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부를 수 있고, 나도 기꺼이 뛰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서로 믿는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 이런 일상이 쌓이면 내가 다른 쪽으로 우아해질 것 같다. 값비싼 옷을 입고 파인 다이닝을 먹는 그런 거 말고.” 배우 변요한이 믿는 것들.



꽤 오랜만의 화보 인터뷰다.
본의 아니게 공백기가 있었다. 한데 이렇게 두 작품이 몰려나와서.(웃음)
공교롭게도 영화 <그녀가 죽었다>와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삼식이 삼촌> 두 작품이 모두 5월 15일 같은 날 공개됐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는 후련한 마음과 긴장이 뒤섞인 날들을 보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그녀가 죽었다>는 2년 전 촬영한 작품이고, <삼식이 삼촌>은 지난해에 촬영을 마쳤다. 두 작품이 같은 날 공개되는 것에 대해 선배들도 ‘이럴 수 있나?’ 하시 더라. 나 역시 처음 듣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맡은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다른 두 인물을 한 번에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이 또한 좋다. 설렌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야생으로 보내는 시간 같은. 작품의 흥망이나 평가를 떠나 관객이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는 일련의 과정이 내게 물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시들지 않게. 그래서 요즘 아주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두 작품이기에 물을 두 배로 흠뻑….
너무 흠뻑이다.(웃음)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언론 시사회로 먼저 공개됐는데 기사를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이더라.
촬영 후 길었던 공백의 시간 동안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내내 쉬지 않고 움직이셨다. 그 덕분이다. 계속 (편집본을) 갈아 치우고, 새로 다시 시작하고, 음악을 뒤엎기도 하면서.
예산 규모만을 앞세우는 큰 영화들 사이에서 집요한 세공으로 속도와 밀도를 갖춘 영화를 만날 수 있어 반갑다.
내가 독립영화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5백만원만 있어도 영화는 만들 수 있다. 다만 대중 예술이다 보니 로케이션이나 기술적인 부분에서 큰 예산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한데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어떤 배경이나 미장센 같은 것이 필요 없겠다 싶었다. 글의 힘이 워낙 좋아서 이대로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변요한 배우의 연기에 대해 호흡과 리듬을 이야기한다. 극도의 긴장 상황을 일순간에 이완시키거나 느슨한 공기에 불현듯 서늘한 텐션을 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재능이 배우의 천부적 달란트로 느껴졌지만 1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타고난 재능이라 설명하기에는어려운, 노력으로서만 가능하다고 할 고른 지구력을 보이고있다. 애씀의 그림자가 없는 연기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나?
애 많이 쓴다.(웃음) 뒤에서 애를 너무 많이 써서 막상 현장 갔을 때 힘이 다 빠진다. 그래서 연기가 애드리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에너지가 지나치면 각 잡고 연기하는 느낌이 드니까 다 버려야 한다. 다 버리고 들어간다. 어느 배우든 그렇겠지만 뒤에서 잠 못 자며 고민을 많이 한다. 특히 새 작품 들어갈 때, 첫 회차를 앞두고는 잠을 아예 못 잔다. <자산어보> 찍을 때는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다가 어려운 신을 끝내고 (설)경구 형이랑 한잔하면서 형 앞에서 기절한 적도 있다. 그 때 형이 “그래. 자라, 자라” 하 며 등을 쓰다듬어주셨다. 한데 이 괴로운 방식이 내게 맞고, 심지어 재미도 있다.
변요한 배우는 왠지 굿판에 오른 듯 신명 나게 연기하고 홀연히 현장을 떠날 것 같은데.
굿판, 좋아한다.(웃음) 근데 준비 안 하고 굿판에 들어가면 거기서 못 나온다.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한 번만 더 하자고 조르게 된다. 다 해놓고도 다 안 한 것 같아 찜찜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나고 괴롭다. 한데 준비를 철저히 하고 굿판에 들어가면 바로 작두 타는 거다.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고. 피곤하긴 하지만 잠 못 이루면서 분투한 고민들은 결국 연기에 묻어날 수밖에 없다. ‘컷 오케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감독님이 대본을 썼고 누구보다 이 이야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니 그분이 고민한 것이 내 연기에 조금이라도 묻어나면 그게 OK라고 본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저 때 조금 더 묻어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늘 후회가 기본값인 세계이기도 하고.
고민을 너무 많이 하면 어느 순간 팔다리가 막 저리고 아프지 않나.
맞다. 근육통 살벌하다.
그럴 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은 안 드나?
