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롭트 재킷, 매듭 드레이프 미니스커트, 아르마딜로 보 부츠, 빔 링 모두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타이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크롭트 재킷과 빔 링 모두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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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채’ 역으로 출연한 드라마 <연인>이 결말을 맞이한 지 10여 일이 흘렀어요. 종영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요? 지난 1년간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작품이라 종영 직후에는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였어요. 며칠은 집에서 잠만 자다시피 했죠.(웃음) 한동안 쉴 수 있어 좋다는 생각만 했는데, 어제 혼자 산책할 때 처음으로 마음이 시큰해지더라고요. <연인>이 끝났기 때문인가 싶었어요. 일상으로 슬슬 돌아오는 중이니 이제는 작품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해요.

체력만큼 감정도 많이 쏟아내야 하는 작품이었을 거라 짐작해요. 맞아요. 길채에게 극한의 상황이 자주 닥쳤으니까요.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포로 생활을 하는 등 지난한 인생을 사는 인물을 표현하다 보니 저도 현장에서 힘들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토해내고 나면 오히려 해소되더라고요. 그래서 슬픈 장면의 여운이 길게 남진 않았어요.

슬프고 절망할 만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길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안은진 배우도 길채를 연기하며 얻은 것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꼽았죠. 어떤 상황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길채를 연기하며 힘을 얻었어요. “버텨, 버티는 거야”, “난 살아서 좋았어”를 비롯한 몇몇 대사는 속상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들 때 꺼내 보려고 따로 적어두었고요. 무엇보다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길채를 만나 깊이 느꼈어요. 우리는 살아가는 데 이미 큰 에너지를 쏟고 있잖아요. 그러니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연인>을 시청하신 분들도 이를 느꼈다면 길채를 연기한 배우로서 무척 감사한 일이에요.

길채가 지닌 강인한 내면뿐 아니라 ‘장현’(남궁민)과 나누는 절절한 사랑도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어요. ‘길채와 장현 같은 사랑이 실제로 있을까?’ 싶었어요. 아마 조선시대가 배경이라 둘 사이의 그리움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요즘 연인은 서로 쉽게 연락하고, 상대가 멀리 있더라도 금방 찾아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길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제가 현대인으로서 지닌 사랑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어요. 그토록 애절한 사랑을 작품 속 세계에서 느낄 수 있어 좋은 경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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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브리스 미니 원피스 손정완(SON JUNG WAN), 부츠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타이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크롭트 재킷, 블랙 매듭 드레이프 미니스커트, 블랙 아르마딜로 보 부츠, 실버 빔 링 모두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타이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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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배경을 차치하더라도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길채와 장현의 사랑은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안은진 배우는 운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요. 운명을 믿기보다는 물 흐르듯 사는 편에 가까워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수많은 선택을 해야겠죠. 물론 어떤 선택은 실수로 이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통해 배우는게 분명히 있다고 봐요. 제 선택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면 그 이유를 찾아 보완하려 해요. 제 노력을 통해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굳혔어요.

스스로 변화를 이뤄야 한다고 느낀 계기가 있나요? 나이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20대를 지나 보다 안정적인 30대에 접어들며 제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삶을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구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이를테면 예전에 비해 일상의 루틴을 잘 지키려 해요. 제가 건강한 생활을 할 때 삶의 만족감이 높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여러 인터뷰에서 본인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려 한다고 말한 게 떠오르네요. 다이어리에 매달의 목표를 적는데, 12월에는 ‘내 삶을 살자’라고 썼어요. 요즘 소소한 집안일을 하며 큰 안정감을 느껴요. 지난밤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숙주를 발견해 급히 무쳤는데 문득 행복하더라고요.(웃음) 또 양배추를 찹찹 썰어 넣은 건강식 해 먹고, 침구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미루던 독서도 하고. 이런 식으로 집에서 보내는 제 시간을 알차게 채우는 중이에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해준다면요? 극단 차이무의 이상우 예술 감독님이 쓰신 <야생연극>을 읽고 있어요.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의 오랜 연극 경험과 철학이 담겨 있는 책이에요. 20대 중반 무렵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연기 경력을 더 쌓은 뒤 다시 살펴보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되어주더라고요. 제 경험을 대입해보며 선생님의 말씀이 지닌 의미를 헤아려보기도 해요. 마음에 크게 와닿은 부분을 찍어두었는데… (휴대폰에서 사진을 찾아 읽는다) “내 연극은 죽은 연극인가, 산 연극인가. 바둑에서 고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승패보다 활기가 앞서야 한다’. 당연히 이기는 게 목표지만 살아 있는 바둑이 아니면 둘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겨도 기분이 좋지 않은 바둑, 죽은 바둑.” 아무리 성공적으로 보인다해도 죽은 연기라면 좋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구절이에요.

