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할 때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자이언티라는 아티스트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지금의 저를 어떤 모습으로 기록하고 싶은지 떠올리고 최대한 구현하려 했어요. 요즘 여러 일이 겹쳐 화보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왔는데, 평소 일할 때 계획적으로 임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즉흥적인 편이라 즐겁게 촬영했어요.
지금의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지난 12월 발매한 세 번째 정규 앨범 <Zip>에서도 엿보여요. 오래 갖고 있던 곡도 최근에 녹음과 편곡을 다시 했다고 들었어요. 작업 환경이 더 좋아지고, 제 음악 취향의 폭도 넓어진 만큼 이전 데모를 그대로 앨범에 싣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죠. 사운드 측면에서는 자극적인 요소를 덜어내려 했어요. 곡의 의도를 지키는 데 중점을 둬 마스터링 레벨을 지나치게 키우지 않는 식으로요. 불리한 전략일 수 있는데, ‘이걸로 뭘 해 먹겠다’ 하는 심산으로 작업한 앨범은 아니니까요.
이번 앨범의 심산은 무엇이었어요? 첫걸음 같은 앨범이길 바랐어요. 제가 0의 위치에 있다 생각하고 1을 목표로 삼았죠. 쉼 없이 활동했다면 100~200은 달성하고 싶었을 것 같은데, 6년 만의 정규 앨범이니 욕심부리기보다는 제 음악이 사람들에게 다시 들리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돌이켜보면 앨범을 내야 한다는 조급함이나 부담감을 품은 적도 있지만, 그게 의미가 없더라고요. 괴로워한들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건강하게 작업을 지속할 방법을 찾은 듯해요.
그렇다면 <Zip>은 목표를 이룬 셈이네요. ‘보다 깊어진 삶에 대한 성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일상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 이번 앨범을 들으며 위로받았다는 사람이 많고, 저도 따뜻함이 배어 있는 음악인 것 같다고 느꼈어요. 감사하죠. 그런데 따뜻한 음악을 만들려고 한 적은 없어요. 갓 지은 밥 한 공기처럼 정성껏 만든 티가 나서 따뜻하게 느껴지나 싶기도 하고요. 듣는 이에 따라 이번 앨범이 다르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감동받는 사람이 있는 한편 어떤 사람은 담백하다, 걸쭉하다, 지루하다 할 수도 있죠. 다양한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걱정하진 않았어요. 그저 10개의 수록곡 중 하나라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리스너로서 아티스트의 진심이 담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곡 작업이 오직 타인만을 위한 일은 아닐 거라 짐작해요. 맞아요. 제 음악이 타인을 만나 쓸모가 생기기를 바라는 시점은 그 곡들이 저한테 쓸모없어진 이후인 것 같아요. 음악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저 자신을 위한 시간이에요. 표현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음악을 만드는 재능과 능력을 길러온 덕분에 외로움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작업으로 소모할 수 있어요. 그래서 ‘결코 쉽게 탄생하지 않은 음악’이라고 말한 적도 있고요. 그렇게 나온 음악은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고 봐요.
⠀⠀⠀
⠀⠀⠀
내 감정을 모조리 쏟아부은 음악이 나를 떠나 세상에 공개된 순간에는 후련한가요?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아요.(웃음) 앨범 발매가 결혼식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예식을 올리려면 사전에 여러 준비를 해야 하고, 당일에는 우리가 이만큼 사랑한다는 걸 사람들 앞에서 보여줘야 하잖아요. 예비부부가 결혼식을 마냥 즐기기는 어렵듯이, 저도 앨범이 공개되는 날이 오면 육체적으로 지치더라고요. 제가 안도하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결혼식의 하객, 그러니까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후련해 보일 때예요. 이번 앨범을 만들며 저뿐 아니라 우리 팀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래 호흡을 맞춰온 동료부터 새롭게 함께하며 신선한 훼방을 놓아준 작곡가까지 모두 공을 많이 들였죠.
팀원들과 협업하며 자주 한 말이 있다면요? “엉망이다”, “개판이네”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 자주 썼어요.(웃음) 가공되지 않은 사운드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릴 때가 있어요. 어떤 경우에는 숨소리만으로 표현이 가능하기도 해요. 창작은 규칙이 정해져 있는 영역이 아니잖아요. 음악의 방향성과 부합한다면 사운드를 다룰 때 힘을 빼거나 반대로 더 줘도 괜찮다고 봐요.
