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함 앞에서 뒤돌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본다. 그렇게 굳건하게 배우 박형식의 걸음은 지속되는 중이다.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코트와 셔츠, 팬츠 모두 베르사체(Versace).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셔츠 펜디(Fendi).

드라마 <닥터슬럼프> 방영 시작 일주일 전이에요. 이맘때가 출연 배우로서 가장 긴장되는 나날이지 않을까 싶어요. 내 손을 떠나 기다리는 일만 남은 상태니까요.

며칠 전에 후시 녹음을 하러 가서 감독님을 만났어요. 그때 짧게나마 미리 볼 수 있는데, 저는 “아니에요. 전 본방 사수할 거예요” 하고 보지 않았어요. 제가 참여한 드라마지만 시청자로서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거든요. 긴장감은… 유난히 애정이 강한 작품이라 그런지 좀 큰 것 같아요. 불안보다는 설렘의 비중이 더 크고요.

작품에 대한 애정은 대본을 보며 발현된 건가요? 아니면 촬영하면서 생긴 건가요?

대본이 재미있고, 그 안에 담긴 주제 의식도 마음에 와닿았어요. 슬럼프를 겪으며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거든요. 대본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위로받는 부분이 많았어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잖아요. “나만 힘든 건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하면서 우울에 빠지는 순간이요. 그런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아픔은 있고, 그럴 때 결코 혼자가 아니라며 위로해주는 말들이 이 드라마에 담겨 있어요. 무엇보다 이런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내서 더 좋았어요. 저한테는 그게 되게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드라마.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과 유쾌함이 병행될 수 있다는 게 놀라운데요.

제가 연기한 ‘정우’에겐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절망 속에서도 웃으려고 노력하고요. 저도 처음에는 좀 의아했어요. 정우에게 닥친 위기가 보통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거든요. 그런데도 웃으려고 해요. 그게 뭘까, 여유일까, 외면하려는 걸까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 파고들다 보니 그게 더 큰 우울로 번지지 않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는 방식이겠다 싶더라고요. 파도가 몰아치기 전에 긍정이라는 벽을 계속 세우는 사람인 거죠.

박형식 배우도 긍정적인 편이지 않아요? 정우와의 간극이 크진 않았으리라 짐작합니다.

맞아요. 저도 꽤 긍정적인 편이거든요. 그런데….(웃음)

정우만큼은 아닌가요?

웃는 경지까진 가지 못했어요. 그나마 비슷한 점이라면 위기에 매몰되진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 거기에 얽매여 있으면 계속 가라앉고, 그 어두운 에너지가 다른 사람한테도 전염되잖아요. 제가 그걸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독촉하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빨리 정해. 당장 움직여” 하고요.(웃음)

드라마 소개 글에서 ‘심폐 소생기’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어요. 슬럼프든 번아웃이든 어떤 위기를 마주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게 숨을 잘 쉬는 거잖아요. 그래서 편안히 숨 쉴 수 있게 하거나 숨을 고르도록 해주는 존재가 필요하고요.

무조건 필요하죠. 정우가 단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결국은 다른 이들에게 의지해 숨을 고를 때도 있거든요. 정우를 보면서 나에게 숨이 되는 존재는 누구인지 생각하게 됐어요.

답을 찾았나요?

친구들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만나서 지금까지 함께 지내면서 제 모든 모습을 아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일하면서 만난 친구들. 늘 저를 지켜주
는 든든한 존재들이에요. 이 친구들 덕분에 데미지를 덜 받는 것 같아요.

본인이 친구들에게 같은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요?

그렇겠죠. 받기만 하고 저는 안 그랬으면 절 버렸겠죠. 뭐 있겠습니까?(웃음)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코트 베르사체(Versace).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셔츠와 팬츠 모두 페라가모(Ferragamo).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카디건과 팬츠 모두 로에베(Loewe).

인터뷰 전 영상 콘텐츠에서 <닥터슬럼프>에 출연하고 정우를 연기하면서 얻은 게 많 다고 말했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고 얻은 건 무엇인가요?

일단 상대 배우인 (박) 신혜 누나와 호흡을 맞추면서 놀란 적이 적잖아요. 특히 눈물 흘리는 신 찍을 때요. 엄청나게 몰입해야 하잖아요. 감정이 올라오기까지 준비도 잘해야 하고요. 그런데 누나는 큐 하면 바로 눈에 눈물이 차올라요. 몰입 속도가 경이로울 정도였어요. 촬영하면서 티는 안 냈는데 속으로 박수를 여러 번 쳤어요.(웃음) 감독님께 배운 것도 많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현장이 부드럽고 유쾌하게 흘러가도록 이끄시는데, 보면서 저도 이럴 땐 이렇게 해야겠다며 몇몇 방식을 수집해두었습니다.

현장을 유쾌하게 만드는 방법은 이미 터득하지 않았나요? 드라마 <해피니스> 때 함께 한 한효주 배우가 현장을 환하게 만드는 배우라 말한 적이 있는데요. <청춘월담>의 상대역인 전소니 배우는 지치거나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는 날에도 흐트러지거나 짜증 한 번 내는 법이 없다고 말했고요.

