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그럼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이야기.
배우 라미란과 엄지원이 함께 그려낸 동시대의 면면.
검정 네일아트를 했네요. 이번 화보 컨셉트와 어울릴 것 같아 발라봤어요. 곧 촬영이 시작되니 인터뷰하는 동안 말리려고요.(웃음)
네일을 보니 엄지원 배우가 <잔혹한 인턴> 촬영을 마치며 SNS에 올린 게시물이 생각나요. ‘레드 네일은 안녕’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어요. 제가 맡은 캐릭터의 외형에 특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잔혹한 인턴>의 ‘최지원’은 5:5로 가르마를 탄 생머리와 빨간 네일이 어울리겠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잔혹한 인턴>과 <작은 아씨들>의 촬영이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거든요. <작은 아씨들>의 ‘원상아’는 손톱을 붉은색으로 칠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니라 하루 또는 한나절 간격으로 컬러를 바꿔야 했어요. 작품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죠.(웃음)
지원과 상아에게 번갈아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러 작품의 시기가 딱 맞물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둘 중 한 명을 표현한 여운이 다른 한 명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어요. 병행하는 초반에는 제가 여러 명의 자아를 지닌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느새 적응되더라고요. 사람이 하려고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두 작품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잔혹한 인턴>과 <작은 아씨들>을 모두 선택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배우로서 행보를 이어갈 때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작은 아씨들>이 감정을 많이 쏟아내야 하는 작품이라면, <잔혹한 인턴>은 코미디 드라마인 만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코미디는 템포와 타이밍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감각이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해요. 쾌활한 지점이 있으니 현장 분위기도 활기차고요. 그래서 이번 드라마를 작업한 기간이 ‘행복 모먼트’로 기억에 남아 있어요.
1년 전에 촬영한 작품을 드디어 세상에 선보이는 마음은 어떤가요? 수확의 계절을 맞이한 농부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농부가 직접 씨를 뿌려 작물을 기른 뒤 거두어들일 때를 기다리듯이 저도 연기를 통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니 결과물을 감사히 받아들여야겠죠. 유쾌한 오피스물이라 제가 출연한 작품이지만 즐기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잔혹한 인턴>의 최지원은 회사의 상품기획실 실장이자 실세를 쥔 인물이에요. 지원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공교롭게도 본인과 같은 이름의 역할을 맡았네요. 그래서 감독님이 지원 역에 저를 염두에 두신 건가 싶었지만(웃음) 우연의 일치였어요. 지원은 한마디로 ‘요즘 여성’이에요.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했고, 직장 생활을 통해 큰 성취를 이루려 하죠. 전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저와 캐릭터가 동일시되는 부분을 찾아 극대화하는 편인데, 지원은 일에 대한 열정과 성공을 향한 갈망이 저와 닮았다고 느꼈어요. 이런 교집합에 중점을 두며 저 자신을 지원에게 투영했어요.
“작품에 임할 때만큼은 맡은 캐릭터와 뜨겁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잔혹한 인턴>을 촬영하면서 지원의 어떤 점을 가장 사랑했나요? 지원이 직업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힘쓰면서 포기한 것이 있다는 점이요. 그가 많은 걸 내려놓으며 살아온 날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오직 목표를 좇다 보면 다른 것을 살피기 어렵죠. 그래서 목표 지향적 삶에 수반되는 고독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원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싶고요. 맞아요. 지원은 실적 위주로 굴러가는 회사에서 인정받아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성공 궤도에 오르는 과정을 거치며 주변 사람들을 잃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없게 돼요. 사회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정작 그 안에 혼자 있는 사람이죠. 지원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줄 사건들이 앞으로 펼쳐질 거예요.
그 계기 중 하나가 지원의 회사에 경력직 인턴으로 들어온 고해라와의 재회일 것 같아요. 지원이 경력이 있고 나이도 많은 해라를 인턴 자리에 앉힌 데는 이유가 있겠죠. 해라와 다시 만난 사건이 지원한테 어떤 도화선이 되어줘요. 시작점은 같았지만 현재는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여러 간극이 있고, 이 지점이 재미있게 그려질 예정이에요. 해라 역을 맡은 (라)미란 언니와 영화 <소원> 이후 10년 만에 작품을 통해 다시 만났는데, 오래 알고 지낸 친밀한 사이인 만큼 편하게 작업했거든요. <잔혹한 인턴>에 드러날 우리의 케미스트리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요.
해라와 지원처럼, 회사 생활과 깊이 연관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 우리 주변에 많죠. 이 지점에서 <잔혹한 인턴>이 갖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데, <잔혹한 인턴>은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을 겪는 오늘날의 여성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그리고 이를 즐겁게 풀어냈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시청자들도 <잔혹한 인턴>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기를 바라요.
이제 필모그래피에 <잔혹한 인턴>을 최신작으로 올렸습니다. 한동안 고찰과 고민, 표현의 대상이던 지원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인물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나요? 몇 달 전 <작은 아씨들> 촬영까지 마치고 해외여행을 다녀왔어요. 여행은 제가 한동안 연기했던 인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들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는 것도 좋지만, 배우는 계속 새 작품을 해야 하는직업이니 일상으로 빨리 복귀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작품 속 캐릭터를 벗어난 ‘인간 엄지원’이 일상에서 꾸준히 즐기는 것이 있다면요? 운동을 좋아해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그만큼의 성과를 반드시 얻을 수 있는 정직한 행위이기 때문이에요. 그 반면 연기는 그렇지 않잖아요. 예술의 영역에 있는작업이니 열심히 한다고 더 잘하게 된다거나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도 않죠.
노력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 어려운 작업임에도 엄지원 배우가 연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뚜렷한 이유는 없어요.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면 이유를 모른 채 속절없이 빠져들기 마련이잖아요. 전 이 일을 사랑하고, 다행히 그 마음이 아직 식지 않았어요. 텍스트를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고, 현장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해가면서 행복을 느껴요. 얼마 전 엔니오 모리코네의 행보와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봤는데, 작품을 만드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공감되는 지점이 있어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와 개인적으로 아무런 접점도 없지만 영화라는 매개 하나로 친밀감을 느낀 거죠. 저도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어요.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와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이 일의 미덕이 아닐까 싶어요.
엄지원 배우는 작품을 만드는 일을 20년 넘게 이어가는 중이에요.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거나 칸 영화제에 다녀오는 등 괄목할 만한 결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너무 기뻤죠. 하지만 데뷔 초반의 어린 시절에는 이러한 성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몰랐어요. 오히려 배우로서 경험을 쌓아갈수록 그 가치가 마음에 더욱 깊이 와닿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배우로 걸어온 여정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을 거라 짐작해요. 돌아보면 그 길을 잘 걸어온 것 같나요? 물론 지난한 순간들이 있었죠.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고난도, 저에게서 비롯한 고통도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극복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더라고요. ‘무엇이든 결국에는 지나간다’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요. 어려움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맷집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저 자신이 점점 단련되어 가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