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느 계절보다 여름이 가장 고요하다고 느끼거든요. 시골집에 누워 있을 때 그 눅진한 느낌 있잖아요. 더운 공기가 나를 무겁게 누르는 것 같은데 한순간 시원한 바람이 지나갈 때의 산뜻함.” 배우 김혜준이 사랑하는 계절이 왔다.
신작 이슈로 만난 자리가 아니어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은 김혜준 배우가 사랑하는 것들을 왜 사랑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작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을요. 너무 좋아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니 일상의 귀여운 순간들을 잘 담아내던데요. 반복되는 시간도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 같습니다.
사실… 그때그때 달라요. 현생에 치이다 보면 작은 것이 엄청 소중하게 느껴져요. 반대로 탱자탱자 놀 때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잘 와닿지 않고요. 정신없이 바쁠 때,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고 산다는 느낌이 문득 스쳐갈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아차 싶죠.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사부작사부작 뭘 자꾸 해요.
요즘 이준호 배우와 함께하는 시리즈 <캐셔로>를 촬영 중이잖아요.
촬영 중이지만 그렇게 대단히 쫓기지는 않거 든요. 한데 아무래도 마음이 좀 어수선하니까 너무 바빠요.(웃음)
바쁜 와중에 최근 흥미롭게 본 것도 있나요? 최근 본 영화 중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작품이 있어요?
지금 촬영하고 있는 작품이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지만 연인 관계로 나오는데 제가 그 감정을 조금 까먹은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 연인 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봐야겠다 싶어 영화 <귀여운 여인>을 봤어요.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인 건 알고 있었지만 처음 봤거든요. 기대한 것보다 훨씬 행 복했어요. 리처드 기어에게 푹 빠져서 ‘저렇게 잘생겼었어?’ 하면서요. 로코의 정석, 로코의 클래식으로 통하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지금 어떤 장면이 떠올라요? 너무 설렌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장면이 있어요. 극 중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연인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잖아요. 처음 두 사람이 이 일을 두고 가격 흥정을 해요. 계약이 성사된 뒤 줄리아 로버츠가 더 높은 금액을 부를 걸 하니까, 리처드 기어가 그 가격이었어도 너라면 해줬을 거야 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을 몇 번을 돌려 봤는지 몰라요. 그리고 키스 신! 줄리아 로버츠가 절대 키스를 하지 않는 데 먼저 입을 맞추잖아요. 너무 애틋한 거예요. (잠시 정적) 갑자기 왜 이렇게 달달해졌지. 단 게 당기나 봐요.
배우의 삶에 영향을 준 영화도 있나요?
현실주의자라서 뭔가를 보거나 읽고 나면 대체로 잊어버리고, 내 삶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원동력만 얻는 편이라 영감이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꼽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밀양>을 보고는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됐어요. 모든 장면이 좋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전도연 선배님이 사과를 깎다가 과도를 쥔 손을 카메라 앵글 아래로 내린 채 하늘을 보잖아요. 그러고는 거리로 나가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하는 장면이… 지금… 생각이 나네요.
김혜준 배우가 사랑하는 이야기에는 최소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도 그랬고, 결핍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 속에서 그 결핍이 인간적인 유대감을 통해 채워졌을 때, 그때 경험하는 최소한의 행복에 크게 감동을 받아요. 가벼운 인사말이나 소소한 스킨십 같은. 너무나 외로울 때는 작은 친절도 크게 다가오잖아요.
그건 곧 김혜준 배우가 누군가에게 주고 싶고, 받고 싶은 것이겠죠?
그런 것 같아요. 대학교 2학년 때 했던 연극 중 에 특별한 형식 없이 관객과 배우가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는 작품이 있었어요. 극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가 연 기하지 않을 때도 무대 위에 있었거든요. 존재해야 하는 거죠. 저도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떤 관객분이 제 앞에 마주 앉아 있었어요.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눈을 바라보다 그 관객이 제 손을 잡아줬어요. 그때를 잊지 못해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서 그분의 손을 잡고 엉엉 운 기억이 있어요. 아마 외롭고 힘들던 때 였나 봐요. 모르는 사람이 제 손을 잡아준 거잖아요. 그때 전해지던 위로와 안도감을 무척 따뜻하게 기억해요.
배우는 연기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위로를 받는군요.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내가 맡은 인물의 편이 되어주고 싶잖아요. 캐릭터에 가장 가까운 편은 그 역을 맡은 배우니까요. 내가 어떻게든 관객에게 이 인물을 설득시켜야 이 인물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준비하고 세상에 공개하죠. 그때 사람들이 웃어주고, 울어주고, 즐거워하면 그 과정에서 저도 큰 위로를 받아요. 또 결과를 떠나서 내가 완전히 그 인물로 살았다면 그것으로도 행복해요. ‘이 인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어’라고 느끼는 작품이 많아요.
