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마음으로, 그 용서는 타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요즘 ‘Midnight Radio’를 부를 때 헤드윅이 제일 멋있더라고요.”
8년의 시간을 건너온 배우 조정석이 다시 헤드윅이 되어 부르는 노래.

셔츠와 타이, 재킷, 팬츠, 슈즈 모두 Alexander McQueen.
톱과 점퍼 모두 Bally.
톱과 점퍼 모두 Bally, 팬츠 Golden Goose, 슈즈 Dolce & Gabbana.

첫 컷 촬영 때 ‘Wig in a Box’를 낮게 흥얼거리시더라고요. 가까이서 들으며 오늘 호강하는 촬영이구나 싶었습니다.

작게 흥얼거려봤습니다.(웃음) 공연이 얼마 안 남아서요. 마지막 <헤드윅> 공연이 8년 전인데, 다시 연습하면서 생생하게 기억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래, 맞아, 이랬지’ 하면서.

2006년 첫 무대 이후 2008년, 2011년, 2016년에 이어 다섯 번째 시즌입니다. 20대에 시작해 40대에 만나는 <헤드윅>이라는 작품은, 인물은 어떻게 달리 다가오나요?

무엇보다 체력적인 변화를 느낄 것 같습니다.(웃음) 체력적인 변화는 확실히 느끼고 있어요.(웃음) 동시에 그사이 여덟 살 더 먹었다고 인물에 대한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어요. 헤드윅이라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전에는 헤드윅을 제대로 연기해낸다는 목표에 급급했다면 지금은 헤드윅이라는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배우니까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연습하는 과정에서 문득문득 이전보다 내가 더 헤드윅이 돼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어느 특정 장면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건가요?

아마 <헤드윅>을 좋아하는 분들은 큼직한 사건이나 장면을 사진처럼 탁탁 떠올릴 것 같아요. 한데 지금의 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훅 하고 다가오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 “제 인생의 서막을 열어줄 시 한 편 읊어드리겠습니다” 하고 밴드에 사인을 주면 피아노로 BGM을 살짝 깔아주는 장면이 있어요. 불현듯 이 부분에서 울컥한다거나, 전주만 나왔을 뿐인데 대사를 못 할 정도로 감정이 크게 올라오기도 해요. 이는 연습마다 달라지는데 이런 새롭고 놀라운 경험들이 제 안에 조금씩 쌓이고 있어요. 다섯 번째 시즌이니 낯설 수 없는 캐릭터인데 생경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고 있어요. 그래서 재미있고요. 무대에서 내가 어떻게 공연할까, 공연할 때 내가 어떤 마음일까 궁금해요.

오랜 시간 헤드윅을 연기했음에도 어느 때보다 헤드윅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맞아요. ‘나는 꼭 헤드윅이 될 거야. 무대 위에서 그의 슬픔과 아픔, 고뇌 등의 다양한 감정을 반드시 잘 보여주겠어. 꼭 그렇게 되어야지’ 하는 마음은 아니에요. 근데 지금의 이 태도야말로 이전보다 헤드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8년이라는 시간이 꽤 긴 시간이긴 하잖아요. 그 시간 동안 조정석으로 살아온 조정석이 헤드윅을 다시 만난 건데 지나온 내 흔적들이 앞으로의 무대에서 조금씩 발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몸을 빌려 대신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니까요. 시즌마다 내가 헤드윅을 어떻게 만나는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그 점이 참 신기해요. 헤드윅은 그대로인데 저는 계속 바뀌는 거잖아요.

톱과 점퍼 모두 Bally, 팬츠 Golden Goose, 슈즈 Dolce & Gabbana.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헤드윅> 첫 무대를, 스물일곱 살이던 자신을 어떻게 기억해요?

부산에서 첫 공연을 한 기억이 나요.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서울에 올라와 SH 클럽이라는, 2백50석의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거든요. 부산에서 첫 무대에 오르기 전날 밤 도통 잠이 안 와서 힘들었어요. 결국 잠을 못 자고 공연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2006년 저의 첫 <헤드윅> 공연은 최고의 컨디션은 아니었다는 것. 그 기억은 확실해요.(웃음)

<호두까기 인형>으로 데뷔 후 <그리스> <넌센스> <벽을 뚫는 남자> <스프링 어웨이크닝> <헤드윅> 등 무대 위에서 오랜 시간 연기했습니다. 아마도 젊은 관객들은 조정석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는지 모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 출발해 영상 매체로 자리를 옮긴 많은 배우들이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죠. 조정석 배우에게 무대는 어떤 곳인가요?

무대는 언제나 소중하고 그리운 곳이죠. 좋은 작품을 찾아 헤매다가도 언제든 서고 싶고, 달려오고 싶은 곳이에요. 배우가 한순간도 놓지 않아야 하는, 놓쳐서는 안 되는 곳이고 무대 위에서라면 항상 살아 숨 쉬고 있어야 하죠. 그 위에서 우리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잖아요. 내 호흡도, 함께하는 관객도, 매일매일의 공연이 다 다르고 새롭죠. 공연이 끝난 후에는 동료들과 모여 그날의 공연에 대해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위로받고, 어떤 실수를 했다면 내일 만회해야지 하는 용기도 얻고요. 지금까지 무대 안과 밖에서 쌓은 좋은 기억이 많아요. 그래서 <헤드윅>에 대한 감사도 커요. 이렇게 매력적이고 애착이 가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거든요. 오랫동안 한 작품에 출연할 수 있도록 마음을 이끌어준 것이 고맙죠.

