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은 너무나 막연해 마음에 담기 어렵다. 아득히 멀어 나아갈 길마저 뚜렷이 보이지 않는, 어쩌면 비현실에 가까울 꿈. 그럼에도 언젠가 거기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하기도 한다. 영화 <화란>의 ‘연규’는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이다. 어머니와 함께 화란(네덜란드)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비참하고 암담한 현실을 견디는 열일곱 살 소년의 이야기는 제76회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스크린에 펼쳐졌다. 영화 못지않게 이목을 끈 건 연규를 표현한 배우 홍사빈. 단편영화 <휴가>로 데뷔해 연기의 세계에 점점 깊숙이 들어온 홍사빈에게 <화란>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기점이 되었다. 이로서 그는 마음속 작은 낭만을 더욱 굳건히 품고 ‘좋은 배우’라는 꿈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규와 홍사빈은 서로 닮았고, 그래서 우리는 연규처럼 나아갈 홍사빈의 내일을 기대할 만하다.

 

울 재킷, 니트 카디건, 울 팬츠, 슈즈 모두 제냐(Zegna).

브라운 재킷 렉토(Recto), 니트 베스트 오스모스(Osmos), 팬츠 악셀 아리가토(AXEL ARIGATO), 셔츠, 타이, 이어 커프, 링, 타이 핀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 반스(Vans).

 

홍사빈, 예쁜 이름이에요. 본명이에요. 한자로 ‘생각 사(思)’, ‘빛날 빈(彬)’을 씁니다.(웃음)

그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자리가 제76회 칸영화제였죠. 일정을 바쁘게 소화해야 했어요. 그래서 귀중한 현장을 눈에 많이 담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그곳의 장면들이 다 떠오르더라고요. 전 세계 영화인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길거리도 음식점도 영화 같았어요. 한번은 어느 식당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님이 앉아 계시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나’ 싶었어요.

드뷔시 극장에서 <화란>을 상영할 땐 어떤 기분이었어요? 제가 나온 작품은 부끄러워서 잘 못 보는 편이지만, 칸의 스크린으로 제 모습을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싶어 꾹 참았어요. 긴장을 많이 해 영화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웃음) 그래도 상영이 끝난 뒤 박수를 보내주는 관객과 그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어요. 제 내면 어딘가에서 열정이 샘솟기도 하고, 겸허해지기도 하는 경험이었어요.

<화란>은 홍사빈 배우가 처음 주연으로 스크린에 등장한 영화죠. 이 작품에 임하는 마음에 설렘과 긴장이 공존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신인 배우라는 감사한 타이틀을 얻었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말자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신인으로 여기다 보면 ‘그럴 수 있다’며 저 자신을 용납할 수도 있으니까요. 현장에서 “떨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 했어요. 그보다는 “전 사실 지금껏 어딘가에 항상 있었어요” 하는 마음으로 <화란>을 준비했습니다.

연규를 이끌어주는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을 맡은 송중기, 연규의 이복 여동생 ‘하얀’ 역의 김형서 등 <화란>에 함께한 배우들의 조합이 흥미로워요. 두 분 다 저한텐 빅 스타라 리딩할 때 진짜 떨렸어요. 현장에서 저마다 작품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하는 순간에는 많이 놀라웠고요. 김형서 배우의 신선한 연기가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고, 송중기 선배님은 현장을 능숙하게 이끌어주셨어요.

현장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데 송중기 배우의 도움이 있었다고요. “사빈이 네가 편한 대로 해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저를 배우로서 믿어주신다는 게 느껴져 편하게 임할 수 있었죠. 촬영할 때 컷을 한 이후에 더 좋은 장면이 나오기도 하니 마지막 대사를 한 뒤 10~15초의 시간이 더 주어지곤 했거든요. 그때 연규와 치건의 케미가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이를테면 연규는 고마운 마음을 드러낼 일이 없는 친구인데, 치건의 도움을 받는 신을 찍고 컷을 한 이후 저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했어요. 아마 치건에게도, 중기 선배님에게도 전하고 싶은 고마움이었던 것 같아요. 이를 감독님이 영화에 담아주셨는데, 나중에 선배님이 보더니 잘했다고 해주시더라고요.

홍사빈 배우가 생각한 연규는 어떤 사람인가요? 연규는 잘 표현하지 않는 친구예요. 그가 하는 말과 행동, 생각에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표현하지 않는 인물을 표현하는 작업을 해야 했겠네요. 쉽지 않았을 거라 짐작합니다. 선배님들이 “연규라는 인물은 결국 네가 연기하는 것이니 무언가를 꾸며내지 않아도 된다”라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래서 최대한 비워낸 채 연기하고, 내면이 투영될 수 있게끔 하자는 생각으로 연규를 표현했어요. 쉽지 않았지만 현장의 많은 분이 도와주셨죠.