작품을 고르는 최소한의 원칙이 있다면요?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조금이라도 성장했으면 좋겠어 요. 선역이냐 악역이냐를 떠나서 성장해야 하고, 또 자기 말을 할 줄 알아야 해요. 인물이 조금이라도 성장하면 그걸 통해 저도 성장 하니까요.
역할을 통해 배우는군요.
항상 배워요. 당시 몸담은 작품과 인물에 따라가는 것 같아요. <킬러들의 쇼핑몰>의 ‘지안’이라는 캐릭터는 정체절명의 순간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친구거든요. 저도 그런 용기를 좀 배웠어요. 그렇게 강단 있는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좀 능글맞은 성격이라면 그 인물에게 사회생활 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조금씩 저 김혜준도 배우는 것 같아요.
흔히 좋은 연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많이 하잖아요. 좋은 사람이 결국 좋은 배우가 된다는 말도 있고, 그 장면 안 에서 살아 있으면 좋은 연기라는 말도 있어요. 좋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거나 혹은 없어야 할까요?
욕심. 욕심이 있고,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야 한다는 거죠?
슛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이 인물이 되겠다는 목표 의식, 반드시 이 인물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연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욕심을 부리면 내 연기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 떠나 인간적인 욕심을 드러내는 연기를 하면 상대방의 연기를 해치거나 극 전체를 망치게 돼요. 그걸 지양해요. 슛 들어가는 순간에는 욕심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현장을 보는 것이 그 인물이 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 아닐까요. 이론상으로는 아는데 저도 실천하기는 힘들어요.
적재적소에 욕심을 내야 한다는 말일 텐데요. 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혜준에게도 통용되는 말인가요?
일상에서는 욕심을 거의 안 내는 것 같아요. 다 그러려니 해요. 그런가 보지 뭐 하는 편이고요.
사사로운 욕심은 없어요? 하다못해 옷 한 벌을 사도 가장 좋은 걸 사고 싶은 마음 같은 거요.
그런 건 있죠. 배달 앱으로 음식을 주문할 때 족히 한 시간은 걸려요. 주문할 음식과 거기에 어울리는 사이드 메뉴를 골라 구성을 갖추고, 여기에 배달 팁까지 고려하기 때문에.(웃음) 그래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아직도 안 시켰어?”예요.
여행에서는 어때요? 여행이야말로 선택지가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일정 짜는 게 벅차서 못 가요. 누가 가자고 해서 대략 일정이 나오면 가요. 그 대신 누가 짜주는 대로 갔을 때 불평 안 할 자신은 있어요. 정말로 다 좋거든요. 심지어 리액션도 잘 해줄 자신 있어요. 한 시간 넘게 길을 헤매도 “야, 이럴 때 돌아다니지 언제 돌아다녀. 너무 좋다” 할 수 있어요. 근데 나한테 일정 짜는 건 안 시켰으면 좋겠어요.(웃음)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행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는 순간, 고통스럽죠. 일행의 안부를 계속 확인하고 싶어지잖아요.
맞아요. “괜찮아?” 하고 계속 물어보게 되고, “이거 나만 맛있지? 미안해” 하고.(웃음)
요즘 김혜준 배우를 기쁘게 하는 작은 반짝임은 무엇이에요?
제가 성취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요. 일상의 작은 성취를 모아서 자존감을 높이려 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운동하고 나서 ‘그래도 나 운동했다, 오늘은 산 가치가 있다, 보람 있다’ 이렇게 칭찬하면서. 요즘에는 여름이 다가오는 것 같아 설레요. 여름을 좋아하거든요. ‘이제 절대 춥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추우면 몸이 경직되는데 그게 몹시 싫거든요. 반면에 더우면 늘어지잖아요. 그런 이완되는 느낌이 참 좋아요.
김혜준 배우가 사랑하는 여름의 순간을 묘사한다면요?
저는 어느 계절보다 여름이 가장 고요하다고 느끼거든요. 시골집에 누워 있을 때 눅진한 느낌이 있잖아요. 더운 공기가 나를 무겁게 누르는 것 같은데 한순간 시원한 바람이 지나갈 때의 산뜻함. 그런 여름이 좋아요. 그래서 늘 여름이 기대돼요. 또 있어요. 밤에 잘 때 너무너무 더운데도 행복해요. 습한 공기를 뚫고 나오는 실오라기 같은 바람이 좋아요.
그런 밤에는 무슨 음악을 들으면 좋을까요?
들으면 안 돼요. 선풍기 소리를 들어야 해요. 바람 소리.