사운드 가공을 정석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음악의 완성도에는 정석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였을 거라 짐작해요. 그렇죠. 음악은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기도 하니 양심을 지킨 거예요. 집요하게 작업하는 건 성향 탓인가 싶기도 해요. 최선에 대한 제 나름의 기준이 있어요. 미로 찾기에 비유하자면, 일단 한번 들어섰을 때 끝까지 가봐요. 힘들게 탈출할 수도, 술수가 통하거나 운이 좋아 빨리 벗어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전 출구가 보이더라도 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요. 모든 길을 다녀봐야 비로소 그 미로에 대해 알게 될 테니까요. ‘이 버전보다 잘 부를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밥을 덜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연주를 바꿔볼까?’ 이렇게 고민을 거듭하며 다시 해보면, 설령 그게 잘못된 시도였을지라도 더 나은 방식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거죠.
근래 들은 최선에 대한 묘사 중 가장 와닿네요. 작업을 그릇에 비유한 말도 떠올라요. “내가 원하는 크기와 재질의 그릇을 잘 고르고, 채워질 때까지 내놓는다”라고 했어요. 제가 고른 그릇과 그 안에 담은 내용물이 어떤 매장에 필요할까, 손님들이 원하는 그릇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동시에 제가 어떤 그릇을 만드는 사람인지 계속 상기해요. 여러 기준의 중간 지점에 있는 그릇들을 선보이려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만들고 발표하지 않은 곡도 많아요.
⠀⠀⠀
⠀⠀⠀
시간이 흐르면 음악 시장에도 변화가 생기잖아요. 데뷔 이후 10여 년간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고자 했나요? 초반에는 제 음악의 카테고리가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어요. 저를 포함한 동료들이 으쌰으쌰 신을 키워갔죠. 그러면서 타협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주도한 타협이었어요. 이 시장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제 앨범과 피처링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데이터가 점점 쌓였고, 어느새 제가 시장에 알려졌어요. ‘내 음악이 대중에게 어떻게 들리지? 이게 현시대가 원하는 음악이구나. 다행이다. 그럼 그다음은 뭘까?’ 하고 고민했죠. 오랫동안 한길을 걸으며 더 깊이 있는 결과물을 선보이는 대가들도 있지만, 전 트렌드를 살피며 다양한 것을 재미있게 배워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음악의 모양새가 변해왔죠. 다만 방식이 조금 바뀌었을 뿐 저는 항상 같았어요.
앞으로도 변치 않을 자이언티 음악의 본질에는 무엇이 있었으면 하나요? 근사함. 그럴 수 있도록 제 감각을 꾸준히 단련하고 싶어요. ‘내가 근사하다고 느끼는 곡이 당신에게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이제 생겼어요. 저를 더 알아갈수록, 제가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더 명쾌히 내리게 될수록 그 확신이 단단해지는 듯하고요. 물론 모두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 음악을 아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거든요. 소수일지라도 제 음악 세계에서는 모두인 그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계속 만들 수 있기를 바라요.
우아한 뮤지션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죠. 자이언티가 생각하는 우아함이 무엇일지 궁금한데, 최근 우아하다고 느낀 대상이 있나요? 금과 다이아몬드요. 왜냐하면 하나의 원소기호로 표현할 수 있어서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무언가의 뿌리 끝에 있는 물질이죠. 이처럼 순수에 가까운 게 우아하다고 느껴요. 단순하고 기능적이면서 아름다운 것들. 저도 창작하거나 일상을 살아갈 때 좀 더 순수하고 싶어요. 절대로 온전히 순수할 수는 없겠지만, 순수를 향해 방향을 잡으려고 해요.
⠀⠀⠀
⠀⠀⠀
이제 앨범을 내며 맞이한 겨울을 지나 새 계절을 기다리는 시기예요. 앞으로 펼쳐질 날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떤가요? 설레고 기대돼요. 전 현재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미래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에요. 앞으로의 음악과 문화에 대해 생각하며 현실적인 망상을 하다 보면, 제가 미래에 먼저 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채우기 위해 내다 놓은 그릇이 많은데, 예전엔 꽉 찬 그릇을 오래 갖고 있었지만 올해는 채워지는 대로 선보이려 해요. 그중에는 처음 해보는 것들도 꽤 있어요. 어렵겠지만 자신 있어요. 챌린지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어떤 일들을 계획 중인지 기대되네요. 지금의 제가 음악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제가 하는 일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실감해요. 미디어가 충분히 조명하지 않는 아티스트들이 설 자리와 기회가 더 많이 생기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우리부터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진정으로 문화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싶고요. 트렌드는 돌고 돌기 마련이니 그들의 음악이 부흥하는 시대는 올 수밖에 없어요. 그날을 기다리며 제가 운영 중인 회사 ‘스탠다드 프렌즈’의 향후 활동도 준비 중이에요. 당장은 재미없게 느껴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젠가 ‘볼만하네!’ 싶을 때쯤이면 우리가 아마 많은 걸 하고 있을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