무대에서 얻는 배우의 희열은 두려움과 비례할 것 같습니다. 무대에 올라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양해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NG도 없어요. 어디에도 변명할 수 없는 연기를 해내야 하는 무대 연기의 특성이 배우를 훈련시키고, 성장하게 했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배우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고요. 어떤가요?

예전에는 완벽한 연기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어요. 보통 7~8주에 걸쳐 공연 연습을 하거든요. 같이 합을 맞추는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이나 사전에 약속한 장치적인 요소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요즘은 나 스스로에게 조금 유해져야 하지 않을까,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작품과 동료 배우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요. 그것이야말로 무대에서 진짜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왜 우리가 말을 할 때 더듬을 수도 있고, 흥분해서 말이 안 나오기도 하잖아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려던 말을 잠시 멈출 때도 있고요. 한데 이런 모습이 무대에서라면 마치 배우가 대사를 까먹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죠. 그렇지만 설령 누가 봐도 확실한 실수라 하더라도 나 자신은 그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무대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에서야 들어요.

셔츠와 재킷, 타이 모두 Alexander McQueen.

나를 용서하려는 마음은 타인에게 그대로 전이되기도 하잖아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용서를 참 잘합니다.(일동 웃음) 꽤 너그러운 편이에요. 심각하게 화를내는 일도 거의 없어요. 어떤 때는 누가 그래요. 그게 더 무서운 것 같다고, 차라리 화를 내라고. 남들이 봤을 때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나 봐요. 근데 화가 나야 화를 내지….

가능한… 일인가요?

너그럽고 여유를 가져야겠다 하고 다짐하기보다 무의식중에 그러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왜 근거 없는 자신감 있잖아요. 어릴 때 태권도를 해서 그랬나?(웃음) 누구를 미워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법도 없었어요. 하지만 경쟁은 되게 빡세게 하는 아이. 뭔지 아시죠?

오직 나와의 싸움.

맞아요. 맞아요.

과거 <헤드윅> 시즌마다 한 인터뷰들을 찾아 읽어봤는데 가장 애정이 가는 넘버로 ‘Tear Me Down’을 주로 꼽았더라고요. 2024년의 최애 넘버는 어떤 곡인가요? 식상한 질문인데 같은 질문을 20여 년에 걸쳐 하니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웃음)

지금은 ‘Midnight Radio’예요. 우리가 방금 너그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잖아요. 헤드윅도 그런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 용서는 타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요즘 ‘Midnight Radio’를 노래할 때 헤드윅의 모습이 제일 멋있더라고요.

데뷔 20주년입니다. 숫자라는 것이 묵직한 무게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날은 참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죠. 이 두 감정이 동시에 들 때도 있을 것 같고요. 어떤가요?

햇수로 20년이고, 만으로는 19년….(웃음)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누구나 그렇지만 유난히 힘든 시기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 시간을 내가 무슨 힘으로 버티고 이겨냈을까 돌이켜보면 그 동력은 오롯이 창작에서 오는 즐거움이었던 것 같아요. 주어진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인물을 연기해내는 것, 대사를 뱉고 몸을 움직이는 건 결국 나라는 사람을 통해 창작을 해내는 거잖아요. 그 창작의 작업이 늘 재미있고 행복했어요. 때로는 연기를 신성하고, 고귀하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한데 이런 진지한 접근은 때로 어느 순간 나를 이상한 벽에 가두기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행히 저는 연기를 놀이처럼 시작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연기에 임했다는 것, 연기로 인한 행복이나 기쁨, 만족감이 동력이 됐다는 것, 긍정적인 생각들로 버티고 이겨내 지금 이 시간까지 왔다는 것이 기특한 거예요. 힘든데 꾸역꾸역 이겨내는 게 아니라. 칭찬해주고 싶어요. 아직 20년밖에 안 됐지만.

재킷, 톱 모두 Givenchy.

방금 이야기했지만, 배우라는 일은 결국 자신의 몸이 재료인 셈이죠. 나라는 재료를 어떻게 쓰고 싶은가요?

어느 중요한 순간에 맛을 기가 막히게 내는 재료였으면 좋겠어요. MSG는 아니고요. 고추장찌개의 고춧가루나 된장찌개의 된장도 아니고, 사골 육수 같은? 구성진 재료가 되면 어떨까. 배우가 나이 들고, 그 나이에 걸맞은 역할들을 하나씩 해나가며 인생을 살아가는 게 엄청난 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올해 마흔넷이니까 내년이면 마흔다섯, 6년 후면 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구성진 맛이 나에게 있으면, 내가 그런 맛을 내는 재료가 되면 좋지 않을까요.

구성진 맛과 깊은 맛은 다른 거죠?

그렇죠. 깊은 맛은 좀, 너무 진지하잖아요. 구성진 건 뭔가 약간 좀… ‘어~허이!, 어허~이!’ 하는. 뭔지 아시죠?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계속 배우로 살아가기 위해 배우 조정석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것, 덜어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덜어내야 할 건 강박관념. 누구나 빈틈이 있고 실수할 수 있다는 마음,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너그러움을 가질 수 있도록 강박관념을 덜어내야 할 것 같고요. 가져가야 할 건 책임감이죠. 백 번, 천 번을 이야기해도 부족한, 중요한 덕목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 작품과 역할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책임감. 인간 조정석의 울타리 안에서 가져가야 할 책임감까지도 포함해서요.

배우들이 흔히 그런 말 하잖아요.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된다.’ 이 말에 동의하나요?

완전히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에도 동의하겠죠. 별로 안 좋은 사람은 별로 안 좋은 배우밖에 못 된다. 그렇다고 제가 좋은 사람인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아주아주 나쁘고 못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