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커다란 시간을 공유하면서. 모든 찰나가 아름답다는 말을 옆에 두고서. 괜히 따라 웃고 싶게 미소 짓던 우리의 아저씨, 김창완과 함께한 푸르른 여름날.
김창완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잠자리 안경을 쓴 1984년의 김창완은 허공을 응시하며 ‘청춘’을 부르고, 돋보기를 든 2020년의 김창완은 ‘노인의 벤치’ 가사를 읊조린다. 2024년 초여름, 김창완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시간’을 불렀다. 밴드 산울림으로 한국 음악사에 커다란 획을 긋고 글, 음악, 그림, 그 너머의 이야기로 위로를 전하며 이 시대의 참 어른이라 불리기까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세월을 거쳐온 이에게 시간에 관해 물었다. 이 기나긴 생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 당신의 숱한 낮과 밤을 거쳐 쌓인 아름다움은 어떤 모양인지.
시간은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가거나 차창 밖 풍경처럼 한결같이 뒤로만 가는 게 아니라던 김창완의 노래 가사처럼, 이 인터뷰는 이때와 저 때가 이리저리 뒤 섞여 있다. 촬영 중 문득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한 뒤에, 집 앞마당에서 햇살 을 맞으며, 서래마을의 미역국집에서 막걸리를 따라주며, 늦은 밤까지 이어진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제작진과의 회식 자리에서. 어떤 때에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때는 깊은 사색에 잠긴 듯 쉬이 말문을 열지 못했다. 헤어질 무렵에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건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순수하고 투명한 눈빛이었다.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깊고 아름다운 주름을 내어 보이며 싱긋 웃던, 김창완과 나눈 대화.
생각보다 촬영을 오래 해서 힘드셨죠?
아유, 말도 마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이리저리 많이 찍더라고. <마리끌레르>가 아주 무서운 잡지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사진은 잘 나오겠지요.(웃음)
2024년의 김창완을 기록할 수 있어 기쁩니다.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 완입니다>(이하 <아침창>)의 마지막 방송 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그날 어떤 마음을 품고 집을 나서셨어요?
이별을 준비하지 말자… 감사함이나 섭섭함, 아직 말로 떠오르지 않은 감정에 갇히지 말자고 생각했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아침을 마주하며 방송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23년간 매일 아침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쓰셨어요. 그 글을 모아 묶은 책이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고요. 책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가장 아름다운 아침은 그 아침도 저 아침도 아닌 이 아침’이라고요. 오늘은 어떤 아침을 마주하셨나요?
습관적인 아침이었어요. 머릿속으로는 처음 보는 아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큰 반죽에서 떼어낸 조그만 덩어리 같은 아침이었어요. 제일 먼저 열린 건 귀였어요. 새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글을 쓰고 있더군. 눈이 열렸다는 이야기인데, 그건 미처 몰랐어요. 귀가 열리고 나서야 눈을 뜨고 있다고 자각했거든. 그러더니 왼쪽 겨드랑이가 아팠어요. 그렇게 오감이 깨어났죠.
<아침창>을 진행하는 동안 매일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감각하고 또 기록해오셨잖아요. 그 시간들이 어떤 영향을 가져다주었나요?
감각이 깨어남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요리하기 전 재료를 다듬는 일과 비슷해요. 아침은 매번 신선한 재료가 되지요. 그런데 요즘 돌이켜보면 내가 아침에 다가갔다기보다 아침이 나를 덮친 것 같아요. 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발견하고 알려줘야겠다 싶었는데, 사실 나에게 다가왔던 거예요, 하하. 아침이 주어고 내가 목적어가 된 셈이지.
다가오는 아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침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지만, 바쁜 일과를 시작하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대부분 그렇게 지내죠. 근데 뭐, 나도 몰라.(웃음) 음… 그래도 작고 사소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잠에서 덜 깬 몽롱한 상태조차도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이 될 수 있잖아요. 그리고 훈련해야 해요. 아까 사진 찍다가 내가 기타로 ‘월광’을 쳤잖아요. 그거 연주하는 데만 2년이 더 걸렸어요. 누구한테 들려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까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까짓 소리가 뭐라고… 아름다운 소리 하나 만들어내려고 몇 년씩 연습하는 거잖아요. 다들 마찬가지예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요. 그런데 삶을 제대로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나요? 사실 거기에 더 큰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월광’을 연습하면서 생각했어요. 사물과 세상을 보는 것도 이렇게 훈련해야겠다고요. 여러분도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과거엔 엄청난 염세주의자였다고 말씀하셨어요. 어쩌다 허무와 비관에서 벗어나 작고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되신 거예요?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나요?