김창훈 감독과 연규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어요? 연규의 얼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어요. 무표정한데 심경이 복잡해 보인다거나, 연민이 생기는 얼굴이라면 좋겠다는 식으로요. 숙소에 있는 거울을 보며 나름대로 연습도 했어요. ‘어떤 얼굴일까?’ 궁금해하며 촬영한 건 처음이라 재미있더라고요. 원하던 얼굴이 화면에 담기면 ‘나한테 이런 표정도 있구나’ 싶기도 했고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배우로서 제 표현의 영역이 확장된 것 같습니다.

 

니트 베스트 아크네 스튜디오(AcneStudios), 셔츠 프리즘웍스(FRIZMWORKS), 팬츠 스튜디오 니콜슨 바이 비이커(Studio Nicholson by  BEAKER), 워치 파텍 필립 바이 빈티크(Patek Philippe by Beantique), 이어 커프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카디건 오스모스(Osmos), 팬츠 얼킨(Ulkin), 슈즈 캠퍼랩(CamberLab), 네크리스 로스트인에코(LostinEcho).

 

연규는 지난한 현실을 견디며 화란에 가기를 꿈꿔요. 끝내 당도하지 못할 수 있는 곳임에도요. 닿기 어려울지라도, 우리 마음에 연규의 화란 같은 무언가를 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네. ‘낭만’이란 단어를 좋아해요. 저 자신에게 낭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별로 없거든요. 그럼에도 작은 낭만을 품고 있을 때 마음이 가끔 따뜻해지더라고요. <화란>의 관객들도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 또는 긴 시간이 흐른 이후의 어느 날 각자의 화란을 문득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영화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연규가 종종 떠오르기도 하죠? 촬영을 마치면 제가 연기한 인물들을 떠나보내는 편인데, 연규 생각이 문득문득 나더라고요.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요. 그리고 연규랑 같이 가는 맛집이 있어요.(웃음) 연규를 떠올리며 빨갛고 매콤한 가오리찜을 먹으러 자주 갑니다.

연규와 잘 어울리는 식당이네요! 일상에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걸 즐기는 편인가요? 네. 5년 전부터 ‘맛 일기’를 썼어요. 인상적인 식당을 발견하면 그날의 일들을 적어두죠. 음식 자체보다는 ‘오늘은 비가 내렸고, 직원이 몇 분 계셨고, 아주 차가운 물을 내어주셨고, 내 기분은 이랬다’ 하는 식으로 서사를 세세하게 기록해요. 맛집의 장르도 누아르, 로맨스, 코미디 등 OTT 못지않게 다양합니다. 언젠가 이 일기를 엮어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요.(웃음)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기대됩니다.(웃음)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나 봐요. 맞아요.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일 때부터 연극 대본도 썼어요. 연출 또한 꾸준히 해왔고요. 올해 11월에도 대학로에서 <소공녀>라는 연극을 올려요. 주인공 이름은 김형서 배우가 가수 비비로서 낸 뮤직비디오 등장인물의 이름을 빌려 ‘오금지’로 지었어요. 무대 위의 금지를 잘 키워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연극영화과를 지원한 계기는 무엇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어요. 연극을 보러 가거나 극장에 가면 배우의 연기가 빛나 보였고, ‘내가 한다면 어떨까’ 싶어 설레기도 했지만 아무나 배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꿈을 혼자만 소중하게 쥐고 있다가 대학 진학을 준비할 때 한 곳만 연극영화과를 썼고, 운 좋게 합격했어요. 그 덕분에 연기를 시작할 수 있었죠.

운명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연기를 하겠다는 다짐을 확고하게 심어준 영화가 있다면요? 고등학생 때 우연히 <파수꾼>을 봤어요. 날것 같은 연기가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이런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참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날 이후 박정민 선배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선배님이 글을 연재하시는 잡지를 정기 구독할 정도로요. 그러다가 제가 조연출을 맡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 선배님이 ‘로미오’로 출연하시며 성덕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이 연극 무대를 주제로 쓰신 글에 제 이름이 등장했을 땐 눈물까지 흘렸어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배우이자 형인 정민 선배님이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지금의 저한테도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줘요.

배우라는 꿈을 이루고 난 지금, 연기의 어떤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느끼나요? 연기를 통해 제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현장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배움을 얻어가는 데 흥미를 느껴요. 그 과정이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요. 그래서 연기가 고맙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연기는 잘못이 없잖아요. 연기와 좀 더 친해지려면 제가 노력을 쏟아야겠죠. 그렇게 배우로서 점점 성장해가고 싶어요. 어디에나 있을 듯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배우가 될 수 있기를 바라요. 그게 저한텐 연규의 화란 같은 거예요.

이제 <화란>이 한국 관객을 만날 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10월 11일에 개봉하고, 이에 앞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스페셜 프리미어로 상영해요. 이번엔 제대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긴장되고 두렵습니다.(웃음) 그래도 국내에서 상영하니 한결 친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영화 축제이니만큼 좀 더 즐겨보려고요. 부산국제영화제는 <화란> 이외에도 여러 좋은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행사잖아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여 이뤄지는 극장 상영보다 영화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많은 관객이 부산을 찾아와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