클 테니까요.

해라는 지원에게 은밀하면서도 잔혹한 제안을 받고, 이를 본인의 경험치로 해결해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미란 배우의 SNS에서 해라가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과연 얼마나 잔혹한 사건들이 일어날까 싶었어요. 드라마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을 대본으로 접하면서 ‘진짜 총을 쏠 일이 벌어지는 건가’ 싶었는데요.(웃음) 그 내막을 살펴보니 어떤 판타지도 가미하지 않은 현실 그 자체더군요. 말 그대로 ‘하이퍼리얼리즘’인 셈이죠. 제목에 ‘잔혹’이라는 표현을쓴 것도 경력직 인턴의 삶이 그만큼 녹록지 않다는 걸 알려주고요. 그럼에도 <잔혹한 인턴>은 유머를 잃지 않는 작품이에요.해라의 상황을 심각하게만 다루지 않는 코미디 장르의 작품이라 시청자들이 보다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칫 무겁게 느낄 법한 소재를 가볍게 풀어낸 작품 특유의 매력이 있죠.

최근에 여성의 경력 단절이나 직장 생활을 유쾌하게 다룬 드라마들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어요. <잔혹한 인턴>은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며 시청하면 좋을까요? 해라의 고군분투요. 언제나 ‘스톱(stop)’이 아닌 ‘고(go)’를 외치며 애쓰는 고해라 인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함께 응원해준다면 좋겠어요. ‘나 같은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요. 공백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잔혹한 인턴>을 보는 이들에게 닿았으면 해요.

짧은 체인 네크리스와 레이어드한 이어 커프 모두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롱 체인 네크리스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셔츠 드레스와 블랙 글러브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할 수 있는 인물을 표현하는 작업이 본인에게 지니는 의미도 있나요? 제 작업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는 않아요. 연기는 그저 제가 흥미를 느껴서 하는 일이거든요. 이 일을 안 했다면 제가 어떻게 해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아보겠어요. 그래서 어떤 인물을 표현하든 나름대로 재미가 있더라고요.

전작에서 함께했던 배우들이 “라미란 배우는 슛이 들어가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돌변한다”라는 말을 한 게 떠오르네요.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을 하며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연기를 하며 다양한 캐릭터가 되어보니 라미란이라는 사람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역할만 주어진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겠다 싶은 거죠. 원래도 긍정적인 편이었는데, 점점 더 크게 낙관하게 되었어요. 긍정적인 성향은 타고난 건가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웃음) 어릴 때부터 꽤 긍정적이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만족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소위 말하는 무명 시절마저 재미있게 보냈어요. 작은 역할을 1년에 한두 번만 맡아도 좋더라고요. 연기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연극 무대에서 시작해 영화와 드라마의 주연배우가 되기까지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왔죠. 첫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캐스팅되었을 때 나이가 서른이었고, 임신과 출산으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고요. <잔혹한 인턴>의 해라처럼 일종의 경력 단절을 겪은 셈인데, 당시의 마음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아이를 낳으면서 2년을 쉬었는데, 그때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뜬금없이 오디션을, 그것도 생애 첫 영화를 찍을 기회를 얻게 되니 하늘을 날 것만 같더라고요. 아주 신나게 일하러 다녔던 게 기억나요. 그 이후 계속 연기하고 있으니 행복 지수가 더더욱 높아지죠. 그래서 전 이번 생이 되게 좋아요. ‘내일 세상을 떠날지라도 아쉽지 않게 살자’가 제 인생의 모토인데, 이 말대로 살아가는 중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일말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삶은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게다가 연기는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100% 만족하기 어려운 작업이고요. 그렇죠. 저도 제 연기의 부족한 점만 보여요. ‘왜 저렇게 했지?’ 싶은 마음에 땅을 치며 후회하고. 하지만 그럴 때 전 제 노력의 결과가 이만큼이었음을 인정해요.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아이 엠 오케이!’ 어떻게 보면 반드시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오기가 없다거나 포기가 빠르다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누구든 스스로를 충분히 다독여주지 않으면 사는게 너무 힘들 거예요.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게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건강하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본인에 대한 믿음도 굳건한 편인가요? 물론 저에 대한 믿음이 가끔씩은 흔들리죠. 엉망일 때도 있고요. 하지만 엉망인 모습도 나의 일부잖아요.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죠.

하지만 라미란 배우는 본인의 역할을 멋지게 해내는 것처럼 보여요. 작품 속 라미란을 사랑하는 대중도 많고요. 제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요. 사랑을 주시니 정말 감사해요.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웃음) 다음 작품에 거름으로 써야겠죠.

그레이 수트 셋업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앵클부츠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양손에 착용한 하트 모티프 링 모두 마르타(Mar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