아침에 일어났는데 얼굴이 심하게 부어 있거나, 혈액순환이 안 돼 다리가 저리 기도 하고, 두통도 나타난다. 현장 가는 길에 몸이 춥고 쑤시면 그 컨디션 그대로 들어간다. 그 컨디션을 그대로 타는 거다. 심지어 연기할 때 그 상황을 소품처럼 가져다 쓰기도 한다. 인물들과 재미있는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잠깐만, 나 왜 이렇게 팔이 저리냐” 하며 대사도 한다. 그렇게 순화된다.
장면 안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는 건가?
그런 게 살아 움직이는 거 아닐까. 내가 캐릭터에 먹히면 안 되고, 결국 이 캐릭터를 타이르면서 가야 하는데 캐릭터라는 존재는 언제나 너무 잘 삐쳐버린다. 말이 딱딱하게 나올 때도 많다. 그러니 이 친구를 좀 풀어줘야지 말도 자연스러워지고, 감정도 올라오고 눈물도 흘릴 수 있게 된다. 계속 밀당을 해야 하는 거다. 그때 내 컨디션을 솔직하게 노출하면 결국 캐릭터의 말과 행동이 내게 붙게 된다. 심지어 캐릭터가 먼저 다가와주고 위로도 해준다. 캐릭터와 일체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다. 재미있는 건 ‘딱 들어맞았다’는 느낌이 들면 아팠던 몸이 일순간 건강해진다.(웃음) 안 아프다. 그러면 ‘이제 다른 버전으로 한 번 더 가보시죠’ 하는 거다.
신묘한 예술 세계다. 배우가 하는 고민의 절대 비중을 차지할 인물 탐구는 어떻게 시작하나? 시나리오를 통해 인물을 처음 마주할 때 무엇을 가장 유심히 보는가?
갈등이다. 인물의 갈등을 보면 딜레마가 찾아지곤 한다. 관객에게 첫인상을 주는 첫 대사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건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갈등이 일어나는 순간에 인물의 진짜, 진실된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지 않나. 갈등을 찾으면 인물의 성향이 보이는 것 같다. 갈등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에서 그의 진짜 모습을 추측하는 것인가? 맞다. 갈등이 생기면 액션, 리액션이 명확해진다. 그 전에는 본래의 모습을 계속 숨기기 때문에 리액션만 보일 수도 있다. 혹은 또 숨기기 위해 액션만 보이는데 갈등은 이 두 움직임이 공존하기 때문에 그걸 찾고 다시 대본을 보면 눈빛부터 이 친구의 공기가 조금 느껴진다.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가는 거다. 마인드맵도 그렸다가 피라미드도 세웠다가. 그렇게 봉건제도까지 갔다가.(웃음) 피라미드 형식으로 인물의 계층까지 나눠보는 거다.




그렇다면 영화 <그녀가 죽었다>에서는 그녀가 죽은 순간 이후부터가 진짜인 건가?
재미있는 건 이 이야기는 정상적 갈등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은 진의와 다른 대사를 한다. 속으로 계속 딴생각을 하는 거다. 이 이중적 태도가 처음부터 극명하게 드러난다. 리액션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어느 순간 속으로 액션을 하고. 이 작업 방식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녀가 죽었다> 속 ‘구정태’는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 남의 삶을 훔쳐보는 게 취미인 공인중개사다. 변태 비호감 캐릭터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이 인간이 살인죄를 뒤집어쓰든지 말든지 하게 되지 않나. 배우로서 인물과의 연결을 놓아버리지 않게 하는 것도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우리 주변에 꽤 있을 법한 사람이다. 살인범은 아니다.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니지만 큰 죄이기도 하다. 이상한 선을 타는 인물인데 본인은 나름의 언어, 소신과 논리가 명확하고 좀체 안 풀어진다. 관객에게 계속 말을 던지는 사람인 데 어느 순간 관객은 이 인물이 큰 위기에 닥쳐서 죽네, 사네 하면 이상하게 응원하게 된다는 점이 웃긴 거다. 그러다 새로운, 더 엄청난 광인이 등장한다. 그때부터 광기의 대결이다. 영화는 이들을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거다. 굉장히 대범한 연출이라고 느꼈다. 감독님이 새로운 형식의, 좋은 대중 예술을 한 것 같다. 러닝타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 는 영화다운 영화다. 자신 있다. 자신 있다는 말을 언론 시사회 때부터 입이 닳도록 하고 있다.(웃음)
‘자신 있다’는 뉘앙스가 이렇게도 들리더라. ‘배우로서 부끄럽지 않다’고. 성격상 부끄러우면 배우 일을 그만둘 것 같다.
