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킷과 슬리브리스 톱 모두 디올(Dior)

영화 <한 남자>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서울을 찾았다. 과거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정체가 묘연해진 한 남자 ‘X’의 인생을 따라가는 과정을 그린 이 이야기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하다. 영화의 원작인 동명의 소설을 쓴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분인 주의’를 말한다. 내가 가진 얼굴은 단 하나가 아니라, 상대에 따라 여러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이 이야기를 접하며 이상적이고 진정한 내 모습에 대해 고민하고 이에 얽매이기보다는 나다우면 된다고 새삼 깨닫게 됐다. ‘키도’ 역을 맡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키도는 X의 정체를 알기 위해 탐문을 계속하지만, 영화는 끝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다. 또 키도가 느끼는 자신의 정체성 역시 미제로 남는다.

키도를 어떤 사람으로 이해하고 접근했나? 키도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보는 이들 역시 ‘이런 인물이다’ 하고 규정짓지 않도록 가능한 한 형체 없이, 손에 잡히지 않는 무색투명한 존재로 보였으면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하고 싶었다.

인물을 해석하는 데 이전에 출연한 작품과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것 같다. 맞다. 이번에는 인물을 깊이 파헤치기보다 객관화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 했다. 캐릭터를 준비하며 여러 경험을 쌓는 편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감안해 재판을 방청하거나 변호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이런저런 준비를 했지만, 키도의 이미지가 내 안에 그려질 무렵 문득 ‘이게 아니지 않나?’ 하고 자각하게 됐다. 이전에는 그 인물이 할 법한 경험을 사전에 최대한 가깝게 해보려 노력했다면 이번에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조금 떨어져 인물을 바라보려 했다.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젊은 거장으로 언급되는 이시카와 케이 감독과 세 번째로 함께한 작품이다.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동료일 테지만, <한 남자>를 함께 작업하며 감독에게 새삼스레 감탄하거나 새롭게 발견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이시카와 케이 감독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한층 더 노련해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깊이가 이토록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이전에 함께 작업한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 때도 그랬지만, 인간 심연의 어두운 그늘을 잘 그려내는 감독이지 않나. 정답이 없는, 영화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관객이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결말로 끝을 맺는 데 감탄했다. 설명을 위한 대사는 최대한 줄이고, 배우의 연기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함께하는 배우와 스태프를 깊이 신뢰한다고 느꼈다.

재킷과 팬츠, 슬리브리스 톱 모두 디올 (Dior), 부츠 허즈밴드 파리 (Husbands Paris)

코트와 셔츠, 타이와 팬츠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팬츠 구찌(Gucci), 재킷과 슬리브리스 톱,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데뷔 초 청춘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오다 <악인> <자객 섭은낭> <분노>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 등을 지나며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지난 20여 년간 때로는 과감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한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작품 선택에 있어 부담이나 두려움을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게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악인>은 원작을 읽고 처음으로 이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작품이다. 꼭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전이라는 느낌이나 부담은 없었다. 서른이 넘으며 내가 하고 싶은 작품에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는데, <악인> 이후에는 스스로 찾아 나선 작품이 더 많아졌다. 내 가능성을 더 넓히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새로운 일 앞에 서면 두렵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내 안의 두려움이 설렘으로 치환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일전에 맡은 역할에 대해 ‘(작품 속에서) 그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허구의 인물을 생의 한가운데서 생생히 살아가는 인물로 만들어내기 위해 가장 먼저 무얼 하나? 인물에 관한 정보 습득을 우선한다. 어떤 경험 없이 오로지 내 생각으로만 움직인다면 내가 정한 대로만 연기하게 되지 않나. 가능한 한 내 생각이나 판단을 던 채 순수하게 그 인물 자체로 살아보려고 한다. 그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며칠간 지내보기도 하고, 그 인물이 늘 들르는 술집이 있다면 그곳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셔보기도 한다. 내 인생 속에 극 중 인물의 인생 앨범을 만들어가는 거다.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한 인물의 역사를 모으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실제 삶의 태도에 영향을 주기도 하나? 20년 넘게 배우로 사는 동안 자신 속의 무언가가 깎이거나 반대로 무언가가 덧붙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한다고 느끼기도 하나? 성장했나?(웃음) 모르겠다. 20대 초반에는 영화 현장이 온통 처음 경험하는 것이어서 매일매일이 새롭고 신선했다. 그저 재미있기만 했다. 그 기억을 회상하며 지나간 길을 다시 가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그렇게 20대 후반에 나를 돌아보니 따분해하는 내가 있었다. 오만해져 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연기가 어디 그렇게 간단한 건가. 처음에는 신선해 자연스럽게 나왔던 연기가 어느 순간 테크닉이 되기도 한다. ‘이건 아닌데’ 하는 시기가 있었다. 늘 성장하고 싶어 하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내 정체성이나 목표를 계속 찾고 있는 것 같다. 배우에게는 최종 목표라는 것이 없지 않나. 나 역시 목표는 없다. 그저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질을 의심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진짜 이대로 괜찮으냐고 말이다. 지금 하는 일이 진심으로 재미있는지 다그치듯 물어보기도 한다. 오만하던 20대 후반의 나를 반성하면서.