노, 아니에요. 1978년부터 올해 3월까지 내가 라디오 방송을 안 한 날이 하루도 없어요. 매일 묵묵히 했어요. 아주 묵묵히. 이렇게 매일매일 하는 일들이 단단한 기둥이 돼요. 커다란 일인지 작은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결국 성실을 이겨내는 건 없어요. 그것보다 큰 게 어디 있겠어요.생에 거대한 목표가 있고, 어딘가에 올라야 하고, 거기에 인생길이 있는 게 아니에요. 삶 자체는 들이마시는 숨과 내쉬는 숨 사이에 있는 거라고. 그런 시계추 같은 느낌이 매일매일 조금씩 쌓이면서 염세도 치유되더라고요. 루틴을 만들지 않고 금세 세상의 깨달음을 얻을 순 없다고 봐요. 지금 하는 일, 눈앞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그것뿐이에요.
20대에는 ‘청춘’, 60대에는 ‘노인의 벤치’를 쓰고, 오늘 ‘시간’을 불러주셨어요. 김창완의 음악에는 꾸준히 시간에 대한 사유가 등장합니다. 시간을 통해 무엇을 감각하시는지요?
속도 곱하기 시간은 거리… 이런 물리적 요소를 인식하다 보면 시간에 관한 생각이 더 애매해지는 것 아닌가 싶어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세면대에 벌레 한 마리가 죽어 있더군요. 평소 같으면 죽은 벌레라고 생각했을 텐데, 어젯밤에 인터뷰 질문지를 읽으며 잠에 들어서 그런지 시간을 다 쓴 벌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하. 그 옆에는 돌이 놓여 있었고. 그러고 나니 시간의 굴레 속에 놓인 내 얼굴이 거울을 통해 보이더군. 그런데 벌레와 돌 그리고 나의 시간은 다른 시간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벌레는 그저 자신의 시간을 다 써버린 거고요.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주신다면요?
시간을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끝이 없을 거예요. ‘내 시간’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아전인수식으로 생각하면, 내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다는 둥 안타까운 생각만 들 거라고. 물론 한 사람의 긴 생을 통틀어 볼 때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은 워낙 찰나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요.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그 커어다란 시간을 체험할 수는 없지만 상상해볼 수는 있잖아요. 그러다 보면 당신과 나의 시간이 같은 것임을 알게 돼요. 그럼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해지죠. 이건 뭐랄까.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아요. 많은 것을 애틋하게 보게 만들죠. 1954년 2월 22일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온 것이 내 시간이 아니에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소중한 건 우리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시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무엇이라 보시나요?
시간은 생의 인증서예요. 모든 아름다움의 보증서고요. 시간을 배제하고는 사람들이 생멸을 느낄 수 없잖아. 그러니 가장 확실한 증인은 시간 아닐까? 아름답고 소중하다 해도 그걸 증거하는 건 철학이나 미학이 아니에요. 그건 냉정한 심판이겠죠. 우리 자신을 돌아봐도 생의 족적이 내게 남지 않는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고, 기쁨이나 슬픔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어요.
종종 말씀하셨던 ‘음악은 사라져서 아름답다’는 말과도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렇죠. 음악이 사라져서 아름답다는 건 음악 자체가 소멸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흔히 사람들이 음악을 시간의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시간이 흐르면서 음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니까요.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사라지지 않아서 예쁜 것이 있나요? 아니, 영원한 것이 있어요? 예전에 제프 쿤스의 작품에 대한 비평문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의 작품이 지닌 매끈함에 대해 비판하면서 현대인들이 이모털(immortal, 불멸의)에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라고. 나는 그 말에 적극 동의해요. 모든 사물은 썩고 버려지게 마련인데, 왜 매끈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만 동경하느냐 이 말이에요. 늙으면 자연스레 주름이 생기고 노안이 오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왜 청춘을 그리워하면서 노년을 보내야 하느냐는 말이죠. 찌그러지고 사라진다는 것은요, 망측하고 흉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 시간 속에서 돋아나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우리는 상실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요.
하지만 노화 혹은 상실은 어쩔 수 없는 비탄이나 허탈감을 가져다주기도 하잖아요.
그럼요. 나 또한 외면하고 싶지만 나이 드는 일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들어요. 그러다 보면 쓸쓸해지기도 하죠. 생각해보면 나도 사라져서 아름답다는 말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점점 투명해지기도 해요. 사라지는 연습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잊히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요새 알랭 들롱의 주름진 얼굴이 회자되더군요. 나도 영화 <태양은 가득히> 속 알랭 들롱이 가슴속에 남아 있어요. 하지만 젊은 순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 변해가는 모습마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알랭 들롱의 청춘이 앙증맞은 현악사중주였다면, 그의 노년은 비감 어린 오케스트라라고 봐요. 난 그 주름에서 웅장함을 느껴요. 결국 모든 찰나가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것이죠.