안은진 배우는 살아 있는 동시에 이기는 바둑을 둔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작 <연인>만 봐도 호평과 흥행을 모두 얻었어요. 이겼는지 졌는지 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웃음) 다만 승패가 활기보다 앞선 적은 없다는 건 분명해요. 언제나 활기가 있는 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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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보리 엠브로이더리 재킷 가브리엘라 허스트(Gabriela Hearst).

컷아웃 포인트 재킷과 페더 트리밍 스커트 모두 와이씨에이치(YCH), 롱부츠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타이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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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년의 노력을 쏟은 <연인> 이후를 준비할 시기죠. 2023년을 알차게 보냈으니 새해를 맞는 마음이 뿌듯할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12월 31일까지 잘 살아야겠어요. 연말이 다가오면 한 해를 돌아보며 저에 대한 일기를 쓰거든요. 이번에는 그 글에 이 말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고생 많았다. 내년에 더 잘해보자!”

2024년의 첫 달부터 차기작 소식이 있어요. ‘애림’ 역을 맡은 영화 <시민덕희>가 곧 개봉하죠. 보이스 피싱을 당한 ‘덕희’(라미란)가 본인에게 사기를 친 ‘재민’(공명)의 구조 요청을 받으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어요. 덕희는 길채와 닮은 지점이 있는 인물이에요. 삶에 대한 그의 간절한 마음이 통쾌한 복수로 이어지죠. 미란 언니를 비롯한 선배님들과 즐겁게 촬영한 작품인데, 얼마 전 개봉을 앞두고 오랜만에 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새록새록 재미있더라고요. 같이 무대 인사를 다니며 관객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돼요.

이번 작품에서는 안은진 배우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시민덕희>는 4년 전에 촬영한 작품이에요. 약 1년 전 개봉한 <올빼미>보다 먼저 찍었으니 첫 영화 작업이었죠. 얼마 전 내부 시사회에서 <시민덕희>를 미리 감상했는데, 스크린 속 제 모습이 부끄러우면서도 풋풋해 보이더라고요.(웃음) 당시엔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제 눈엔 허점이 많이 보여요.

그사이 한층 성장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어요. 성장은 안은진 배우가 연기한 여러 캐릭터를 관통하는 단어이기도 해요. 어떤 장르든 성장 서사가 있는 캐릭터에게 애정이 가요. 그들을 표현해내는 작업도 좋아하고요. 성장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공감을 자아내고, 점점 단단해져 결국 이겨내면 큰 울림을 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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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드레스 페라가모(Ferragamo).
브라운 비대칭 탱크 톱과 스커트 모두 우마 왕 바이 톰(Uma Wang by TOM), 브라운 스웨이드 롱부츠 브리아나(Br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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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는 배우가 지닌 성정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잖아요. 본인에게도 단단한 면이 있다고 느끼나요? 무언가 잘 풀리지 않아 힘들 때 금방 털어내는 편이긴 해요. 평소 주변 사람들과 위로를 자주 주고받아요. 누군가 옆에서 잠시 토닥토닥해주면 금세 회복하더라고요. 말뿐인 공감과 위로일지라도 좋아요. 모두 저마다 힘든 부분이 있을 텐데 타인에게 100% 진심을 다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어요. 다만 그렇게 마음을 추스른 뒤 명확한 진단을 받아요. “은진아, 힘들었겠다. 괜찮아”라는 말로 정말 괜찮아지면 “그런데 네 불찰도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는 고쳐보자”라는 말도 받아들이는 거죠.

다정한 위로와 냉철한 조언이 안은진 배우의 디딤돌인 셈이네요. 돌이켜보면 배우이자 사람으로서 계속 성장해온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제가 작품을 통해 만난 캐릭터들이 그랬듯, 저 또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청사진이 그려져요. 작은 행복을 누리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요. ‘수십 년 후의 내가 얼마나 더 멋있어질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떤 사람인지 얼굴에 드러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본인의 얼굴에서 무엇이 보였으면 하나요? 생기요. 지나온 날들이 이뤄낸 생기가 보이는 얼굴이면 좋겠어요. 그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지금처럼만 나아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