코트와 니트 스웨터, 팬츠 모두 펜디(Fendi).

코트와 니트 스웨터, 팬츠 모두 펜디(Fendi).

코트와 셔츠, 타이와 팬츠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20대 후반에 느낀 위기감은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나? 글쎄. 어떻게 해결했더라?(웃음) 해결됐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걸까?’ 하는 의문은 늘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역 배우들도, 베테랑 배우들도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송강호 배우도, 야기라 유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로 데뷔해 14세 때 일본 최초, 역대 최연소로 제57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도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는지는 구분할 수 없지 않나. 경험치가 쌓여 나오는 연기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는 연기, 욕심이지만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해내고 싶다. 열심히 노력해 경험을 쌓고 연기를 잘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 경험과 지식을 쌓은 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신인의 풋풋한 연기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 길을 계속 모색하고 있다.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연기할 때 ‘여기서는 위쪽을 바라보는 게 좋겠다’ 하는 식으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 없이 그저 인물 그 자체로 카메라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시간과 경험을 쌓으며 장인이 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 배우를 고통스럽게 하고 동시에 성장시킬 것 같다. 힘들지만 나로서는 부정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연기가 이대로 괜찮은지 계속 의심하면서. 만족하면 거기서 성장이 멈추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내 연기에 의심을 품을 것 같다. 배우라면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어떤 배우라도 자기 연기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배우로서 지금의 자리에 온 데는 본인의 어떤 면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은가? 젊을 때는 개성이 뚜렷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나는 딱히 개성이랄 게 없었다. 근데 달리 생각하면 개성이 없다는 건 어떤 색으로도 물들 수 있다는 거니까 ‘개성이 없는 것도 개성의 하나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뭘 더 유별나게 열심히 하기보다는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 하며 자유로워지려고 했던 것 같다.

오늘 현장에 함께한 포토그래퍼와 스타일리스트, 에디터 모두 스무 살 무렵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워터 보이즈>를 통해 츠마부키 사토시라는 배우를 만났다. 오랜 시간 현재진행형인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생기는 변화를 동시대에 바라보는 관객으로서 느끼는 기쁨이 있다. 20년 동안 배우로 살아온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그렇게 느낀다니 배우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돌아보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배우로 오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작품과의 만남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과 만나지 않았다면 작품도 만나지 못했을 상황이 많았다. 영화 <악인>을 만난 것도 친구가 이 작품과 네가 잘 맞을 것 같다고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이상일 감독과 <식스티 나인> <분노> 등을 함께 만들며 오랜 시간 깊은 관계를 쌓아왔다. 이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다. 그 만남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와 연결돼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실리를 따지거나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좋아져 계속 같이 있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이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 능력이 20~30%라면 아마 70%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싶다. 뭐 앞으로도 ‘의지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조금 있다. 혼자서 열심히 한다 한들 결국 자기만족에 그칠 것 같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라 생각한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