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터틀넥 스웨터와 아우터 모두 토즈(Tod’s).

블랙 터틀넥 스웨터와 아우터, 팬츠, 부츠 모두 토즈 (Tod ’ s).

 

박희순 배우를 만난다고 하니, 먼저 만났던 이들이 ‘무엇을 제안해도 다 받아줄 배우’라는 말을 해주더군요. 촬영하면서 그 말에 완벽히 공감했습니다. 하하. 제가 시키는 대로 잘합니다.

무언가를 거절한 적은 없나요? 안 되는 건요? 없어요.(웃음)

작품에 임하는 과정도 비슷한가요? <무빙>은 어떤 제안으로 함께하게 되었나요? <마이 네임> 때 호텔 외부에서 촬영하는 신이 있었는데, 우연히 강풀 작가가 거기 투숙하고 있었어요. 반가워하며 조만간 보자고 짧은 인사를 나눴는데, 그러고 며칠 후에 연락이 왔어요. <무빙>이라는 작품을 하는데 거기 출연 좀 해줄 수 있느냐면서요. 주인공이 다수인 이야기라 분량이 많지는 않겠지만, 형이 하면 좋은 역할이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내심 기대했죠. 원작을 알고 있었거든요. ‘나도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겠다’ 싶은 기대였겠죠?(웃음) 네. 나도 초능력이 있나 보다. 그러면서 되게 신나 했죠. 그런데 대본을 받고 보니 저만 없는 거예요. “왜 다 초능력이 있는데 나만 없냐” 그랬더니, 그래도 이 역할은 형이 해줘야 진정성이 보일 것 같고, 이야기의 뒷부분에 힘을 실어줄 것 같으니 꼭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원작 속 ‘덕윤’과 다른 모습이 보였어요. 원작에선 단순하고 직선적인 빌런이라면 드라마에선 인간적인 고뇌가 더 부각되는 형태로, 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는 인민들을 생각하는 참군인에 가까워진 거죠. 그렇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하게 됐어요.

<무빙>의 이야기 속 많은 인물 사이에서 가장 고뇌하는 사람은 누굴지 살펴보면 덕윤이 떠올라요. 이야기를 끝맺은 지금 그를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그려지나요? 강풀 작가가 새로 그린 그 인물을 보면서 되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두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부분은 희생시켜야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잖아요. 누구에게도 그 고뇌를 고백할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굉장히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죠. 저는 슬픔이 깃든 눈이 떠오릅니다. <마이 네임>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냉철하고 잔인한 인물에게서 일견 슬픔이 보이는 거죠. 그건… 그 인물의 서사에 기인한 부분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저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해요. 어떤 작품을 하든 온전히 내가 맡은 인물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 해도 연기하는 저의 마음이 더해지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박희순이 해석한 ‘김덕윤’(<무빙>), 박희순이 표현하는 ‘최무진’(<마이 네임>)이니까요.

 

베이지 팬츠 송지오 (Songzio), 재킷과 셔츠, 첼시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셔츠와 안에 입은 티셔츠, 블랙 팬츠, 네크리스,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제성과 흥행, 작품성에 대한 평단의 호평까지. <무빙>은 이 모든 것을 성취해낸 작품 입니다. 성취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편이란 건 알지만, 그럼에도 어떤 힘은 얻었으리라 짐작해요. 그럼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요. 비록 뒷부분의 한 파트를 맡은 거 지만 그럼에도 뿌듯하고 감동스럽기도 해요. 어쩌면 이런 작품을 만나기 위해 계 속 연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날들을 향해서 가는 게 아닌가 싶고요.

어떤 파트를 제일 재미있게 봤나요? 아무래도 덕윤이 등장하는 후반부인가요? 아니 요.(웃음) 사실 다 좋았어요. 두식과 미현, 주원과 지희의 멜로도 좋았고. 또 봉석이랑 희수랑 알콩달콩하는 부분도 무척 사랑스럽잖아요. <바보>라는 작품을 같 이 하면서부터 제가 강풀의 감성에 빠졌어요. 그렇게 우락부락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감성을 그려내는 건지.(웃음) 대본을 보고도 그랬지만, 드라마를 다 본 후에도 풀이에게 그랬어요. “네 건 네가 써야 한다”고요. 풀이의 작품은 작 가가 만들어낸 세계관이 워낙 탄탄해서 다른 사람이 각색하기 무척 어려울 거예 요. 그렇다고 똑같이 가면 웹툰과 차별화되지 않을 테고요. 이번 작품은 본인이 직접 정리한 덕분에 새로운 이야기를 과감하게 넣으면서도 세계관이나 특유의 감성이 흔들리지 않은 것 같아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다 좋았어요.

1994년 첫 영화 <2001 이매진>부터 2023년 <무빙>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 비슷한 인물에 정체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온 흔적이 보입니다. <마이 네임> 때문에 ‘박희순 하면 누아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고종 황제(<가비>), 독립운동가(<밀정>), 북한 보안성 요원(<브이아이피>), 고문치사 사건에 가담한 공안 경찰(<1987>) 등 영화 속에서 시대를 오가고, 남과 북을 오가고, 선과 악을 오가며 다양한 인물로 분했어요.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인물을 그려낼 수 있었나요? 경찰과 범인이나 건달도 한 끗 차이고.(웃음) 남과 북을 오가는 것도 한 끗 차이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위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인물에 어떻게 내 감정을 입히느냐, 저는 그것만 봐요.

