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명확히 알고, 무수한 새로움을 직면하는 것. 배우 안보현이 스스로 나아가는 방식.

베스트 Versace.
셔츠, 팬츠, 슈즈 모두 Prada.

‘팝 퀴즈’ 영상을 촬영할 때 의외라고 느꼈어요. 풍선을 아무렇지 않게 터뜨릴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더군요.

제가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단 하나 꺼리는 게 풍선이에요.(웃음) 풍선을 부는 것도 싫어하고, 제 손으로 터뜨려본 적도 드물어요. 그래도 여태껏 안 해본 방식의 콘텐츠라 극복해보자는 생각으로 했어요. 풍선이 예쁘게 터지는 그림이 이번 화보와 어울릴 것 같았고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웃음)

‘진이수’ 역으로 함께한 드라마 <재벌×형사>가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죠. 내 손을 떠나 완성된 작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나요?

촬영 당시의 즐거움이 녹아 있는 것 같아 좋았어요. 다른 배우들과 함께 재미있어 한 지점들이 잘 살아 있었고, 감독님의 요청으로 시도해본 많은 애드리브도 거의 다 담겼더라고요. 실제로 현장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어요. 스태프들의 힘이 컸죠. 제가 갈 때마다 스태프들이 “이수 형 왔다!” 하며 기립 박수를 쳐서 그만하라고 부탁할 정도였어요.(웃음) 그렇게 함께한 111회차의 시간이 참 값지게 여겨져요.

현장 분위기의 중요성을 실감한 시간이었겠어요.

합이 잘 맞는다는 게 뭔지 확실히 느낀 현장이었죠. 언제부턴가 저보다 나이 어린 배우와 스태프가 많아져 부담이 컸는데, <재벌×형사>를 촬영할 땐 부담감을 잊을 수 있었어요. 현장 분위기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더라고요. 제가 자칫 지쳐 있으면 동료들도 덩달아 힘들어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평상시에도 제 기운을 북돋워야겠다 싶었어요. 이번 작품을 계기로 배우로서 방향성이 잡힌 듯해요.

셔츠 Lemaire.
베스트, 안에 입은 톱, 팬츠 모두 Versace, 브레이슬릿 Kudos.
셔츠, 팬츠, 슈즈 모두 Lemaire.

진이수와의 만남이 본인에게 미친 영향도 있나요?

이수는 제가 지금까지 표현한 캐릭터 중 텐션이 제일 높아요. 철부지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면에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있죠. 재벌 3세인데 갑작스레 강력계 형사가 되어 여러 사건을 해결 한 뒤, 아픔을 품은 채 살아갈 남겨진 이들을 도우려 하는 그가 연민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겉은 빠삭한데 속은 촉촉하달까요. 저도 제 안에서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수 덕분에 그 감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따뜻한 성정이 진이수와 안보현의 교집합인 것 같아요. 동료 배우들이 들려준 미담도 많더라고요. (안보현 배우는 화보 촬영 당일에 스타일리스트의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왔다.)

대놓고 잘해주는 건 왠지 낯간지러워 뒤에서 도우려 해요. 일부러 ‘츤데레’처럼 구는 건 아니고요.(웃음) 제 성향이 묻어나는 행동인 듯해요. 체격이 크고 이미지가 강인한 데다가 웃음이 헤픈 편도 아니라 다가오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중에야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으니 캐릭터를 벗어난 인간 안보현의 모습도 많이 보여주려고 해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SNS 등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것도 그 일환이죠.

마침 첫 번째 팬 미팅 투어를 시작한다고 들었어요. 서울을 포함해 6개 도시를 찾아가 팬들을 만난다고요.

큰맘 먹고 마련한 자리예요. 사실 지금도 제가 팬 미팅을 하는 게 맞나 싶어요. 저를 마주했을 때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면서도 걱정스럽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 좋아해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전에 팬들과 만나는 시간을 몇 번 가졌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그분들의 마음에 화답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에요. 한 분씩 제대로 아이 콘택트를 하고 싶어 라식 수술도 앞두고 있어요.(웃음)

배우를 향한 애정은 작품 속 어떤 얼굴에서 비롯되기도 하죠. 안보현 배우도 <재벌× 형사> 이전에 <이태원 클라쓰> <유미의 세포들> <군검사 도베르만> 등을 통해 10 여 년간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어요.