연기를 잘 못 할 수는 있다. 못하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연기든 고민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왜 보면 딱 알지 않나. 답습하는 느낌. 그 건 아닌 거다. 나아가 지금 좋은 평을 듣는 건 패기 있는 젊은 여성 감독이 한 고민과 고행에 대한 인정처럼도 느껴진다. 나이로 는 동생인 감독님이지만 무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잘됐으면 좋겠다. 정말.
대학생 때 독립영화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20대와 30 대 이후 배우 변요한을 연기하게 하는 동력이 달라짐을 느끼는가?
팬 카페에 자주 가는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서만 연기했다면 이제는 팬들을 위해 연기한다고. 나를 위해서 연기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일 테고, 그 비율을 팬들 쪽으로 늘려가겠다는 거다. 나아가 영화를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이들 그리고 연기를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연기하고 싶다. 그들을 대변한다는 건 자만이고, 다른 방법으로 이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 ‘나도 이렇게 하고 있다. 당신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당신도 하세요’ 하고. 그런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배우로서 하나의 지표가 되고 싶은 건가?
지표보다는 어떤 작은 점 정도? 하얀 도화지 위에 수많은 다양한 점이 있지만, 그 가운데 매직으로 그린 큰 점이기보다 아주 작은 점이어도 좋다.
모두가 지향하고 동경하는 하나의 큰 점보다는 변요한 배우 나름의 점을 찍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배우도 좋지만 무엇보다 두 다리를 단단히 땅에 붙인 채 잘 걸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점의 크기나 선명도보다는 ‘저 사람은 계속 걷고 있네. 보일 듯 말 듯한데 계속 꾸준히 가고 있네. 한번 봐볼까’ 하는 배우였으면 한다. 큰 점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지만 내가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언론 시사회에서 ‘이전 작품의 나보다 나아지길 바란다’라고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발전의 기준을 바깥에서 찾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늘 갖는 마음이다. 이번 인터뷰도 <한산: 용의 출현> 때보다 나아지길 바랐다. 어떤 게 좋고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저 더 잘하고 싶은 거다. 배우의 길을 길게 봤을 때 나라는 배우에 대한 믿음도 그렇게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죽었다> 리뷰 기사 중에 ‘변태로서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했다, 기존의 변태들을 갈아 치웠다’ 하는 식의 기사를 봤다. 재미있었다. 그거면 되는 거라고, 누군가에게 이미 성공한 거라고 본다. 같은 의미에서 <삼식이 삼촌>은 그보다 더 잘하려 했다.
나를 기준으로 삼다 보면 과거의 나와 싸워야 하는 경우는 없나. 많은 경쟁자 중 <자산어보>의 ‘창대’를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한데 작품이 끝나는 동시에 그 시간도 내 안에서 마무리된다. 어떤 뚜렷한 기억 정도만 남는 거다. 완전히 잊지는 못하겠지만 그때 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겨뤄야 하는 상대는 아닌 거다. 연애랑 비슷하다. 지금의 내가 다시 자은도(<자산어 보> 촬영지)에 가서 창대를 연기한다? 절대 그때처럼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그사이 아주 많은 것이 변했다. 당시에 내가 좋아 하던 걸 창대는 이제 싫어할 수 있고, 내가 싫어하던 걸 창대는 좋아할 수 있기에 과거는 과거대로 두려 한다. 다만 그 시간 동안 사랑한 만큼 내 무언가가 변하고 성장했을 거다. 그 힘으로 다음 발을 내딛는 거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후 맞이한 가장 큰 변화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달라지지 않은 모습, 지키려 하는 걸 이야기하려 했는데 사실 달라진 부분이 훨씬 많다. 달라지지 않으면 작품에 스며들 수 없을 거다. 세상과 사람을 알아야 하는 작업이고, 때로 상처도 ‘땡큐’ 하고 받아야 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할 줄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에너지를 극대화해 쓰는 방법도 깨우쳐야 하며 그 가운데서 외로움과 고독을 마주할 때는 ‘이 정도는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거지’ 하고 외면도 해야 한다. 배우로 살아가며 가장 큰 변화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커졌다는 거다. 아름다워 보인다. 사람도 환경도. 흔히 말하는 나보다 잘난 사람, 못난사람 할 것 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해하고 싶으니까. 예전에는 그런 것을 못 보고, 못 느꼈던 같다. 안 보였다. 그 아름다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