 

베이지 셔츠와 팬츠, 슈즈 모두 디젤(Diesel)

 

그간 같이 작업해온 감독에게 왜 이 역할에 박희순을 선택했는지 질문한 적도 있나요? 대부분 한 번씩은 한 것 같아요.

그럴 때 주로 어떤 대답을 들었나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어떤 얘기를 하는 것 같다는 식의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진짜 가만히 있으면 돼요?”라고 물으면, “아이, 그래도 뭘 해주셔야죠”라는 답이 돌아오고요.(웃음)

그런데 정말 가만히 있는 장면에서도 무언가를 말하잖아요. 눈빛은 물론이고 힘줄과 핏줄로도요. <무빙>에서 총을 맞은 후 주석궁으로 들어가려는 두식(조인성)을 붙잡을 때 같은 신에선 핏줄이 터질 만큼 몸에 힘을 주긴 했어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황에서도 사력을 다해 두식을 막아내야 하잖아요. 그럴 때 힘줄이나 핏줄을 좀 써먹긴 합니다.(웃음)

필모그래피 속 캐릭터 중 가장 사랑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이건 특정할 수 없겠는데요. 모든 인물에 저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으니까요.

그럼 애틋한 사람이 누군지 묻겠습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의 ‘병희’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계속 자살 시도를 하는 중독에 빠진 사람인데, 새로운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용기도 못 내는 약한 모습을 보면서 좀 다시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삶의 희망을 찾아주고 싶었던 사람이지 않나 싶어요.

배우 박희순의 행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요? <세븐 데이즈>의 ‘성열’인 것 같아요. 그때까지 무겁고 어두운 무드의 작품을 주로 해서 저를 발산할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던 시기에 만난 인물이거든요. 제작이 한 차례 불발되기도 했는데,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1년을 기다려서 하게 된 작품이에요. 이야기 자체는 무겁지만 그 안에서 성열이라는 인물은 유머러스하면서 능글맞게 그려지거든요. 그 덕분에 새로운 모습을 발산할 수 있었고, 이후 작품을 해나가는 데 귀중한 기폭제가 되었어요.

 

니트 스웨터와 트렌치코트 모두 토즈(Tod’s).

 

<세븐 데이즈>는 16년 전 작품임에도 여전히 다시 보는 이들이 많아요. 범죄물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죠. 맞아요. 신기하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회자되는 영화들이 있어요. <작전>도 영화가 나왔을 때는 생소한 소재라 그런지 생각보다 흥행이 안 됐는데, 몇 년 전에 주식 열풍이 불면서 찾아서 보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어요. 주식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바이블 같은 영화라던데요.(웃음)

그렇게 다시 봐줬으면 하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면요? 언젠가 축구 시즌에 <맨발의 꿈>이 회자되길 바라고 있어요. 그 영화도 참 희한한 게 월드컵 때 개봉해서 빛을 못 봤어요. 축구 경기 보느라 축구 영화는 안 보는 거예요.(웃음) 동티모르라는 영화적으로는 아주 생소한 나라에 가서 현지 사람들을 캐스팅해 연기 가르치면서 찍은, 다시 없을 귀중한 경험을 했던 작품이라 꼭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만약 지금의 나 자체가 영화 속 캐릭터가 된다면,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요? 인간 박희순 자체를 연기한다면요? 사실 저도 저를 잘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되게 과묵하고, 또 어떨 때는 한없이 밝기도 하거든요. 저란 사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그다지 재미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죠. 최우식 배우가 불러서 나갔던 관찰 예능 프로그램 <여름방학>만 봐도 별게 없었잖아요. 그냥 설거지만 하고.(웃음) 어쨌든 별 탈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드라마 형태가 될 것 같긴 한데, 흥행은 쉽지 않을 거예요.

<무빙> 이후 다음은 어떤 인물로 만나게 될까요? <트롤리> 끝내고 바로 이어서 연상호 감독과 드라마 <선산>을 찍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좀 쉬는 중이에요. <마이네임> 이후 3년간 못 쉬고 달려온 터라 몸과 마음이 지쳐서 휴식이 필요하다 싶어 잠시 멈춰 있어요.

드라마와 영화를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요? 저는 작품 할 때 다른 사람 작품을 못 봐요. 제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못 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간 못 본 좋은 작품들을 찾아서 보고 있어요. 얼마 전에 뒤늦게 <피키 블라인더스>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던데요. 그거 말곤 집에서 아내와 술 한잔 같이 마시면서 색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에요.

그럼 오늘의 계획은요? 집에 가서 아내와 밥 먹으려고요. 맛있는 거 먹고, 맛있는 거 마시고, 좋은 거 보고. 당분간은 그런 계획들이 있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