요즘 많은 이들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마음, 무언가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커지나 싶기도 하고요.
얼마 전 미국에 다녀오면서 산 책을 보니까 2008년부터 휴대폰 세대가 시작되었대요. 그때 자란 세대를 앵셔스 제너레이션(Anxious Generation, 불안한 세대)이라고 하더라고. 생각해보면 다들 풍요를 잘못 구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엄청난 문명의 혜택 속에 사는 데도 사람들이 점점 삶에 자신 없어 하고, 스펙 쌓기에 전전긍긍하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시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거지. 영화 <빠삐용>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빠삐용이 독방에 갇혀서 죽어갈 때 누군가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로 사형이다”라고 말하는 꿈을 꿔요. 내가 감히 얘기하자면요. 인생을 낭비한다는 말이 가당키나 해요? 시간을 어떻게 썼건 간에요. 스스로 ‘내가 시간을 옳게 쓰는 건가?’ 하고 자책하기 쉬운데요. 아니, 어처구니없어요. 사람들이 삶을 선택하며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살아보니 그럴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우리 생명도 비슷해요. 목숨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해요. 살아 있는 것 자체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하지 않아요. 그저 숙명이고 또 기적이지. 모두 애쓰고 사는 게 뻔한 데, 뭐. 다들 대견해.(웃음)
하지만 인생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긴 정적 끝에) 내가 그린 그림 중에 ‘인생낙서’라는 게 있어요. 그 그림은 인생을 낙서처럼 끄적여봤다는 뜻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휘갈긴 듯해도 하루하루에 인생의 참맛이 담겨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인생을 현미경 들여다 보듯 꼼꼼히 살핀다고 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결에 몸을 던진 낙엽처럼 산다고 해서 삶이 놓아지는 것도 아니에요. 또 ‘천 피스 퍼즐’이라는 그림도 있는데, 캔버스를 놓고 아무 색이나 잡히는 대로 그린 거예요. 그 모양이 네모여도 괜찮고 세모여도 괜찮아요. 조각끼리 가깝게 그려도 되고, 저 멀리 떨어져서 그려도 돼요. 칠하다 지치면 쉬고, 쉬다가 지치면 칠했어요. 그러다 보니 캔버스가 꽉 차더라고. 그게 천 피스가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럼 뭐 어때요. 내 눈엔 두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결국 테마는 똑같거든.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된다고. 망가진 인생이라는 건 없어요.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평소 해오신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받았다는 분이 많잖아요. 문득 궁금해졌어요. 스스로는 어떻게 위로해주세요?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는 위로 안 해줘도 돼요… 나는 안 해도 돼요. 스스로를 대상으로 두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요. 나는 시간을 다 쓴 벌레처럼 내 시간을 다 쓸 거예요.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천수를 누릴 거라고.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아요.(웃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왜 다들 김창완을 보며 ‘여전히 소년 같다’,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주변 모든 것을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다른 이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대답하시잖아요. 순수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중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가는 길이 맞나?’, ‘내가 보는 세상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망망대해에 떠 있을 거예요. 아무도 이정표가 없죠. 그러나 나는 순수에서 북극성을 발견했어요. 그건 다른 게 아니에요. 있는 걸 있다 하고 없는 것이 없음을 아는 것. 그것밖에는 중요한 게 없어요.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결국 순수라는 거울을 보고 스스로 부끄럽냐, 부끄럽지 않으냐를 물으며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창완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꾸준히 젊은이들과 교류하고 또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시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젊은이와 어린 아이에게서 나의 미래를 발견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요즘 동창들 만나면 추어탕 먹으면서 말해요. “우리가 애들에게 지금 뭘 물려준 거냐”고요. 나 또한 기성세대 어른으로서 청년이 느끼는 힘듦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가 없어요. 젊은이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어른들 못마땅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이건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하는 이야기예요. 여러분이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어요. 가두면 가둘수록 다음 세대는 더 불행해질 것 같아. 그리고 나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들으면… 모르겠어요. 저는 저를 따르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최소한 소통은 하려고 해요. 그래도 이런 영감이 몇 명 있으면 그게 길목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 야생동물이 지나다니는 통로가 되고 싶어요. 그 안에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커다란 게 오고 가라는 게 아니야. 너구리나 고라니가 다니는 정도겠지만, 그런 통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사명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요? 그저 외면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애들을 사랑하면 돼요. 아니, 애들을 사랑할 것도 없어. 누구라도 사랑하면 돼요.
누구라도 사랑하면 미래와 세상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걸까요?
맞아요. 누구라도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그것도 훈련이 필요해. 그래도 사랑하면 다 돼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