모든 캐릭터에 애착이 가요. 하지만 떠나보내야 할 땐 잘 보내줘요. 지나간 것이 남기는 후회와 미련보다는 다가올 것에 대한 압박을 더 크게 느끼는 편이거든요. 역할의 비중이 어떻든, 대본 리딩을 할 때부터 방송이 끝날 때까지 ‘나만 잘하면 된다’는 긴장감을 항상 품었어요. 잘해내서 기분 좋게 오케이가 나고, ‘내가 고민하고 판단한 게 옳았구나’ 싶은 순간이 와야 비로소 희열을 느끼죠.

셔츠, 네트 톱, 팬츠 모두 Hermès, 네크리스 Roaju, 브레이슬릿 Fred.
재킷과 셔츠 모두 Louis Vuitton.

연기한 시간이 쌓일수록 내게 잘 맞는 캐릭터가 무엇인지 선명해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아직 찾아가는 단계예요. 그런데 잘하는 걸 계속 하는 건 제가 추구하 는 방식이 아니에요. 제가 맡았던 캐릭터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서로 간극이 크거든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어려운 도전도 마다하지 않으며 배우로서 세계관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삶이 있잖아요. 누군가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일이 재미있어요. 과정이 지난하더라도 결과물을 볼 때 “이날 진짜 추웠는데” 정도로 미화되는 걸 보면, 제 마음이 이 일을 계속 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해요.

과정 자체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도 찾았나요?

이겨낼 방법을 알았다면 도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저 자신에게 당근 대신 채찍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만족하지 못하니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해요.

나에게 너무 엄격하면 괴로워질 수도 있잖아요.

부상에서 회복하던 시기에 몸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하지 않은 적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너지더라고요. 몸으로 한번 겪어보니 정신이 흔들리면 더 힘들 것 같아요. ‘그냥 하던 대로 해야 겠다’ 싶은 거죠. 다만 지나치게 괴로워지지 않도록 엄격함의 기준을 무언가를 ‘했다’는 데 두고 있어요. 이를테면 운동을 40분밖에 못 하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저한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당근인 듯해요. 주변에서 “피곤하게 산다”, “독한 놈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제는 받아들여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느끼기 때문에 팔자려니 해요. 저에 대해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게 있다”라고 말한 게 떠오르네요. 안보현 배우의 지금은 노력으로 일궈낸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노력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웃음) 전 포기를 안 했을 뿐이에요. 제 인생을 돌이켜보면 운동선수, 직업군인, 모델은 주어진 환경에 맞춘 선택이었지만 배우는 생각지도 못한 도전이었거든요. 어릴 때 TV에 나오는 배우들을 보면서 호기심만 가졌던 제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직도 감개무량해요. 이토록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막막함 속에서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요. 스스로에 대한 나름의 칭찬일 수도 있겠네요.

재킷, 셔츠, 팬츠 모두 WooYoungmi, 링 Fred, 슈즈와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셔츠, 팬츠, 슈즈, 삭스, 스카프 모두 Ami.

긴 시간 부단히 노력을 쏟아온 자신에게 보상을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를 위한 물질적인 보상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그보다는 누군가에게 받은 것에 보답하고 싶어요. 고마움을 기억하고 되갚는 시간 속에 그간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것 같거든요. 이제는 제가 사람들한테 삽겹살에 소주 한잔을 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어요. 며칠 전에는 대학생 때 같이 살았던 친구들이랑 부산에 가서 나름대로 호화로운 여행을 했거든요. 다녀와서 애들이 정산하자길래, 내가 하고 싶은 걸 한 거라고 말하면서 장문의 카톡을 주고받았어요. 오글거려서 하트 누르고 말았지만 되게 좋더라고요. (휴대폰을 보고는) 할머니가 전화하셨네요.

할머니가 안보현 배우의 작품을 꾸준히 챙겨 보신다고 들었어요.

할머니가 미용사로 일하신 적이 있어서 그런지 앞머리를 두 가닥 내린 이수의 헤어스타일이 웃기대요. 연기인 걸 아시는데도 위험해 보이는 장면이 있으면 “다치지 않았냐, 얼굴 긁혔던데” 하며 엄청 걱정하시더라고요. 그 순수한 마음이 귀엽고 소중하게 느껴져요. 명절이면 찾아뵙고 화보 등을 보여드리기도 하는데, 사촌 동생들이 너무하다고 말할 만큼 할머니 댁이 제 얼굴로 도배돼 있어요.(웃음) “우리 손주 나오는 방송 본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뿌듯해요.

내 사람들로부터 큰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가장 큰 원동력, 자극제이자 자양분이에요. 저한테 유일한 복이 있다면 인복인 것 같아요. 시사회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 이 넘칠 만큼 있고, 작품 잘 보고 있다는 연락도 많이 와요. 그럴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우 하길 잘했다. 이건 내 천직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