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머 재킷 로에베(Loewe), 블랙 티셔츠, 팬츠, 첼시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코트와 스웨터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블랙 티셔츠, 팬츠, 첼시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늘 <스위트 홈> 시즌 1의 주요 배경인 그린홈 아파트에서 선 이진욱 배우를 담고 싶었다. 그린홈의 세계 안에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본래의, 굉장히 멋진 모습 그대로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간의 분위기가 아주 비슷하다. 최근 작품에서 오늘처럼 갖춰 입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스위트홈> 시즌2도, 지금 촬영하고 있는 <오징어 게임 > 시즌2도 딱히 의상이랄 게 없다.(웃음)

<스위트 홈> 시즌1의 마지막 장면이 크게 회자됐다. 이진욱 배우가 연기한 ‘편상욱’이라는 인물이 다시 살아난 이유를 두고 편상욱의 몸에 ‘정의명’이 들어갔다는 가설이 지배적이다.
맞다. 편상욱의 죽은 몸을 정의명이 차지하면서 후반부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데 정의명이라는 인물이 원체 불안정한 캐릭터이지 않나. 여러분이 아는 정의명이 다가 아니다. 그의 실체가 드러난다.(웃음)

함께 출연한 여타 배우들과 달리 이진욱 배우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니, 새 작품에 임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았을까?
맞다. 한데 어차피 인간은 생을 살면서 여러 사건을 겪으며 변화하고 성장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보면 변화한 캐릭터가 완전히 이질적이지는 않은 거다. 캐릭터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초반에는 시즌 1에서 정의명 역할을 한 김성철 배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성철 배우가 한창 바쁠 때였는데, 시즌 2 초반에는 직접 대본을 읽은 녹음본을 보내주기도 했다. 맛있는 것 사겠다고 했는데,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약속을 못 잡고 있다.

시즌 1을 마무리하며 한 여러 인터뷰에서 <스위트 홈> 시즌 2 제작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보였고, 그 바람이 이뤄졌다. 기대한 만큼 즐거웠나?
시즌 1은 원작이 있지만 시즌 2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새롭게 뻗어가는 이야기이지 않나. 심지어 나는 새로운 캐릭터도 만났다. 시즌 1이 끝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그사이 멸망한 지구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캐릭터마다 성장한 부분이 있다. 그런 면에서 배우들이 다들 재미있어 했다. 촬영 자체도 그린홈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새로운 공간이 주는 즐거움 또한 있었다. 아마 이 인터뷰가 공개될 때쯤 새로운 티저 영상이 나올 텐데, 보시면 깜짝 놀랄 것 같다. 우리끼리도 “장난 아니다!” 하며 놀랐다.

 

코트와 스웨터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블랙 티셔츠, 팬츠, 첼시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바이커 재킷, 니트 스웨터, 베스트, 팬츠, 슈즈 모두 펜디(Fendi).

 

오랜 시간 연기해왔음에도 지금 답변하는 모습에서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배우 특유의 천진함이 보인다. 왜 배우로, 이 세계에서 오래 머물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그러게….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어떤 의지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닌데 하루하루 재미있게 지내다 보니 지금에 닿은 것 같다. 요즘 동료 배우들을 만나면 서로 “잘 버텼다”, “잘 살아남았다” 하고 이야기한다. 자의든, 타의든 잘 살아남았다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나이가 된 거다. 기특하다. 근데 배우 중에서 자신의 연기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열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 대부분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할 거다. 그걸 거칠게 요약하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근데 정말 그렇다. 운이 좋았다.

바깥에서 작동하는 힘, 운도 중요하지만 배우가 본래 지닌 성정이나 성향도 오래 일할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연기에 대한 재능을 떠나서.
근데 그건 배우라는 바운더리 안에서는 기본인 것 같다. 지금 드라마나 영화에 캐스팅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에 투입되는 배우라면 저마다 재능과 자질, 매력은 기본 사양으로 갖추고 있다고 본다. 간혹 대중이 보기에는 연기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배우도 실제 만나보면 대번에 알게 된다. 그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 그래서 나 역시 배우지만 다른 배우들을 만날 때 각자 다른 지점에서 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릴 때는 본인의 능력이나 매력, 상대 배우의 진가를 모른 채 지나치기도 했는데, 연차가 쌓이다 보니 이제 보인다. 모두가 대단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시간을 쌓으며 배우가 얻은 것이 있을 텐데, 이는 외모로도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다. 오늘 목정욱 포토그래퍼와 모니터를 보며 이진욱 배우가 시간을 잘 입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느꼈다면 무척 다행이다. 나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내 안에 쌓이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는 무섭기도 하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만 골몰하며 살아온 건 아니지만 결국 삶을 잘 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운이 좋은 게 나는 특정 나이대에만 크게 빛을 발하기보다 고루 평탄하게 빛을 발한 것 같다. 한데 그 부분에선 내가 온전히 지난 삶을 잘 살아냈다기보다 내가 가진 부족한 부분에 비해 외적으로 좋아 보이는 장점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보머 재킷 로에베(Loewe), 블랙 티셔츠,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레더 재킷 셀린느 옴므(Celine Homme).