제가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 아닙니다.(웃음) 그럼에도 다들 저한테서 에너지를 받았다 생각해주니 고맙긴 하지만요. 현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게 결국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해요. 애정을 담뿍 품은 채임 하는 것과 그냥 일하러 왔다는 태도로 임하는 것의 차이죠. 그 마음이 다름을 만들어낼 거란 믿음이 있어요. 더군다나 이건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의도하지 않아도 즐거울 수밖에 없잖아요.

좋아서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그 마음을 오래 간직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직도 철이 안 든 것 같다고 대답하긴 해요.

일하면서 정우처럼 슬럼프나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없었나요?

물론 있죠. 당장은 체력의 변화가….(웃음) 예전에는 새벽까지 촬영해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음 신 뭐예요?” 이랬던 것 같은데 말이죠.(웃음) 당시엔 인식하지 못했는데 심적인 위기도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벅찼어요. 어디서 기인한 건지 모르겠는데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땐 그냥 당황하면서 어떻게든 움직여보자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잠깐 번아웃을 겪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입대한 기간을 제외하고 14년간 쉼 없이 활동했으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이전에 저를 가장 지치게 하는 말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연습생으로 시작해 스무 살에 데뷔한 이래 몸을 불살라가면서 10년이 훌쩍 넘 는 시간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30대가 되니까 이제 시작이라는 거예요.(웃음) 더 이상 코피 흘리면서 불사를 힘이 없는데, 어떻게 이제 시작하지? 설마 이제 열정이 사라진 건가? 막막하게 느껴졌어요. 한동안 길이 보이지 않았죠. 그래도 일단 가보자 하고 움직였더니, 신기하게도 다시 지금의 저로 돌아와지더라고요.

그럼 지금은 무엇을 동력 삼아 연기하나요? 여전히 일을 좋아하는 마음인가요?

현장에서 매 신마다 제가 무언가를 할 때, 살아 있다고 느껴요. 함께 하는 배우들이 ‘이렇게 해볼까요?’ 하면 ‘그럼 저는 이걸 받아서 저렇게 해볼게요’ 하면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저한테는 어떤 놀이 같기도 해요. 그게 좋아서 계속 하려는 것 같아요. 원래 일이란 게 좋아서 해도 막상 주어지면 막막하잖아요. 매번 그래요. “아, 몰라” 이러다가도 현장에만 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연기하게 돼요. <닥터슬럼프> 때도 그랬어요. 어렵고 어렵다 했는데, 하면서는 즐거웠어요. 다들 워 낙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웃게 되더라고요. 특히 ‘ 하늘’(박신혜)이 가족들이랑 함께하는 장면은 하나같이 좋았어요. 언젠가는 삼겹살을 구워 먹는 장면을 찍는데, 저랑 신혜 누나한테 “너희는 촬영해. 우리는 그냥 여기 있을게” 하면서 진짜로 식사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연기인지 진짜인지 모르게 해주시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데님 재킷 버버리(Burberry).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재킷 구찌(Gucci).
마리끌레르 코리아 2월호 배우 박형식 화보
블랙 셔츠와 팬츠, 화이트 슈즈 모두 더 로우(The Row).

애정을 담뿍 담아서 임하는 것이 다름을 만들어낸다 했잖아요. 이번 드라마 현장에 그 애정이 가득했던 것 같네요.

무척이요.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럼에도 굉장히 의미 있고 값진 결과물이죠. 저는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언제부터 과정의 즐거움을 깨우친 거예요? 설마 처음부터였나요?

아유, 처음엔 아무 것도 몰랐죠. 아주 짧게 나오는 단역이었는데, 그땐 연기 경험이 아예 없었거든요. 작품 들어가기 한두 달 전에 당시 소속사에서 급하게 연기 레슨을 시켰어요. 아마 연기 선생님도 당황스러웠을 거예요.

속성 과외를 한 셈이네요.(웃음)

맞아요. 기본기부터 시작하기엔 시간이 워낙 없으니까 “이렇게 해”라고 아예 답을 일러주셨어요. 그땐 그게 서로에게 최선이었거 든요. 그리고 현장에 가서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했죠. 그런데 감독님이 추가 주문을 하는 거예요. “아… 그렇게 말고 이런 느낌으로 해볼까?” 하면 “예!”라고 일단 내뱉지만 속으론 ‘저에게 답은 하나밖에 없는데요’ 한 거죠.(웃음) 그렇게 일단 부딪친 후에 이건 스스로 공부하며 파고들어봐야 한다는 걸 느꼈고, 닥치는 대로 책도 읽고 작품도 보면서 연구했어요. 그러다 드라마 스페셜 연작시리즈 <시리우스>라는 작품에서 일인이역이라는 과제를 만났고, 거기서 깨우친 것이 많았어요. 3년쯤 지나서 드라마 <화랑>과 <상류사회>에 출연하면서 현장이 보이기 시작했고요. 과정이 보이기까진 꽤 걸렸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여유고 뭐고 오케이 하나 받기 어려웠을 때도 재미있긴 했던 것 같아요. 되게 막막한데 혼자 애써서 뭐라도 하고 나면, 또 하고 싶다 그랬고요.

막막했던 벽을 부수는 일의 희열이 있죠. 그게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겠네요.

점점 더 욕심이 나고요. 다음엔 이것도 해볼 수 있겠다, 저렇게도 해볼까 하면서요.

‘안 되겠다’는 보기에 없는 거죠? ‘어떻게든 한다’만 있는.

‘틈이 보이는데? 이거 어떻 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이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