 

내면에 쌓아온 것이 외모로도 기록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변한 부분도 있나? 가령 부정적인 감정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 우리가 실수를 할 때가 있지 않나. 나이와 상관없이 어느 때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인데, 실수라는 사건보다 그 이후에 어떤 변화를 끌어내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흔히들 말하듯, 경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가 중요한 거다. 내가 어떻게 수용하고 쌓아나갈지에 무게를 둬야 하는데, 그건 내게도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노력하는 것 같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나는 그다지 성실하게도, 내세울 만하게도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 잘한 게 있다면 살아가는 데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생각이나 사유를 많이 하는 것이 배우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여러 인물을 표현할 때도, 내 삶 자체에도.

긴 시간 배우로 살아남은 것에 대해 스스로 기특하다고 표현했다. 특히 어떤 점이 기특한가?
이렇게 작품에 함께할 수 있으니까. <스위트 홈>에 함께하고, 인터뷰하며 이야기도 하고…. 기특하다.(웃음) 결과적으로 이 순간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지 않나. 예전보다 형편이 나아졌다기보다, 물론 나아졌지만 그보다는 같은 상황과 조건에서도 내가 더 행복할 수 있게 바뀐 것 같다. 20~30대를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이 쉬워 보이고, 내 일이 별것 아닌 듯 느껴질 때도 있다. 한데 그 시기를 잘 넘기면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진다.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세상과 인생의 진짜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감사할 게 많다. 현장도 더 즐거워졌다.

20~30대의 좌충우돌도 기억하는가.
기억한다.(웃음)

당시 무엇이 본인을 가장 힘들게 했나?
겁이 없었던 것. 당시에는 겁이 없는 게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넘어지면 어때 넘어져도 괜찮아. 그게 인생이지’ 했지만 사실 안 넘어지는 게 좋거든.(웃음) 주변에서 “그렇게 하면 분명히 좋지 않을 거야. 조심하는 게 좋아” 하고 조언도 했지만 겁이 없고,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런 호기심은 가질 필요가 없는 것 같다.(웃음) 당연하기 때문에 뻔하게 들리는 말들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실은 설득할 이유도 없이 당연한 말들인데.

좌충우돌을 겪었기에 얻은 것도 있지 않을까?
결정을 할 때 단순해진 건 있다. 보통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 선택지를 두 개로 추린다. 둘 중 하나로 가닥을 잡는 거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지가 명료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건 내 영역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럴 때는 누군가가 선택해주면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점점 단순하고 편리해진다. 근데 선택지를 둘로 추리고 정리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고, 나아가 내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도 경험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어릴 때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작정 매달린 적이 있다. 결국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나이 들어간다는 게 참 좋다.

 

바이커 재킷, 니트 스웨터, 베스트, 팬츠, 슈즈 모두 펜디 (Fendi).

 

지금 문득 가장 좋았던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리면 언제를 꼽고 싶나?
연기하면서는 수없이 많고, 아주 개인적인 시간에서 꼽자면… 언젠가 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선물 받은 담요인데 아주 부드러웠다. 집을 치우고, 샤워를 하고 깨끗한 소파에 누웠는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담요는 더없이 포근했다. 꽤 고가의 담요여서 그랬는지 호사스럽다고 느꼈다. 내가 아주 성공한 것 같았다. 근데 따지고 보면 담요의 가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담요치고 고가인 거지 내가 배우가 아니었어도 구입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 순간이 참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그때 느꼈다. 진짜 별거 없구나, 하고 희망을 얻었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게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어쩌면 이게 다일 수 있겠구나.’ 하고. 물론 살아가며 그때 감정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문득문득 생각하면 돌아갈 수 있는 거다. 언제든 날씨 좋은 날 깨끗하게 청소하고, 담요를 덮고 누우면 되니까.

최근 들은 행복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디테일한 묘사다.(웃음)
또 있다. 최근 베를린에 촬영하러 갔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데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를 실제로 감상할 수도 있으니 혹시 몰라 깨끗한 옷을 챙겨 갔다. 자유 시간이 하루 있었는데, 마침 그날 연주곡이 베토벤 심포니 7번이었다. 좋아하는 곡이라 가져간 옷을 입고,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코트도 사 입었다.(웃음)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자전거를 타고 갔다. 잔잔한 멜로디를 좋아해 모든 심포니를 2악장을 주로 들을 정도로 2악장을 좋아하는데, 그날은 1악장부터 소름 끼치게 좋았다. 1악장에 휴대폰 벨 소리로 지정할 정도로 좋아하는 구간이 있는데, 그야말로 극적으로 시작됐다. 환희에 꽉 찬 느낌이라는 게 무엇인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요즘 내게 행복은 이런 것들이다. 아마 인생의 치기 어린 시기에 그 공연을 봤다면 이렇게 좋다고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풍경이 그려진다. 잘 차려입은 채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이진욱 배우의 모습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쌀쌀한 날이었다. 공연장 입구에서는 프레첼을 팔고 있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젊은 사람들이 로비에 모여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회를 다시 찾아가는 것 역시 실현 불가능한 행복은 아니지 않나.
근데 꼭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니어도 된다. 친한 친구 조카가 열여섯 살인데, 그 친구 졸업 공연에 갔었다. 학생들이 하는 심포니 연주인데도 너무너무 잘하는 게 아닌가. 현악을 좋아하는데 현의 소리가 참 아름다웠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행복을 섬세하게 알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포기하지 않고 관찰한 사람만이, 그걸 계속해서 시도해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진리인 것 같다. 그 때문일까. 방금 한 말을 들으니 내가 다 행복해진다.
맞다. 한데 그건 노력해야 알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 행복한 게 왜 좋은가 하면 남의 행복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적어도 내가 느낀 행복의 20%는 듣는 이에게 가닿지 않았을까?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이 좋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